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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262)

27화

“……왜 나지?”

새카만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빗물이 야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페르데스가 그새 쉬어 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너 정도면 더 좋은 남편을 구할 수 있을 텐데…….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제가 원하는 건 좋은 남편이 아니거든요.”

“그럼?”

아델의 입술에 달 조각만큼이나 시리고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복수.”

그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섬뜩했다.

페르데스가 흠칫, 놀라며 쳐다보자 아델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을까요?”

그 모습이 독을 품은 검붉은 장미처럼 아름답고 치명적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페르데스의 가슴에 ‘복수’라는 단어가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가 가장 선망하고 갈망하는 단어였기에,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델이 누구에게 복수하려는 건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복수가 끝나면 내게 완전한 자유를 줄 건가?”

“물론이죠. 새장 문을 활짝 열고, 어디로 날아가시든 신경 쓰지 않겠어요.”

중요한 건 자유였고, 아델은 그걸 보장해 주겠다고 확답했다.

그녀의 말을 믿어도 될지 의문이 들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잘 부탁하지.”

설령 그녀에게 속았다고 하더라도 이 빌어먹을 황궁에 있는 것보다 낫겠지.

그렇게 판단한 페르데스는 아델의 손을 잡았다.

* * *

얼추 5황자가 잭에게 약을 먹일 시기가 되자 나는 알도르 경에게 그를 감시하다가, 만약 5황자가 접근한다면 나한테 바로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했던 대로 5황자는 잭에게 접근해 이상한 약을 먹였다.

마음 같아선 약을 먹는 걸 막고 싶었지만, 5황자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대신 5황자가 떠나자마자 발작을 일으킨 잭에게 알레르기 완화제를 먹이고, 미리 봐 둔 오래된 숙소로 옮겼다.

그리고 알도르 경에게 페르데스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알도르 경이 데리고 온 페르데스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두 번 다시 황자 전하께 손을 내밀지 않겠어요.”

고민하지 못하게 약간의 거짓말을 곁들여 부추겼더니, 그는 바로 내 손을 잡았다.

드디어 그를 손에 넣었어.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스타트 라인을 지났을 뿐인데 모든 걸 이룬 것처럼 기뻤다.

내가 황궁에 온 지 어언 한 달째.

황제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일 시기였다.

실제로 조바심이 났는지 황제는 2황자와 3황자를 닦달했고, 그만큼 그들이 날 찾아오는 일이 빈번해졌다.

내가 황제에게 불려 가는 횟수도 많아졌고.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페르데스와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고, 손발을 맞춰야 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러기엔 잭의 상태가 여전히 좋지 않아 페르데스의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려 있다는 것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내가 봄의 궁을 몰래 빠져나온 상황인 점도 문제 중 하나였다.

하녀들에게 들키기 전에 어서 돌아가야 했다.

페르데스도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그 남자의 상태가 나아지면 그때 제대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나는 우비를 둘러쓰며 페르데스에게 말했다.

“의원을 불러오는 건 사람들의 눈에 띄어 힘들지만, 약은 알도르 경을 통해 계속 조달해 줄게요.”

페르데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은혜는 잊지 않지.”

“그 말, 꼭 지키길 바랄게요.”

허름한 숙소를 나와 곧장 봄의 궁으로 향했다.

들키지 않도록 정문이 아닌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후문 쪽으로 빙 돌아갔다.

내 방과 연결된 테라스에는 팔을 길게 뻗은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테라스에 햇볕이 너무 강하게 내리쬐지 않게 그늘막용으로 심어 둔 나무였지만, 몰래 방을 나오거나 들어갈 때도 유용하게 쓰였다.

어릴 때부터 갈고 닦았던 나무 타기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무사히 방에 들어왔다.

알도르 경도 내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그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알도르 경의 표정이 상당히 안 좋았다.

방에 도착할 때까진 주변을 신경 쓰느라 미처 저 얼굴을 보지 못했다.

“왜 그래요, 알도르 경?”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표정이 아닌데?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내가 계속 말하라고 채근하자 알도르 경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저…… 조금 충격을 받은 것뿐입니다.”

“충격이요?”

알도르 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4황자 전하요’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알도르 경은 페르데스가 백치인 척 연기하고 있는 걸 몰랐지, 참.

“미리 말해 준다는 걸 깜빡했네요. 미안해요, 알도르 경.”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알도르 경의 말과 표정이 참 일치하지 않네.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페르데스의 정상적인 모습을 봤으니 놀랄 만하지.

나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며 젖어 달라붙은 비옷을 벗어 알도르 경에게 건네주었다.

“잘 처리해 줘요.”

“네.”

볼일도 끝났겠다, 이만 나가 보라고 손짓했는데, 아직 할 말이 있는지 알도르 경이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할 말 있으면 얼른 해요.”

“……그분입니까?”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요? 주어, 목적어 다 잘라먹지 말고 똑바로 물어봐요.”

알도르 경이 입술 끝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아가씨께서 결혼하실 분이 4황자 전하이십니까?”

“맞아요.”

그 자리에서 다 들었을 테고,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기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순간이지만 알도르 경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 표정은 마치.

“아가씨……!”

두 번째 생에서 황제가 보낸 암살자 때문에 죽기 직전 내게 보여 주었던 표정과 비슷했다.

* * *

알도르 경은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

하필 그가 죽기 직전에 봤던 표정과 같아 의아하면서도 걱정됐지만, 그보다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은지라 금방 잊혔다.

우선 5황자가 더는 페르데스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체르노서와 이안을 이용했다.

“전에 지나가다가 우연히 5황자 전하를 뵀는데 잘생기셨더라고요. 장래가 무척 기대돼요.”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혹 내가 5황자에게 반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고 판단한 두 황자는 5황자를 봄의 궁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하게 막았다.

잭이 일하는 마구간과 숙소는 봄의 궁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5황자가 페르데스에게 접근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잭의 갑각류 알레르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해 약이 제대로 들지 않아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약을 한 번 더 먹으니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알도르 경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곧바로 페르데스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오늘 밤 10시, 내 방에.

사용인들이 모르게 만나야 하니 테라스를 통해 페르데스를 방으로 들였다.

그를 데리러 갔던 알도르 경도 테라스를 통해 내 방에 들어왔다.

거의 사흘 만에 보는 페르데스는 예전보다 상태가 좋아 보였다.

5황자의 접근을 막은 게 도움이 된 모양이네.

다행이다.

“수고했어요, 알도르 경. 이만 나가 봐도 좋아요.”

“안 됩니다.”

“음?”

안 된다니?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봤다.

알도르 경이 페르데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아가씨께서 외간 남자와 방에 단둘이 있는 걸 알면서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페르데스가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할까 봐, 걱정돼서 못 나간다는 거야?

“풉.”

다소 황당한 걱정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페르데스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알도르 경을 쳐다보며 물었다.

“잘못된 말을 하는군. 내가 레오폴드 영애한테 이상한 짓을 할까 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내가 이상한 짓을 당할까 봐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잘못된 말은 전하께서도 하시네요.”

나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황당해하며 페르데스에게 말했다.

“제가 전하께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아니요. 알아요. 황자 전하는 제 취향이 아니거든요.”

그 순간 알도르 경이 기분 좋게 웃은 것처럼 보인 건 내 착각일까.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걱정은 하지 마세요.”

취향과 별개로 페르데스는 황제의 아들이었다.

그가 내 복수를 도와준다고 해도 황제의 더러운 피를 이은 사람과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페르데스가 입술을 삐죽 올렸다.

“서로가 취향이 아니라니 참 다행이네.”

“그러게요.”

진심으로 공감하자 페르데스가 눈매를 가늘게 접고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알도르 경을 돌아봤다.

“그렇다고 하니 쓸데없는 걱정은 이만 접어 두고 나가 봐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안 됩니다.”

“정말 괜찮으니까 나가 봐도 돼요, 알도르 경.”

“하지만…….”

“이건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에요, 알도르 경.”

알도르 경이 있으면 나는 물론 페르데스도 편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할 테니, 억지로 내보냈다.

그는 떠날 사람이었기에 우리의 대화를 들려줄 수 없는 것도 내보내는 이유 중 하나였다.

알도르 경이 나가자 페르데스가 내게 물었다.

“아끼는 호위 기사인 것 같은데, 이렇게 냉정하게 대해도 되는 건가?”

“아끼니까 그런 거예요.”

“무슨 의미지?”

“그런 게 있어요.”

설명해 준다고 페르데스가 이해할 리가 없었고.

앞으로의 계획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눌 만큼 시간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기에 대충 얼버무리고 소파에 앉았다.

황족보다 먼저 앉는 건 상당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만약 페르데스가 은연중에라도 황족으로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내 행동에 눈썹을 찡그리는 등 못마땅한 반응을 보일 터.

자, 과연 당신은 어떻게 나올까.

나는 몹시 궁금해하며 페르데스의 표정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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