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262)

26화

다이몬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어떻게든 아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두 황자를 쳐다봤다.

두 황자 사이에 낀 아델은 무척 곤란해하며 둘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쳤다.

“네놈들도 물러가라!”

자신이 세운 계획이 일그러지자 다이몬은 역정을 내며 두 황자도 쫓아냈다.

오랜 시간, 그의 곁을 지켜 온 시종장과 단둘이 남은 다이몬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안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아델 레오폴드에게 사람이라도 붙여 둔 걸까?

그것 말고는 이안이 알 방법이 없으니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시종장이 뜻밖의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게 아니라 2황자 전하께서 3황자 전하께 자랑하시러 가셨다고 합니다. 네놈이 아무리 발악해 봤자 자신이 레오폴드 공작이 될 거라고 말이죠.”

“뭣이?”

모처럼 그를 생각해서 자리를 마련해 줬건만, 그걸 이안에게 쪼르르 달려가 자랑했다고?

다이몬의 이마의 힘줄이 붉어졌다. 주먹을 꽉 쥔 손에도 푸른 힘줄이 섰다.

“당장 체르노서를 데려와라!”

그 직후, 체르노서에게 다이몬의 불호령이 떨어진 건 너무 당연한 순서였다.

* * *

“푸흡.”

티타임 내내 참고 있던 웃음이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터졌다.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도망쳐 나온 것도 더 있다간 거기서 웃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체르노서가 황제의 전언을 듣자마자 참지 못하고 이안에게 달려가도록 만든 건 바로 나였다.

나는 체르노서를 만날 때마다 이안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그의 질투심을 부추겼고.

이에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던 체르노서는 기회를 얻자마자 냉큼 이안에게 달려가 자랑을 한 것이다.

그게 제 발등을 찍는 짓이라는 것도 모르고, 멍청하게도.

덕분에 황제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됐으며, 시간도 벌 수 있었다.

그것도 통쾌했지만, 가장 통쾌한 건 당황한 황제의 얼굴을 보는 거였다.

특히 이안이 체르노서와 함께 등장했을 때, 반쯤 넋이 나갔던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웃음을 참을 수만 있었다면 좀 더 구경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몹시 아쉬웠다.

대신 넋이 나갔던 황제의 얼굴을 생각하며 한창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데 내 심부름을 하러 갔던 알도르 경이 돌아왔다.

“어서 와요, 알도르 경.”

기분이 좋은 만큼 환하게 웃으며 반기자, 내 웃음이 전염된 건지 알도르 경도 보기 드물게 옅은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아가씨.”

“그럼요. 아주 좋죠.”

황제를 골탕 먹였으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가요?”

“전에 부탁하신 겁니다.”

알도르 경이 내민 주머니에는 작은 약병이 들어 있었다.

갑각류 알레르기가 발병했을 때, 증상을 완화해 주는 약이었다.

알레르기 관련 약은 귀하고 비싸서, 이 작은 병 하나가 웬만한 평민 4인 가족 1년 생활비와 맞먹었다.

확신하건대 돈이 없는 페르데스는 이 약을 구하지 못해 허망하게 잭을 보냈겠지.

그래서 더 화가 나서 5황자에게 달려든 건지도.

“수고했어요, 알도르 경.”

“아닙니다.”

알도르 경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3황자가 보낸 시종이 찾아왔다.

“황자 전하께서 영애의 몸이 걱정된다며 보약을 보내셨습니다.”

시종이 검은색 액체가 담긴 약병이 여러 개 담긴 상자를 내밀었다.

색만 보면 보약이 아니라 사약인 것 같은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나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3황자가 보낸 시종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2황자가 보낸 시종도 찾아왔다.

색만 다른, 똑같은 보약을 들고서.

하여간 지기 싫어서 바득바득 따라 하는 건 똑같단 말이지.

그럼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든가, 너무 똑같이 따라 하니 같잖게 보였다.

‘하긴 체르노서 머리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지.’

주변에 있는 시종들은 그나마 똑똑했지만, 문제는 체르노서가 고집불통이라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였다.

황제의 말을 듣는 것도 그가 무서워서 듣는 거지, 아니었으면 쓸데없는 똥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보약은 어쩐다.

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곤란한 건 바로 두 사람이니 독은 없겠지만. 그래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놈들이 준 건 초콜릿 한 조각도 입에 넣을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버리자니 하녀들이 받은 보약이 어디 있냐고 물어볼 테고.

다른 사람에게 주자니 황자가 준 선물을 아무한테나 함부로 줄 수는 없었다.

그래, 아무한테는 줄 수 없지만, 같은 황족한테는 줘도 괜찮잖아?

나는 생각이 마침표를 찍자마자 종을 흔들었다.

잠시 후,

이안과 체르노서가 내게 보낸 보약은 페르데스의 가족이자 친구인 마구간지기, 잭의 품에 안겼다.

[몸에 좋은 거니, 꼭 황자 전하께 드리도록.]

라는 내 쪽지와 함께.

* *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이른 오전.

“먹어.”

5황자, 찰스가 기묘한 초록색 액체가 든 약병을 내밀었다.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또 이상한 약을 만들어 온 건가. 페르데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우, 우, 써, 보여.”

물론 겉으로는 백치인 척 연기했다.

페르데스가 말을 더듬자 찰스는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인상을 쓰며 귀를 팠다.

“말 더듬는 것 좀 어떻게 하면 안 돼? 들을 때마다 짜증 나 죽겠어.”

“미, 미안.”

“아, 됐다.”

찰스가 파리를 내쫓듯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한테 그걸 바라는 것보다 개새끼가 사람 말을 하길 바라는 게 더 낫지.”

찰스의 나이 올해 고작 14살.

엄연히 페르데스가 형이었지만, 형님이라는 호칭은 고사하고 욕설도 거침없이 읊조렸다.

그러나 페르데스는 저들이 이러는 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속내를 알 수 있어서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여자처럼 시커먼 속내를 숨기는 것보다 낫지.

페르데스는 얼마 전, 아델 레오폴드가 보낸 보약을 떠올렸다.

자신에게 보냈다면 가차 없이 버렸을 텐데, 하필 잭에게 보내는 바람에 전부 다 먹어야 했다.

그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에 보약이 담겨 있는 것처럼 입이 쓰고 신물이 올라왔다.

당장 찾아가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 보약을 먹고 정말 몸이 좋아지긴 했다.

불면증도 사라졌고, 봄이 오면 항상 같이 오던 비염도 많이 나아졌다.

그래서 페르데스는 아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야, 지금 딴생각하냐?”

눈치는 더럽게 없으면서, 이런 건 또 잘 맞히네.

페르데스는 다시 백치 가면을 썼다.

“미, 미아네.”

“아, 진짜 듣기 싫어.”

찰스는 혀를 차며 페르데스의 품에 약병을 안겨 주고 돌아섰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찾아올 테니까, 이거 먹고 기다려. 너도 그리고 네 종놈도 말이지.”

찰스가 떠났지만, 페르데스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찰스가 준 약병을 쳐다봤다.

종놈이라면 잭을 말하는 것일 터.

그런데 잭도 기다리라니. 왜지?

지금까지 찰스가 약의 효과를 지켜보기 위해 먹고 기다리라고 한 적은 많지만, 거기에 잭이 포함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잭의 이름이 거론되니 불안했다.

설마 그도 이 이상한 약을 먹은 건가?

“전하께선 제 손을 잡게 되실 겁니다. 그래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문득 머릿속에 아델 레오폴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페르데스는 서둘러 잭을 찾으러 나섰다.

당연히 마구간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곳에 갔건만, 없었다.

‘어딜 간 거지?’

보이지 않으니 더 초조했다.

“잭, 잭!”

페르데스는 잭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잭을 찾아다녔다.

혹시 누군가 자신이 제정신인 걸 알아보진 않을까, 걱정하지도 않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쏟아지는 빗속을 뛰어다니는 페르데스는 누가 봐도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나마 그를 불쌍하게 여기며 먹을 걸 조금씩 챙겨 주던 궁인들도 흠칫하며 피하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 그에게 다가가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전하.”

바로 알도르였다.

페르데스는 전에 아델을 만나러 갔을 때, 그를 본 걸 떠올렸다.

아델이 자신이 백치인 척 연기한 걸 알고 있으니, 호위 기사인 알도르 역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백치인 척 연기하는 게 맞는데도, 머릿속이 온통 잭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서 그러지 못했다.

“놔!”

“찾으시는 분이라면 아가씨께서 데리고 있습니다.”

지금 뭐라고…….

알도르의 손을 뿌리치려던 페르데스가 멈칫했다.

알도르가 고개를 까딱인 뒤, 돌아섰다.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진짜 잭과 그 여자가 함께 있는 걸까.

페르데스는 반신반의하며 알도르를 따라갔다.

알도르가 페르데스를 데리고 간 곳은 지금은 쓰지 않는 오래된 숙소였다.

잭은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안색이 창백했다.

“잭!”

그래서 잭이 죽었다고 생각한 페르데스는 아연실색하며 달려왔다가 그의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하며 침대맡에 주저앉았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요.”

그것도 잠시, 아델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아델이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알레르기 완화제를 먹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완화제라서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해요. 의원에게 진찰을 받으면 더 좋고요.”

“알레르기 완화제?”

“5황자가 저 남자한테 먹인 게 갑각류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약이거든요.”

“……!”

역시 5황자가 잭에게 이상한 약을 먹였구나!

거기다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약이라니.

“그 개자식이 기어코…….”

자칫 잭이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페르데스는 5황자를 향한 분노를 불태웠다.

바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빗소리로 가득 찬 허름한 숙소에 울려 퍼졌다.

그런 페르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델이 곁에 있던 알도르에게 잠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알도르가 나가자 아델은 페르데스의 앞으로 다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에 제가 말했었죠. 전하께선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제 손을 잡게 될 거라고.”

페르데스가 아델을 올려다봤다.

“아직 제 손을 잡을 생각이 없으신가요?”

“…….”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두 번 다시 황자 전하께 손을 내밀지 않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