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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262)

25화

“전에 듣자 하니, 황궁을 벗어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맞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거지?”

부정하지 않네. 다 들켰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안일하게 생각하네.

결혼하지 않은 황자가 황궁을 벗어나겠다는 건, 황제의 눈을 피해 반역 세력을 키우려고 한다는 나쁜 의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무조건 숨기는 게 좋은데.

뭐, 백치 황자가 반역같이 엄청난 걸 계획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황자였다.

정통 황위 계승권이 있는 황자.

그걸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처럼 말이지.

나는 입술 끝에 진한 미소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이안에게 준 차에는 술이 들어 있었지만, 나와 페르데스의 차는 정상적인 차였다.

페르데스가 초조해하며 혼자 온갖 망상을 할 수 있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를 마시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그의 인내심은 차 두 모금이 고작이었는지, 페르데스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해. 일부러 시간 끌지 말고.”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네요.”

“지금 내가 안 급하게 생겼어?”

페르데스가 벌컥 화를 내며 일어섰다.

“말하지 않겠다면 난 이만 가겠어.”

정말 성격이 급하구나.

그동안 백치 연기를 어떻게 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도와드릴게요.”

나는 문 쪽으로 성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황자 전하께서 황궁을 나가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덧붙인 말에 우뚝 멈춰 선 페르데스가 고개만 돌려 날 쳐다봤다.

“뭐라고 했지?”

“같은 말 반복하는 거 안 좋아하는데.”

장난스럽게 말하자 페르데스가 인상을 팍 썼다.

진짜 감정을 읽기 너무 쉽다니까.

“황자 전하께서 황궁을 나가실 수 있게 도와드린다고 했습니다.”

“공짜로 들어주는 건 아닐 테고, 원하는 게 뭐지?”

눈치도 빠르고.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역시 그를 조력자로 선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전하.”

* * *

쾅-!

“깜짝이야.”

오래된 나무 책상 앞에 앉아 말 관찰 일지를 쓰고 있던 잭은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돌아봤다.

“전하?”

그러자 인상을 팍 쓴 채 문에 기대어 있는 페르데스가 보였다.

잭은 페르데스가 백치 황자인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델이 알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설마 3황자 전하께서 괴롭히셨어요?”

“아니야. 그 자식이 날 괴롭힐 리가 없잖아.”

“그럼 왜…….”

페르데스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유일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잭을 유일한 가족이자 친구라고 생각하는 페르데스는 묻지 않아도 먼저 나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편이었다.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전부 말하는 편이었는데, 저렇게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몹시 걱정됐다.

잭은 쓰던 일지를 덮어 두고 페르데스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

“전하.”

잭이 계속 부르자 숨이 막힐 정도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페르데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잭의 순박한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머리는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여자, 아델 레오폴드와 나눴던 대화가 자꾸만 떠올랐다.

황궁에서 나가게 해 줄 테니 그녀와 결혼해 달라고 말한 것도 신경이 쓰였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그가 제안을 거절한 뒤 그녀가 한 말이었다.

“전하께선 제 손을 잡게 되실 겁니다. 그래야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요.”

소중한 것. 사람이 아닌 포괄적인 지칭이었지만, 페르데스는 잭을 떠올렸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잭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페르데스가 어떻게든 황궁을 나가려고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잭 때문이었다.

잭은 페르데스가 다른 이복형제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들어올 때마다 무척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싫어서, 그리고 갑갑한 새장을 벗어나 자유를 찾고 싶어 페르데스는 황궁을 나가려고 했다.

황자가 황궁을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결혼하거나 아니면 황자 신분을 박탈당하거나.

후자는 죽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 결혼해야 한다는 건데, 여기서도 문제가 생겼다.

백치 황자의 배필로 귀한 딸을 보내 줄 귀족을 찾는 게 힘들다는 거였다.

그래서 아델의 제안에 혹했었지만, 잠깐이었다.

보아하니 황실에 큰 불만을 품고, 자신을 이용해서 뭔가 일을 벌이려는 게 분명했다.

그런 사람과 결혼하면 갈망하던 자유를 얻을 수 없을 테니, 페르데스는 단칼에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랬는데, 그딴 말로 제 마음을 흔들어 놓다니……!

‘농간이 분명해.’

어떻게든 자신을 이용하려고 교묘하게 덫을 친 게 틀림없어.

“전하, 정말 말씀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페르데스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깊이 묻었다.

* * *

5황자가 만드는 건 갑각류 알레르기 치료제라고 했다.

그러니 당연히 알도르 경이 조사해 온 재료들도 치료제 재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갑각류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약이라고?”

이 무슨 황당한 결론이란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 다른 의원에게 다시 의뢰해 봤지만,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갑각류 알레르기가 없는 사람이 먹으면 해가 없지만, 있는 사람이 먹으면 발작을 일으키고 심한 경우엔 죽는다고 했다.

“그래서 4황자가 눈이 뒤집혔던 거구나.”

이걸로 이유는 완벽하게 알아냈는데, 이제 어쩐다.

페르데스에게 달려가서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테니 조심해라, 라고 말하자니 믿어 줄지 의문이었다.

오히려 날 이상한 여자 취급하며 지금보다 더 멀리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건 페르데스를 내 조력자로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일한 패였다.

이대로 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쩌면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걱정되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기억을 더듬어 날짜를 계산해 보면 그 사건이 일어나는 건 얼추 2주 뒤였다.

인내심 없는 황제가 그때까지 기다릴 리가 없었다.

그럼 기다리게 만들어야지.

“체크메이트.”

내가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체르노서와 마주 앉아 체스를 두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느 한쪽에 편중하지 않고 저울질을 해야, 누굴 선택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공평하게 이안과 체르노서를 번갈아 만났다.

“끄응.”

체르노서는 인상을 쓰고 체스 판을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내게 말했다.

“한 번만 물러 주면 안 됩니까?”

“이미 10번 넘게 물러 준 걸로 압니다만.”

“그건 그렇지만…….”

체르노서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어졌다.

체스를 할 줄 모르는 그가 내게 체스를 하자고 제안한 건, 어제 내가 3황자, 이안과 리버시(*오델로)를 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해서는.

나는 속으론 그를 비웃으면서도 겉으론 곱게 웃으며 비숍을 원래 있던 곳으로 옮겼다.

“이러면 될까요?”

킹이 도망갈 자리를 발견한 체르노서의 얼굴이 밝아졌다.

“체크메이트.”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어두워졌지만.

이젠 물러 달라고 말하는 것도 창피한지 체르노서가 긴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었다.

“내가 졌습니다.”

5전 5패인가. 달리 말하면 내가 5번 다 이긴 거였다.

몇 번이나 봐줬는데도 한 판도 못 이기는 게 조금 웃겼다.

“내가 영애만큼 시간이 많았더라면 체스를 많이 뒀을 텐데, 아쉽군요.”

내가 한가롭게 체스를 둘 만큼 할 일이 없다는 걸 비꼬아서 말하는 거였다.

“그러게요. 그래도 황자 전하께서 이렇게 저와 놀아 주신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네요.”

너도 할 일이 없으니 나와 체스를 두는 게 아니냐고 되돌려 줬더니 체르노서가 입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내게 쓴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절대 내 선택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참는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적당히 놀아 줬으니, 이만 돌려보낼까나.

“몸이 찌뿌둥해서 가볍게 운동할 겸 검을 휘두르려는데, 같이 하시겠어요?”

검 이야기를 하자 체르노서는 눈에 띄게 얼굴을 굳히며 벌떡 일어섰다.

“제안은 고맙지만,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어머, 그래요? 유감이네요. 그럼 다음에 꼭 같이해요.”

체르노서는 빈말이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지 않고, 휙 나갔다.

* * *

“사흘 전에는 이안, 이틀 전에는 체르노서 그리고 오늘은 또 이안이란 말이지.”

보좌관에게 보고를 받은 다이몬은 헛웃음을 지으며 삐딱하게 머리를 괬다.

아델이 저울질하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상황 자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둘 다 아델의 환심을 얻었다는 의미였으니까.

다이몬은 특히 체르노서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아델의 마음을 얻었다는 게 몹시 마음에 들었다.

‘아델 레오폴드가 체르노서를 선택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테니까.

이안은 그러기엔 고집이 세고 영악한 부분이 있었다. 잔꾀도 많이 부렸고.

꼭두각시가 영악해 봤자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기만 할 뿐, 도움이 되는 건 없었다.

그러니 다이몬은 아델이 꼭 체르노서를 선택해 주길 바랐다.

체르노서를 레오폴드 공작의 장례식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러려면 아델의 마음이 체르노서 쪽으로 좀 더 기울도록 만들어야겠지.

“레오폴드 영애에게 가벼운 티타임을 가지자고 전해라. 그 소식을 체르노서에게만 은밀하게 전하고.”

다이몬의 계획은 간단했다.

일단 아델을 불러 근황을 묻는 등 티타임을 가지고 있으면, 체르노서가 나타나 자연스럽게 동석한다.

그럼 체르노서의 칭찬을 하는 등 아델의 관심을 체르노서에게 돌린 뒤, 자신은 일을 핑계로 두 사람만 두고 쏙 빠질 계획이었다.

분명 그럴 계획이었는데.

“영애, 이것 좀 먹어 보세요.”

“저것보다 이게 더 맛있습니다, 영애.”

어째서 이안까지 같이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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