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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262)

24화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아가씨께서 5황자 전하를 골탕 먹일 계획을 꾸미고 계시니까요.”

“네? 제가요?”

“네. 아가씨가요.”

“…….”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뜬금없는 말에 황당하고 기가 차서 그를 쳐다보자 알도르 경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닙……니까?”

“아니에요.”

딱 잘라 부정했는데도 알도르 경은 좀처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말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애초에 알도르 경이 왜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건지 모르겠네요.”

“아가씨께서 마티나 영지에서 하신 일 때문입니다.”

마티나 영지에서 내가 한 일?

“2황자의 일을 말하는 건가요?”

설마 했는데 정답이었는지, 알도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비로소 알도르 경의 마음을 이해한 나는 픽 웃었다.

“그건 2황자가 내 공을 가로채니 화가 나서 복수하려고 그런 거고.”

비단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지만.

“5황자는 그런 적이 없으니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럼 이건 왜 알아 오라고 하신 겁니까?”

“비밀이에요.”

알도르 경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내 계획을 말하면 걱정할 것 같아 비밀에 부쳤다.

그게 마음에 안 드는지 알도르 경이 눈썹을 찡그렸다.

여전히 날 걱정하는 건가.

“걱정하지 말아요. 이건 누군가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조사하라고 한 거니까.”

“그…….”

알도르 경이 뭐라 말하려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3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알도르 경이 하려던 말을 삼키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하려던 말을 마저 하고 가도 돼요.”

“아닙니다.”

뭐야. 사람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말하기 싫다는 데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보내 주었다.

알도르 경이 나가고 그 자리를 3황자가 채웠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델 레오폴드 영애.”

어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내 예상대로 움직여 주는구나. 고맙게도.

“이안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속에 능구렁이가 백 마리는 든 것 같은 황제의 행동은 예상하기 어려웠지만, 어린 황자들의 행동을 예측하기는 쉬웠다.

나는 옅게 웃으며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3황자, 이안을 쳐다봤다.

체르노서가 약간 날카로운 이미지라면 이안은 부드러운 귀공자 스타일이었다.

성격도 체르노서보단 낫다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그러나 말 그대로 나은 거지 좋다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체르노서만큼이나 욕심도 많았다.

그러니 어떻게든 나와 결혼하려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지.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형제인 황자들은 전부 황궁을 나와 수도를 떠나야 했다.

그뿐인가, 불순한 마음을 먹지 못하게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신년제나 건국제 같은 국가적인 행사가 있을 때 외엔 수도에 발을 들일 수도 없었다.

단, 귀족 영애와 결혼해서 작위를 물려받은 경우는 예외였다.

작위를 받으면 황위 계승권이 박탈돼서 절대 황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도에 남을 수 있으니 황위와 연이 없는 황자들은 좋은 가문의 영애와 결혼해 작위를 물려받는 게 일종의 꿈이었다.

체르노서나 이안이 자존심을 굽혀 가며 나와 결혼하는 것에 목매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고.

“황자 전하께서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이 녀석 때문입니다.”

이안이 손짓하자 시종이 그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4황자를 앞으로 데리고 왔다.

“이 녀석이 영애에게 보답하고 싶다며 칭얼거리길래 보호자 자격으로 함께 왔습니다.”

그게 아니라 네가 날 만나려고 4황자를 앞세운 거겠지.

나는 여전히 바가지를 쓴 것처럼 머리가 덥수룩한 4황자를 내려다봤다.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4황자는 바보같이 헤벌쭉 웃으며 내게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이, 이, 이거, 보, 보답이야!”

누가 봐도 완벽한 백치 황자의 모습을 보니 그때 봤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준 캐시미어 숄과 바구니를 내팽개치고 발로 콱콱 밟으며 욕설을 읊조리던 황자의 모습이.

너무 상반되는 모습을 동시에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그 웃음을 선물을 받아서 기쁜 걸로 포장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안은 물론 그를 따라온 시종들과 하인들도 놀라며 날 바라봤다.

그건 4황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색 눈동자에 순간 놀라움과 의아함이 서렸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여기서 4황자가 가장 어리지만, 감정 조절은 그가 가장 잘하는 것 같네.

“그럼 두 분, 앉으세요.”

내가 자리를 권하자 이안이 슬쩍 4황자의 팔을 쳤다.

“나, 나는, 야, 약속이 있어서 이, 이만 가 볼게.”

그러자 4황자가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이안은 언제 4황자를 쳤냐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아쉽지만 이만 가 봐야 한다고 하니, 보내 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요? 어쩔 수 없죠.”

내가 종을 울리자 대기하고 있던 하녀가 들어와 공손히 인사했다.

이안이 자연스럽게 4황자를 하녀에게 넘겨주려고 하자, 그 전에 말했다.

“두 분이 가신다고 하니 궁의 입구까지 배웅해 드리렴.”

4황자를 하녀에게 넘겨주려던 이안의 손이 멈칫했다.

이안이 약간 당황스럽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 말은 저도 가라는 겁니까?”

“전하께서도 가시는 거 아니었나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되물었다.

“4황자 전하의 보호자 자격으로 오셨다길래 같이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요.”

남으려면 같이 남고, 떠나려면 같이 떠나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

이안이 체르노서만큼이나 눈치가 없어서 이 의미를 알아듣지 못했다면 일이 복잡해졌겠지만, 다행히 알아들었는지 그는 4황자의 어깨를 세게 잡으며 말했다.

“어떤 약속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처럼 은인을 뵈었는데 선물만 주고 바로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으니 좀 더 있자꾸나.”

결론이 났군.

“앉으세요, 두 분.”

나는 다시 싱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 * *

언제였던가, 체르노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3황자, 이안은 몹시 술이 약해서 도수 높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곯아떨어진다고.

그래서 그걸 가지고 장난을 많이 쳤다며 낄낄대며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그땐 이복동생이라고 해도 피를 나눈 동생인데, 저런 걸 자랑스럽게 말하는 체르노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쿵-

좋은 정보를 알려 준 덕분에 이안을 쉽게 잠재울 수 있었으니까.

차로 가장한 칵테일을 몇 모금 홀짝였을 뿐인데, 이안은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정말 정신을 잃은 거 맞겠지?

“황자 전하.”

나는 확인하기 위해 이안의 어깨를 크게 흔드는 등 그를 깨워 봤지만, 이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확실하게 취해 잠들었구나.

좋아. 그렇다면…….

“…….”

내가 돌아보자 4황자는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나도 웃음으로 화답하며 물었다.

“제가 전에 황자 전하께 드린 캐시미어 숄, 가지고 계시죠?”

“쇼, 쇼올?”

4황자는 그게 뭔지 모른다는 듯 말을 늘이며 눈을 크게 껌뻑였다.

진짜 연기 잘한다니까. 극단 배우를 했으면 대성공했겠네.

“네, 숄이요. 어깨에 이렇게 둘러 드렸잖아요.”

“아, 아!”

내가 행동까지 보이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4황자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더니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이, 잃어버렸어!”

“잃어버렸다고요?”

“으, 으응. 가, 가는데 바, 바람에 날아가서……!”

“바람에 날아간 게 아니라 전하께서 땅에 집어 던진 뒤, 발로 콱콱 밟은 건 아니고요?”

꼼지락거리던 손이 멈췄다. 대신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다 봤어요.”

나는 그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날, 황자 전하께서 하시는 거 다 봤다고요. 황제를 욕하는 것도 말이죠.”

“…….”

“백치인 척 연기하려면 항상 조심하셔야죠, 페르데스 황자 전하.”

흔들리던 눈동자도 멈췄다. 4황자, 페르데스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가 완전히 곯아떨어진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하지 마세요. 3황자 전하께선 절대 우리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십니다. 완전히 취하셨거든요.”

“…….”

“설마 제가 그런 것도 계산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꺼내겠어요?”

그러니 아무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싱긋 웃자 페르데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치밀한 성격이군.”

백치 가면을 드디어 벗어 던졌구나.

“이런 건 꼼꼼하다고 하는 거죠.”

지지않고 대꾸하자 실소를 뱉었다.

“어쩐지 날 꼬박꼬박 전하라고 부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 알고 있어서 그랬군.”

변성기가 지난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는 앳되면서도 비루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았다.

저 모습에는 확실히 백치 황자가 어울리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전하를 몰래 미행했다가 본래의 성격을 알게 된 거예요.”

“고상한 공작 영애에게 다른 사람을 미행하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취미는 아니고 걱정돼서 따라갔던 겁니다. 혹시 백치 황자 전하께서 길을 잃으시면 어쩌나, 하는 아주 사소하고 쓸데없는 걱정이요.”

황자 전하가 멀쩡한 줄 알았더라면 따라가지 않았을 거예요, 라고 말을 덧붙이자 페르데스가 입술을 비틀었다.

나를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번뜩였다.

누가 황제의 아들 아니랄까 봐 그 눈빛이 무서울 정도로 황제와 똑같았다.

그래서 섬뜩하고, 그를 괜히 선택했나 순간 후회가 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것 말곤 황제한테서 나와 레오폴드 공작가를 지킬 방법이 없기에 나는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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