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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262)

23화

[나, 다이몬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는 아델 레오폴드의 선택을 존중하여 그녀가 선택한 황자와의 결혼을 허락할 것을 엄숙히 맹세한다.]

언뜻 보면 내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이 각서엔 무조건 황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었다.

황제도 그걸 계산하고 내게 각서를 써 준 것이다.

이 각서가 그의 발목을 붙잡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말이지.

물론 이것만으로는 황제의 발목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를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나는 그 조력자로 4황자를 점찍어 두었다.

황제와 황궁을 싫어하고 몇 년 동안 황궁 사람들을 속인 뛰어난 연기 실력을 갖춘 그라면 내 계획을 도와줄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와 만나는 게 쉽지 않다는 거지.’

무작정 찾아가자니 이목이 쏠릴 테고, 황제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각서로 황제의 의심을 조금 풀긴 했지만, 원체 의심이 많은 인간이니 조심해서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 대신, 그리고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고 4황자를 데리고 와 줄 사람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한 시종이 커다란 장미꽃 다발과 보석함을 들고 찾아왔다.

“3황자이신 이안 황자 전하께서 영애에게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벌써 선물 공세가 시작됐네.

황제가 내게 선택권을 줬을 때부터 이렇게 될 걸 예상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더 빨랐다.

체르노서보다 이안이 먼저 움직인 것도 신기했고.

그나저나 3황자라.

그를 나와 4황자를 이어 줄 징검다리로 써 볼까?

“황자 전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렴.”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한껏 지으며 선물을 받았다.

내 미소에 껌뻑 넘어간 시종이 뿌듯하게 웃었다.

“영애께서 기쁘게 받아 주셔서 황자 전하도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3황자가 보낸 시종이 물러나기 무섭게 체르노서가 보낸 시종이 왔다.

“체르노서 황자 전하께서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3황자가 보낸 선물과 똑같이 커다란 장미꽃 다발과 보석함을 들고서.

굼뜬 것도 모자라 눈치도 없고, 진부하기까지 하다니.

나는 속으로 혀를 차며 체르노서가 보낸 시종에게 두고 가라고 말했다.

메이 대신 배속된 이름 모를 하녀가 황자들이 보낸 꽃다발을 정리하다가 내게 작은 카드를 내밀었다.

“2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꽃다발 안에 있었습니다.”

나는 카드를 열어 봤다.

카드 안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내게 그동안의 일을 사과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과할 거면 얼굴을 비춰야지, 이딴 카드에 적어 보내는 것도 웃겼지만.

더 웃긴 건 이 카드를 적은 사람이 체르노서가 아니라는 거였다.

글씨체를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비록 불운한 결혼 생활이었으나, 몇 년을 같이 살았던 만큼 체르노서의 글씨체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고 수행원에게 대충 적어 보내라고 명령을 내렸겠지.

진짜 웃긴 놈이라니까.

나는 코웃음을 치며 하녀가 보는 앞에서 카드를 갈기갈기 찢었다.

체르노서의 사과를 절대 받아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승냥이에게 기회를 줄 테니 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날 도와줄 조력자를 데리고서.

* * *

3황자의 궁.

“정말인가?”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검술 훈련을 하고 있던 이안은 시종이 가져온 소식에 반색하며 물었다.

“정말로 레오폴드 영애가 형님이 보낸 카드를 갈기갈기 찢어서 버렸어?”

“네!”

시종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갈기갈기 찢어서 버리는 모습을 시중드는 하녀가 똑똑히 봤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2황자 전하께서 보낸 꽃다발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황자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은 환하게 웃으며 받으셨지요. 고맙다는 인사도 전해 달라고 하셨고요.”

이어지는 말에 이안은 히죽 웃으며 턱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 냈다.

아델 레오폴드가 결혼 상대로 선택할 만한 황자는 자신과 체르노서, 두 명밖에 없다.

그런데 체르노서는 아델에게 미운털이 잔뜩 박혀 버렸다.

그렇다면 역시…….

“레오폴드 영애는 필시 황자 전하를 선택하실 겁니다!”

이안과 같은 생각을 한 시종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황자 전하께서 광활하고 풍요로운 레오폴드 영지의 주인이 되시는 거지요.”

“곧 황자 전하가 아닌 공작 각하라고 불러야겠네요.”

“하하, 결과는 아직 모르는 거니 벌써 설레발치지 말게.”

시종들을 만류하는 이안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건 시종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다들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황자 전하, 레오폴드 영애를 직접 찾아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와중에 한 시종이 이안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아무리 선택지가 황자 전하밖에 없다곤 하나 두 분은 얼굴도 모르는 사이가 아니십니까. 레오폴드 영애의 입장에선 선뜻 전하를 선택하기 고민될 수도 있습니다.”

“아, 그렇겠군요.”

다른 시종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시종의 말에 공감했다.

“그러니 미리 레오폴드 영애를 만나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전하.”

“그래야 만약의 가능성도 없어질 테니까요.”

시종들의 제안에 이안이 턱을 쓰다듬으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대들의 마음은 알겠지만, 무슨 명분으로 레오폴드 영애를 찾아간단 말인가. 느닷없이 찾아가면 마음을 얻긴커녕 경계심만 커질 것 같은데.”

“으음.”

저마다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시종들은 곧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말했다.

“4황자를 이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4황자?”

“네.”

이안은 자연스럽게 4황자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했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4황자를 본 게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기 때문이다.

체르노서나 쌍둥이 남매인 5황자, 3황녀는 화풀이 상대가 필요할 때마다 반푼이를 찾아가는 것 같았지만, 이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 더러운 놈과 제 신체 일부가 닿는 게 싫었고, 눈동자에 담는 것조차 역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이용하자고?

“4황자를 이용하라는 게 무슨 말이지?”

“듣자 하니 어제 4황자가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2황자 전하의 눈에 띄어 무지막지하게 깨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무시당하는 반푼이 황자라고 해도 황족은 황족.

그런데 귀족 출신의 시종들은 거침없이 4황자라고 불렀고, 이안도 그 점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지나가던 레오폴드 영애가 그 모습을 보고 몹시 화를 내며 4황자를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아,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봄의 궁으로 데리고 가서 먹을 걸 챙겨 주는 등 살뜰하게 4황자를 챙겼다고 하죠.”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지. 이안은 턱을 쓰다듬었다.

소문으로는 아델 레오폴드가 냉혈하고 무자비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4황자에게 온정을 베푼 걸 보니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반푼이에 백치라도 은혜에 보답할 줄은 알 테니, 4황자더러 레오폴드 영애에게 은혜에 보답하러 가라고 시키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황자님께서는 보호자로서 함께 가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군.”

천하고 비루한 4황자와 상종해야 한다는 건 싫었지만, 잠깐이었다.

자연스럽게 레오폴드 영애를 만나면 돌려보내야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짠 이안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이안은 땀을 닦은 수건을 하인에게 넘겨주며 시종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의 말대로 할 테니, 속히 준비해 주게.”

* * *

내가 지난 생에서 4황자, 페르데스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건 그가 연회나 파티 같은 곳에, 심지어 내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체르노서와 결혼하고 불과 한 달 만에 사고로 죽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체르노서와 결혼하지 않은 생에서도 페르데스는 딱 그 시기에 사고를 당해 죽었었다.

사고의 경위는 이랬다.

제2황비 소생이자 쌍둥이 중 한 명인 5황자는 페르데스가 갑자기 이성을 잃고 달려들자 놀라 그를 세게 밀쳤다.

그냥 넘어졌다면 엉덩방아를 찧는 걸로 끝났겠지만, 운 나쁘게도 페르데스는 깊은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운한 사고라고 말했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가 백치 황자인 척 연기하고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진 말이지.’

지금까지 황자들에게 수많은 모욕을 당했는데도 꿋꿋하게 버티던 페르데스가 갑자기 돌변한 데에는 필시 특별한 이유가 있을 터.

나는 그 이유가 5황자가 페르데스에게 특별한 사람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페르데스에게 특별한 사람은 마구간지기 잭밖에 없으니, 그 마구간지기와 5황자가 최근 만들고 있는 약을 조사해 달라고 알도르 경에게 부탁했다.

마구간지기에 대한 정보는 금방 가져왔지만, 5황자 쪽은 힘든지 시간이 좀 걸렸다.

“갑각류 알레르기 치료제입니다.”

그래도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알도르 경이 보고했다.

그나저나 갑각류 알레르기라니?

“그 알레르기, 4황자를 돌보는 마구간지기에게도 있는 거 아닌가요?”

전에 알도르 경이 조사해 왔던 자료를 떠올리며 묻자 맞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치료제를 왜 5황자가 만들고 있는 거죠?”

“3황녀 전하 때문입니다.”

3황녀는 5황자의 쌍둥이 누이였다.

“3황녀 전하께서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는데, 그걸 완전히 없앨 약을 만들겠다면서 연구하신답니다.”

“아아, 의도는 좋네요.”

그 의도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실험 대상으로 쓰며 괴롭게 하는 건 전혀 좋지 않았지만.

“그 치료제 안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알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이미 조사해 왔습니다.”

벌써 조사했다고?

나는 반신반의하며 알도르 경이 내민 종이를 받았다. 정말로 재료들이 쭉 적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조사해 온 거예요?”

“5황자 호위 기사 중에 아카데미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부탁해서 알아 온 겁니다.”

이래서 인맥이 좋다고 하는구나.

“고마워요, 알도르 경.”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알도르 경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제 이걸 의원에게 들고 가서 이대로 조합해서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아가씨.”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황족을 모욕하는 건 크나큰 중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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