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그럼 코르셋을 조이겠습니다.”
코르셋으로 허리를 가느다랗게 만들고, 그 위에 속옷부터 이것저것 입었다.
원래 드레스를 입고 화장대에 앉아 예쁘게 치장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이 모든 게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한 거라고 생각하니 더 싫었다.
지루하기도 했고. 하품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내 치장을 도와주는 하녀들을 쭉 훑어봤다.
그중에는 내가 4황자를 무사히 거처까지 데려다주라고 명령했던 하녀도 있었다.
내가 그 하녀를 빤히 쳐다보자, 찔리는 게 있는지 하녀는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소피아가 묻자 나는 그 하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저 하녀에게 처분을 내려 줬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할 건 해야지.
내게 지목당한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실례가 안 된다면,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명령 불복종. 이 정도면 처분을 내릴 이유가 충분할까?”
“물론입니다.”
소피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하녀들이 그 하녀의 양팔을 잡았다.
하녀가 잔뜩 당황하며 말했다.
“저, 저는 아가씨의 명령에 불복종한 적이 없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네가 4황자를 봄의 궁 입구에 버리고 가는 걸 봤는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내가 4황자를 언급하자 소피아의 눈 밑이 살짝 떨렸다.
하녀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소피아는 하녀를 끌고 가라고 지시를 내린 뒤, 우아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준비가 끝나셨으면 식당으로 가시겠습니까, 아가씨? 만찬 시간이 다 됐습니다.”
* * *
“어서 오게, 레오폴드 영애.”
“…….”
황제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뻔한 걸 입 안의 연한 살을 깨물며 가까스로 억눌렀다.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와서 앉게.”
“……네, 폐하.”
고작 대답했을 뿐인데, 누군가 목구멍을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 상태로 황제와 순조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나는 약간 걱정하며 시종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황제와 기다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앉는 자리였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어떻지?”
황제가 인자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첫 번째 생에선 저 미소에 껌뻑 속아 황제가 하자는 대로 했었다.
두 번째 생에선…… 그래, 그때도 멍청하게 황제의 거짓 미소에 또 속았었어.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체르노서가 황제의 명령을 받은 게 아닌, 그냥 내가 싫어서 날 죽였던 게 아닐까.
그럼 체르노서랑 결혼만 하지 않으면 돼.
그럼 다 해결될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었지.
알도르 경에게도 큰 민폐를 끼쳤고.
“황궁에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분노를 삭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내가 미처 삭이지 못한 분노를 읽었는지, 황제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무래도 영애가 황궁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한 게 있나 보군.”
당연히 있지. 당신과 이렇게 대화를 하는 거.
당신의 그 뻔뻔한 낯짝을 보는 거.
아니, 황궁에서 지내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얼른 안락한 내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불편하다기보다 조금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요.”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하녀에게 명령을 내렸는데, 명령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더라고요.”
“저런. 영애가 기분 나쁠 만하군.”
그렇지. 그것보다 당신이 내 말에 공감해 주는 게 더 기분 나쁘지만.
일부러 여기 오기 전에 그 하녀의 일을 들먹인 건 때마침 내 눈에 띈 것도 있지만, 지금처럼 내가 화가 난 게 황제한테 들켰을 때 변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여차하면 사계의 정원에서 체르노서와 있었던 일을 들먹일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황후에게 말해서 궁인들을 단속하라고 해야겠군.”
“괜히 저 때문에 일이 커지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되네요.”
“절대 아니니 걱정하지 말게. 그 외에도 기분이 상하는 일이 있었다면 뭐든 말하도록.”
“그러겠습니다.”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지만, 모르는 척 대답하고 식전주를 마셨다.
식욕을 돋워 주는 상큼한 식전주를 먹었건만, 식욕이 올라오긴커녕 속이 더 불편해졌다.
“레오폴드 공작의 일은 정말 유감이네.”
뒤이은 황제의 말에 속이 불편하다 못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저절로 일그러지는 인상을 억지로 펴고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내 아들의 실수 때문에 제국은 큰 인재를 잃고 말았군.”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황태자의 실수가 아닌 같잖은 자존심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거였다.
황태자가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주변의 말을 듣고 얌전히 막사에 붙어 있었더라면, 아버지는 허무하게 돌아가시지 않았을 테니까!
“황태자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깊게 자책하고 있어.”
개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는 것도 조금 고역이었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수프를 떠먹었다.
“황후도 레오폴드 공작의 죽음에 몹시 통탄하며 황태자를 매우 질책했으니 부디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혼자 자책하고, 황후가 황태자를 질책하는 게 아니라 내게 와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지.
내가 레오폴드 영지에 있을 땐 너무 멀어서 그랬다지만, 황궁에 있는데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게 웃겼다.
물론 내가 황궁에 온 지 하루밖에 안 되긴 했어도 그들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면 몇 번이고 와서 사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지 않는다는 건,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는 의미였다.
핏줄은 못 속인다는 말이 있던데, 누가 형제지간 아니랄까 봐 체르노서와 황태자가 하는 짓이 아주 똑같았다.
황후와 황제는 말할 것도 없었고.
내가 여기서 그걸 언급하면 황제는 필시 황태자에게 내게 사과하라고 명령을 내리겠지만, 말하지 않았다.
진심이라곤 한 스푼도 들어 있지 않은 거짓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황태자의 면상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황제는 식사 내내 허무하게 부친을 잃은 날 위로하는 등 내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앞으로의 내 계획을 묻는 등 첫 번째 생과 두 번째 생에서 했던 말과 행동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다만, 한 가지가 달라졌다.
바로 체르노서를 나와 엮지 않는다는 거였다. 결혼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뭐지?’
설마 레오폴드 공작령을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포기한 건가?
그럴 리가 없는데.
“……하여 내 생각엔 영애가 얼른 결혼해서 안정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아, 역시. 포기했을 리가 없지.
내가 시작을 비틀었던 만큼, 황제도 언급하는 순서가 조금 바뀐 것뿐이었다.
“영애도 그걸 바라고 신문에 구혼 광고를 낸 걸로 아는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침묵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듯, 이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황제는 체르노서를 언급하겠지.
“난 영애가 황자 중 한 명과 결혼해서 황가의 식구로 들어왔으면 하네.”
체르노서의 이름을 콕 집어 말하는 게 아니라 황자 중 한 명이라고?
예상을 벗어난 대답에 살짝 놀랐지만, 그래 봤자 선택지는 둘밖에 없었다.
2황자인 체르노서와 3황자인 이안.
황태자는 이미 결혼했고, 3황자 밑으론 아직 성년식을 치르지 않았다.
약혼은 성년식 전에도 할 수 있지만, 결혼은 무조건 성년식을 치른 후에 할 수 있으니, 4황자부턴 자연스럽게 제외하는 게 맞았다.
우선 약혼부터 하고, 그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릴 게 아니라면 말이지.
“영애의 생각은 어떤가?”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결혼은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중대사이니 신중하게 생각해 보게, 레오폴드 영애.”
황제가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휘며 날 바라봤다.
“난 진심으로 영애와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에 제안한 거니까 말일세.”
분명 웃고 있는 눈이었지만, 보고 있으면 마치 뱀을 마주하는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졌다.
* * *
밤새 한숨도 못 잤네.
전부 황제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가 교묘하게 친 덫을 피해갈 수 있을지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다 보니 잠을 설쳤다.
덕분에 좋은 방법을 떠올렸지만.
이 방법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전부 마티나 백작의 조언 덕분이었다.
나중에 마티나 백작에게 감사의 선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침을 먹자마자 황제를 찾았다.
“날 보고 싶어 했다고?”
긴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황제를 만나려면 최소 하루 전에는 일정이 괜찮은지 묻고 약속을 잡는 게 예의였다.
그런데 황제는 곧바로 날 만나 주었다. 그만큼 애가 닳았다는 의미였다.
“네. 어제 폐하께서 제안해 주신 사안에 대해 답을 드리려고요.”
“오오,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지?”
“대답을 드리기 전에 우선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황제는 눈썹을 살짝 올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제가 선택한 황자 전하 중 한 분과 결혼을 시켜주실 건가요, 폐하?”
“그럼! 결혼은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해야 하니 영애의 선택을 무조건 존중해 주겠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럼 각서를 써 주세요.”
“각서?”
황제의 눈 밑이 꿈틀거렸다.
그가 거절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쳤다.
“혹 저보다 황자비에 더 적합한 영애가 나타나면 폐하의 마음이 변할까 봐 두려워서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저도 그러길 바라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처럼요.”
“으음…….”
아버지의 일을 들먹이니 황제가 침음을 흘렸다.
“그러니 확실하게 각서를 받아두고 싶어요, 폐하. 해 주실 거죠?”
정말 불안해서, 그 외에 다른 이유 같은 건 없다는 듯 순진무구한 눈으로 바라보며 묻자 황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영애가 그리 불안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