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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1/262)

21화

잠시 후, 하녀가 바구니에 음식들을 한가득 담아 왔다. 연고는 주머니에 따로 넣어 왔다.

4황자의 정신이 멀쩡했다면 전부 넘겨줬겠지만, 그게 아니니 대신 하녀에게 다시 명령했다.

“그것들과 함께 4황자 전하를 거처로 모셔다드려라.”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제가요?”

“그럼 내가 할까?”

내가 팔짱을 끼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자, 하녀가 우물쭈물하다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얼굴에는 하기 싫은 티가 팍팍 났다. 눈동자에 4황자에 대한 경멸도 보였다.

황궁의 하녀라면 까다롭고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서 들어온 엘리트일 텐데, 이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해서야.

아니, 4황자는 황족은 물론 모든 궁인에게도 무시당하는 존재이니,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나중에 내 명령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확인해 볼 테니, 똑바로 수행하도록 해.”

하녀가 허튼 마음을 먹지 못하게 못을 박아 둔 뒤, 4황자에게 인사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전하.”

4황자는 여전히 바보 같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 잘가아.”

변성기가 온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을 더듬으니 더욱 바보 같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어째서 4황자를 무시하고 경멸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4황자가 더욱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러나 내 도움은 여기까지였다. 불쌍하다고 해도 4황자 역시 황족이었다.

괜히 엮였다가 황제가 이걸 빌미 삼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더는 4황자에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전 바쁘니까 여기서부턴 알아서 가세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장면을 보고 그럴 수가 없었다.

봄의 궁 입구에서 그 하녀가 무거운 바구니와 상처약을 떠넘기다시피 4황자에게 넘겨주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차피 당신이 지내는 마구간지기 숙소는 여기서 그렇게 안 멀잖아요.”

반푼이라고 해도 황자인데 당신이라니.

불경한 호칭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 와중에 존댓말은 꼬박꼬박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하기도 했고.

“갈 수 있죠?”

“으, 으응? 응, 헤헤.”

“어휴, 말을 말아야지.”

하녀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다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엄한 얼굴로 4황자를 내려다봤다.

“나중에 아가씨가 물어보면 제가 확실히 데려다줬다고 말해야 해요.”

“아……가씨?”

“당신을 구해 줬던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비로소 하녀가 말하는 아가씨가 나라는 걸 떠올린 건지 4황자가 헤벌쭉 웃었다.

하녀가 그런 4황자를 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했다.

“꼴에 예쁜 사람을 밝혀 가지곤.”

그 예쁜 사람이 혹시 나인가.

분명 기분 좋아야 할 칭찬인데, 저 하녀가 말하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무튼 전 이만 가 볼 테니, 딴 길로 새지 말고 곧장 마구간지기 숙소로 가요!”

하녀는 4황자에게 신신당부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분명 4황자를 거처까지 데려다주라고 명령했는데, 내 명령을 어긴 것이다.

이래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거겠지.

반푼이 4황자가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리가 없으니, 만약 내가 이 장면을 직접 보지 못했다면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지. 불행히도 봐 버렸는데.

나중에 저 하녀를 혼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4황자를 지켜봤다.

4황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다가 하녀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괜찮으려나.’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4황자가 무사히 마구간지기 숙소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됐다.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니 나는 창밖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가 이내 왔던 길을 돌아갔다.

딱히 뭔가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4황자가 무사히 마구간지기 숙소에 가는지만 확인할 생각으로, 기척을 죽이고 조용히 4황자의 뒤를 밟았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4황자는 다른 길로 새지 않고 똑바로 숙소로 가고 있었다.

더는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네.

“황자 전하.”

더는 따라가지 않으려는데, 4황자의 앞에 이제 막 소년티를 벗은 듯한 한 남자가 등장했다.

어두운 갈색 조끼는 마구간지기들이 입는 옷이었다.

저 남자가 4황자를 돌본다는 그 마구간지기인가 보네.

그런데 어디서 세게 얻어맞고 온 건지 남자의 얼굴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다리도 다친 건지 남자는 절뚝거리며 4황자에게 다가갔다.

“뭐야, 너.”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4황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집어 던지고 남자에게 달려갔다.

“상태가 왜 이래. 누구한테 맞은 거야?”

어라? 말을 전혀 안 더듬네?

“그냥 넘어진 거예요…….”

“내가 그냥 넘어진 거랑 맞은 것도 구별 못 하는 병신으로 보여?”

아까 본 백치 황자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며 4황자를 쳐다봤다.

4황자는 인상을 팍 쓰고 남자의 상태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물었다.

“설마 2황자가 그랬어?”

“하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긍정이라는 의미였다.

“이 개자식……!”

이에 4황자는 분개하며 주먹을 꽉 쥐였다. 눈동자에 살기가 깃들었다.

“전 괜찮으니까 너무 화내지 마세요.”

“이렇게 쥐어터져놓고 괜찮긴!”

“항상 있던 일이잖아요.”

“그게 더 문제라는 거야!”

4황자는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내가 둘러준 캐시미어 숄을 거칠게 던졌다.

그리고 마치 캐시미어 숄이 2황자인 양 콱콱 밟으며 욕을 읊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인지!”

“진정하세요, 황자 전하.”

남자는 4황자를 달래며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남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황급히 나무 뒤로 숨었다.

“다행히 보는 사람이 없네요.”

“이곳까지 누가 온다고.”

4황자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렸다.

“이 빌어먹을 황궁을 어서 벗어나든지 해야지, 불안해서 못 살겠어.”

“이제 성년식까지 2년밖에 안 남았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그래. 알았으니까 어서 들어가자. 약 발라줄게.”

4황자는 주변을 크게 둘러보곤 남자와 함께 마구간지기 숙소로 들어갔다.

* * *

백치 황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네.

하지만 내 앞에서 보여 주었던 모습은 완벽한 백치의 모습이었는데.

설마 지금까지 백치인 척 연기했던 건가?

사실 백치가 아닌데, 백치인 척 연기하는 황자라.

호기심이 동한 나는 4황자에 대해 조사했다.

조사라고 해도 특별하게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다.

궁인들을 상대로 4황자에 대해 슬쩍 물어보기만 해도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이미 아는 대로 4황자는 황제가 술을 먹고 하룻밤을 보낸 하녀에게서 태어난 황자였다.

황궁은 그 어떤 곳보다 권력 다툼이 심한 곳이었다.

특히 황위 다툼이 극심했다. 황위를 얻을 수 있다면 피를 나눈 형제도 가차 없이 죽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매정한 황궁에서 어린 황족이 살아남으려면 모친에게 힘이 있어야 했다.

모친의 힘이 약하거나, 설령 힘이 있다고 해도 그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당해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실제로 황자는 총 11명이 태어났지만, 그중 살아남은 황자는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7명 중 한 명이 바로 4황자였다.

모친의 힘이 약하다 못해 아예 없는 반푼이 황자인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백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위 계승권이 있는 4황자라도 저런 백치에게 황위를 물려줄 리가 없으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덕분에 4황자는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그게 다 생존을 위한 연기였단 말이지.’

새삼 4황자가 내가 준 캐시미어 숄을 퍽퍽 밟던 장면이 떠올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나 역시 4황자가 백치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4황자의 연기는 완벽했다.

게다가 말하는 걸 들어 봤을 때 4황자는 황궁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에게 황궁은 안 좋은 기억만 가득할 텐데, 당연히 떠나고 싶겠지.

“진짜 재미있는 황자야.”

황궁에선 진심으로 웃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4황자 덕분에 웃을 수 있었다.

“아가씨, 만찬에 가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그 웃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지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된 건가.

시간을 확인한 나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가기 싫었지만, 무려 황제가 부르는 터라 거역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욕실로 들어가자 하녀가 목욕 시중을 들기 위해 따라왔다. 메이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이후로 메이가 안 보이네.

“내 전담 하녀는 다른 사람이었던 걸로 아는데.”

행방이 궁금해서 묻자 하녀가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메이는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아가씨.”

체르노서에게 맞아서 못 오는 건 아니겠지?

문득 4황자를 무자비하게 밟던 체르노서가 떠올라 메이가 걱정됐다.

날 속인 게 괘씸해서 두고 온 건데, 그러지 말 걸 그랬나.

“메이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괜한 죄책감에 목욕하고 나오자마자 소피아에게 물었다.

“맞습니다, 아가씨.”

소피아가 무척 안타깝다는 듯 대답했다.

“그 아이도 아가씨를 모시는 걸 무척 영광으로 생각했었는데, 급작스레 건강이 나빠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가씨를 모시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것참 신기하네요. 아침에 봤을 땐 멀쩡했는데, 고작 반나절 만에 사람 몸이 그렇게 나빠질 수가 있는 건가요?”

“저도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는 건, 그만큼 안 좋다는 의미니까요.”

이렇게 찔러 봤는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네.

역시 하녀장은 다르다는 건가.

“그렇군요.”

메이의 상태가 걱정되긴 하지만, 계속 물어본다고 해서 그들이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리가 없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하녀를 계속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메이에 대한 건 금방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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