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그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우뚝 멈춰 섰다.
덩달아 멈춰 선 메이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된 거군.
비로소 나는 메이가 갑자기 내게 산책을 권유한 까닭을 눈치챘다.
황제로부터 나와 체르노서가 만날 수 있게 정원으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아니면 체르노서가 직접 메이에게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고.
하여간 날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에 제안한 것이 아닌 다른 음험한 꿍꿍이가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 꿍꿍이에 체르노서와 황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건 더 기분이 나빴고.
그렇다고 메이에게 뭐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일개 하녀인 그녀는 황족의 명령을 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른 죄밖에 없었으니까.
화를 내려면 황제나 체르노서에게 직접 내야겠지.
그것보다 마티나 영지와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로 당분간은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벌써 나타나다니.
그는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이 없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과연 체르노서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감히 날 속여서 여기까지 불러낸 것에 대한 죄도 물을 겸, 나는 체르노서를 만나기로 했다.
내가 다시 걸어가자 메이가 눈에 띄게 안도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내가 눈에 띄지 말랬지?”
가는 동안에도 체르노서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네놈이 내 말을 아주 우습게 보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내 눈앞에 자꾸 나타날 리가 없지.”
퍽, 퍽-
분노가 잔뜩 담긴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때리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숲에 울려 퍼졌다.
체르노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챈 메이가 더는 가지 말라는 듯 슬쩍 내 앞을 가로막았지만, 무시하고 계속 걸어갔다.
“안 그래도 그 미친년 때문에 짜증 나 죽겠는데…….”
“그 미친년이 혹시 저인가요?”
“!”
말을 걸자 체르노서가 깜짝 놀라며 날 돌아봤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여, 영애?”
나는 체르노서를 무시하고 그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주저앉아 있는 소년을 돌아봤다.
체르노서가 떠들어 댈 때부터 그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짐작했지만, 역시 다른 사람이 있었다.
밤하늘을 녹여 놓은 것 같은 새카만 머리카락은 덥수룩하게 자라 눈까지 가리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원단은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오래된 건지 이곳저곳 헤져 있었고, 소년의 몸에 맞지 않았다. 원래 그를 위해 만든 옷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소매가 짧아 드러난 팔에는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
‘매를 맞는 아이인가?’
황족의 스승들은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으니, 수업 태도가 불량하거나 숙제를 해 오지 않으면 그 제자 대신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때렸다.
그 아이가 바로 매를 맞는 아이였다.
황족의 대신인 만큼 고위 귀족까진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귀족 자제 중에서 선별됐다.
그러니 저 아이는 매를 맞는 아이가 아닐 거야.
하인 복장을 하지 않은 걸 봐서 하인도 아닌 것 같고.
그럼 누구지?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소년이 나를 쳐다봤다.
눈을 가릴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금색 눈동자가 보였다.
체르노서와 똑같은 눈 색.
태양을 품은 찬란한 금빛 눈동자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황족뿐이었다.
그 말인즉, 저 소년이 황족이라는 의미.
‘말도 안 돼.’
옷의 원단이 고급만 아니라면 거리의 부랑아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초라한 행색인데, 저 소년이 황족이라니.
믿을 수 없었고, 믿기지 않았다.
동시에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황제의 하룻밤 유희로 태어난 비운의 황자.
황자라는 호칭보다 반푼이, 백치, 얼간이로 더 많이 불린 4황자.
페르데스 드 빈센트 아타나시우스.
내가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고 있자, 체르노서가 슬쩍 소년을 가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왔군요, 영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귀하신 황자 전하께서 저 같은 미친년을 왜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그,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체르노서가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그건 영애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누구였는데요?”
“그건……!”
바보 같은 체르노서. 변명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나는 콧방귀를 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내가 다가오자 소년은 움찔하며 앉은 채 약간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서 본 소년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엉망진창이었다.
그 눈을 보지 않았다면 절대 이 소년을 황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였고.
소년이 진짜 황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구해 줘야지.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기엔 찝찝했고, 여기서 내가 소년을 데리고 가면 체르노서에게 좀 더 엿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내밀었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소년이 진짜 황자일지도 모른다는 걸 고려해서 적당히 존댓말도 썼다.
그런 내가 신기한지 소년은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일어났다.
체구가 작고 가는 것치고 생각보다 악력이 있네.
소년의 키는 내 가슴에도 미치지 못했다.
내 키가 작은 편이 아닌 것도 있지만, 페르데스 황자의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소년은 너무 작았다.
페르데스 황자는 나보다 두 살 어린 16살이니까.
키가 못해도 내 어깨는 넘어야 정상이었다.
그럼 역시 황자는 아닌가.
아무래도 상관없지.
나는 숄을 벗어 소년을 덮어 준 뒤, 소년의 어깨를 잡고 돌아섰다.
“레오폴드 영애!”
뒤에서 체르노서가 당황하며 날 불렀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메이도 무시하고 소년과 함께 정원을 나왔다.
* * *
아델을 허망하게 떠나보낸 체르노서는 절망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릿속에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할 다이몬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 모습을 또 마주할 걸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다이몬이 던진 잉크병에 맞아 깨진 머리의 상처가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면 부황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까.
체르노서는 깨끗하게 자른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처럼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친인 황후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당장의 화는 면할 수 있겠지만, 그만큼 후폭풍이 불어올 것이다.
그리고 황후의 도움은 최악의 상황을 위해 남겨 둬야 했다. 이런 사소한 곳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이게 다 그 반푼이 때문이야.”
그 반푼이가 갑자기 등장하지 않았다면 계획대로 잘됐을 텐데.
아델을 사계의 정원으로 데리고 오라고 메이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체르노서였다.
오늘 저녁까지 어떻게든 아델의 환심을 사서 같이 만찬에 참석하라는 다이몬의 명령에 따라 그녀를 이곳으로 부른 거였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사계의 정원을 처음 본 사람은 정원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건 아델 역시 마찬가지일 터.
정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기분이 좋아진 그녀에게 기차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 적당히 찬사를 늘어놓으며 마음을 얻는 게 바로 그의 계획이었다.
그래, 그럴 계획이었는데 반푼이가 등장하면서 전부 물거품이 됐다.
이게 다 그 반푼이 때문이야. 체르노서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 녀석만 없었다면, 그 개자식만 없었다면 계획대로 아델의 환심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으아아악!”
체르노서는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소리쳤다.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이 개자식!”
입에 담기 차마 민망한 욕설들이 메아리처럼 사계의 정원에 널리 울려 퍼졌다.
* * *
생을 여러 번 거듭하면서 모든 황족들을 한 번 이상은 만나 봤지만, 4황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자로 인정받았으나 황족으로서의 대우는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각종 연회는 물론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와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4황자의 얼굴을 몰라 이 소년이 정말 4황자가 맞는지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와 초라한 행색을 보면 맞는 것 같고.
키나 체구를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아가씨, 산책 잘 다녀오셨…… 허억!”
어느 쪽인지 궁금했는데, 날 부르며 달려오던 하녀의 반응을 보고 궁금증이 해결됐다.
이 소년, 4황자가 맞구나.
만약 아니라면 하녀가 저렇게 놀랄 리가 없었다.
“4황자 전하 맞으시죠?”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물어봤더니 소년이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웃거나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몸을 움직이는 등, 소년은 누가 봐도 모자라 보였다.
정신이 나간 백치 황자라는 별명이 왜 붙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이상한데, 돌봐 주는 사람까지 없으니 소년의 행색은 거리의 부랑자보다 못했다.
4황자의 키가 평균보다 한참 작은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일 것이다.
잭이라는 마구간지기가 곁에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고작 마구간지기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4황자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가 조금 불쌍해졌다.
4황자를 향한 동정심은 상처투성이의 비루한 몸뚱이를 보고 더 커졌다.
그가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닐 텐데 다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너.”
나는 날 부르러 오다가 4황자를 보고 멈칫했던 하녀에게 명령했다.
“주방에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와.”
“먹을 것이요?”
“그래.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과일이나 빵으로 가져와. 상처를 치료할 약도 가져오고.”
내가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단번에 눈치챈 하녀가 4황자를 쳐다봤다.
“헤헤.”
저딴 놈을 위해 음식을 가져다주는 게 아깝다는 의미의 아주 불경한 시선이었지만, 뭐가 그리 좋은지 4황자는 방실방실 웃기만 했다.
“얼른 안 가고 뭐 하는 거지?”
그런 4황자를 대신해서 짜증스레 말했더니, 하녀가 허둥지둥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