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감히 내게 말대꾸하다니.”
다이몬이 서슬 퍼런 눈으로 체르노서를 내려다봤다.
체르노서는 흉포한 포식자 앞에 놓인 가냘픈 초식동물처럼 발발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히 그에게 개겼다고 생각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다이몬이 책상을 쾅, 세게 내려치며 잇새로 말했다.
“이제 막 성년식을 치러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여자 하나 꼬시지 못한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노, 노력했습니다.”
체르노서는 다이몬에게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고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도 아델 레오폴드의 영애의 마음을 얻으려고 정말 노력했단 말입니다.”
“노력이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결과지.”
다이몬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었다.
“이딴 결과를 가져와 놓고 노력했다는 말은 비겁하고 한심한 패배자들의 변명일 뿐이란 말이다, 체르노서.”
졸지에 비겁하고 한심한 패배자가 된 체르노서는 욱, 하고 치미는 감정을 티끌만큼 남은 이성으로 애써 억눌렀다.
여기서 더 화내면 그땐 정말로 모든 게 끝이었다.
다이몬의 성격상 그의 피를 이은 황자라고 해도 황제를 기만했다는 죄를 물어 유폐할 수도 있었다.
“내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와라.”
체르노서의 어깨를 잡은 다이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지만 체르노서는 다이몬의 눈치를 보느라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네가 쓸모 있다는 걸 증명해.”
아들에게 쓸모를 증명하라고 윽박지르는 친부가 과연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렇지 않으면 널 내칠 수밖에 없다. 난 세상에서 쓸모없는 놈들을 제일 혐오하거든. 설령 내 아들이라도 말이지.”
“…….”
“내 말 알아들었겠지, 체르노서?”
모르겠다.
다이몬이 왜 이렇게 아델과 레오폴드 공작가에 집착하는 건지.
하필 체스 말로 자신을 선택한 건지.
전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네. 부황 폐하.”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라는 거였다.
* * *
황제가 내게 시종장을 보낸 건 황궁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이었다.
“폐하께서 레오폴드 영애를 저녁 만찬에 초대하셨습니다.”
시종장은 황제의 전언과 함께 그가 준 선물들을 방에 늘어놓았다.
드레스, 신발, 액세서리 등 하나같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폐하께선 저녁 만찬 때, 영애가 이걸 꼭 입고 참석해 주시길 바라셨습니다.”
“그래요.”
내키지 않지만 지금 내겐 거절할 능력이 없으니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이 떠나자마자 황제가 준 선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책을 보는 척, 소파에 앉아 황제를 만나면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그때 내 시중을 맡은 하녀가 말했다.
“아가씨, 아침을 드셨으니 가볍게 산책하면서 소화하는 게 어떠세요? 날씨가 너무 좋아요!”
이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브래들리나 소피아는 이전 생에서 본 적이 있어 바로 알아봤지만, 이 하녀는 이번 생에서 처음 보는 거였다.
게다가 소피아가 하녀를 소개해 줄 때, 다른 생각을 하느라 한 귀로 흘려들었던 탓에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코 주변에 주근깨가 콕콕 박힌 하녀의 얼굴을 보며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네 이름이 메이 맞지?”
“네, 맞아요! 아가씨!”
다행히 맞혔네.
어차피 황궁을 떠나면 보지 않을 하녀의 이름 따위가 무에 중요하겠냐만, 지금 내게는 중요했다.
이 하녀에게 이것저것 부탁할 게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산책이라. 나는 창밖을 쳐다봤다.
아직 겨울의 꼬리가 사라지지 않았는데, 정원에는 푸른 상록수와 화사한 꽃이 가득했다.
황궁에 사시사철, 봄처럼 따뜻하게 기온을 조절해 주는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는 덕분이었다.
그렇다 보니 나와 결혼하고 레오폴드 공작이 된 체르노서는 레오폴드 영지 생활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었다.
물론 레오폴드 공작저에도 온도 조절 마법이 걸려 있지만, 황궁처럼 전체적으로 걸린 건 아니었다.
침실 등 중요한 곳에만 걸려 있었다.
이 역시 레드 드래곤의 결계 때문이었다.
황궁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큰 공작저 전체에 온도 조절 마법을 걸려면 기차만큼이나 대량의 마나가 필요했기에, 그러지 못하고 일부분에만 걸어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레오폴드 공작령은 대륙의 북쪽에 있어 겨울이 무척 길었다.
평생 따뜻한 황궁에서만 지낸 데다가 추위를 많이 타는 체르노서가 지내기엔 최악의 영지인 것이다.
그래서 체르노서가 얼마나 불만을 터뜨렸던가.
자기가 원해서 레오폴드 공작이 되어 놓고, 이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작저에 걸린 온도 조절 마법을 그의 침실에만 집중시키는 등 그 위주로만 가동되도록 조절했다.
이렇게 보면 체르노서의 만행도 황제 못지않네.
날 죽인 것에서부터 이미 그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지만.
“으음. 산책하기 싫으세요, 아가씨……?”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메이의 말에 그녀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메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제 막 수도에 도착하셔서 피곤하신 건 알지만, 그럴수록 몸을 움직여야 풀린대요. 게다가 날씨도 너무 좋아서, 햇빛을 받으면 기분도 좋아지실 거예요.”
그런가. 나는 다시 창밖을 쳐다봤다. 녹음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찬란하고 눈부시긴 했지만, 오늘 더 날씨가 좋은지는 모르겠다.
꽃이 예쁘게 피긴 했네.
흐음, 한번 나가 볼까.
오랜만에 아침을 먹었더니 속이 약간 더부룩하기도 하고, 산책하면 기분 전환도 될 것 같아 일어섰다.
눈치 빠른 메이가 냉큼 캐시미어 숄을 가져왔다.
숄을 걸치고 밖으로 나오자 정자세로 보초를 서고 있던 알도르 경이 다가왔다.
“산책하러 가시는 겁니까?”
“네. 그것보다 쉬라니까, 왜 여기서 보초를 서고 있어요.”
“호위 기사로서 아가씨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보초를 설 건 아니잖아요.”
나는 고목나무처럼 서 있는 알도르 경의 등을 떠밀었다.
“피곤한 상태에선 보초를 서 봤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테니 푹 쉬고 와요.”
“하지만…….”
“괜찮아요. 알도르 경도 알다시피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고, 황궁 내에서 감히 절 습격할 사람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 푹 쉬고 돌아오라고 좀 더 세게 등을 떠밀자, 알도르 경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시간만 쉬고 오겠습니다.”
“고작 한 시간 가지고 되나? 못해도 여덟 시간은 쉬어야 잠도 자고 그러죠.”
알도르 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깁니다.”
“내가 보기엔 길지 않은데요?”
내가 물러서지 않자 알도르 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두 시간만 쉬고 오겠습니다.”
“좋아요. 저도 양보해서 일곱 시간으로 하죠.”
짧은 실랑이 끝에 우리는 다섯 시간으로 합의를 봤다.
휴식을 주는 것도 실랑이하며 합의를 봐야 한다니.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알도르 경은 너무 우직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알도르 경을 보내고, 메이를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황궁에 찾아온 손님들이 머무는 궁은 총 4개가 있었는데, 봄의 궁처럼 각각 계절의 이름을 붙여 놓은 터라 사계의 궁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사계의 궁 중심에는 커다란 연못을 품은 정원이 있었다.
내가 창밖으로 본, 그리고 지금 가는 정원이 바로 사계의 정원이었다.
메이는 사계의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정원이 너무 예쁘지 않나요? 전 여기 올 때마다 감탄해요!”
“예쁘긴 하네.”
카페트처럼 푹신한 잔디와 계절에 맞지 않게 화사하게 핀 장미.
따사로운 햇살을 가려주는 푸른 녹음까지.
황궁에서 마음에 드는 장소를 굳이 꼽자면 이곳을 선택할 정도로 정원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래도 난 역시 레오폴드 공작저에 있는 정원이 더 좋아.
내 어머니의 손길이 묻어 있는 그 정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공작저를 생각하니 돌아가고 싶었다.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돌아가려면 황제를 설득하고 내 권리를 찾아야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과연 성공할 수는 있을까?
지난 생처럼 황제에게 복수하기는커녕 또 개죽음을 당하는 건 아니겠지?
“…….”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진 의문에 아름다운 정원을 찾은 보람도 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뭘 보면 기분이 나아지려나.
“연못에 가 보시겠어요, 아가씨?”
고민하고 있는데 메이가 물었다.
지난 생에도 사계의 정원을 여러 번 찾아왔지만, 연못까지 가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원 깊은 곳까지 들어가 느긋하게 구경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유가 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사람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연못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번 보고 싶었다.
“그래. 가 보자. 연못까지 안내해 줄래, 메이?”
“네, 아가씨!”
메이의 씩씩한 안내를 받으며 정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녹음이 짙어졌다. 사방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이쯤 되니 정원이 아니라 숲에 온 기분이었다.
정원을 이렇게 크게 만들 이유가 있나. 관리하기 힘들 텐데.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화려한 풍경보다 다른 잿밥을 더 신경 쓰며 연못으로 가고 있는데.
“네놈이 왜 여기 있는 거야?”
멀지 않은 곳에서 짜증이 뒤섞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수가 없으려니.”
바로 체르노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