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을 땐 마땅히 축배를 들어야 하지만, 아직은 일렀다.
이제 겨우 첫 단추를 잘 끼워 맞췄을 뿐이었다.
게다가 곧 체르노서가 아델을 데리고 올 테니, 다이몬은 와인을 더 마시지 않고 자제했다.
제대로 된 축배는 ‘그것’을 손에 넣고 들어도 늦지 않았다.
다이몬은 기차가 수도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 시종장을 불러 명령했다.
“2황자가 중요한 손님을 데리고 올 테니, 성대한 오찬을 준비하거라.”
“네, 폐하.”
황후한테 아델 레오폴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라고 했는데, 준비해뒀겠지.
선물 말고도 아델의 환심을 살 만한 게 뭐가 있는지 생각하고 있는데, 시종이 브래들리 자작이 체르노서와 함께 돌아왔다고 보고했다.
“오, 그래. 지금 당장…….”
다이몬은 반색하며 일어섰다가 뒤늦게 시종의 말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물었다.
“지금 브래들리 자작과 2황자‘만’ 돌아왔다고 했나?”
“네, 폐하.”
“아델 레오폴드는?”
“레오폴드 영애는 같이 오지 않으셨습니다.”
“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체르노서는 분명 아델과 함께 황궁에 귀환하겠다고 말했었다.
마티나 영지에서 푸시크 토벌에 참전하는 걸 허락받기 위해 연락해 왔을 때도 아델과 함께 있다고 말했었고.
그런데 같이 오지 않았다니. 황당했다. 오다가 싸우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해도 황궁에 오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오지 않는 건 황명을 거역하는 거였다.
“폐하. 아델 레오폴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황명을 거역한 건 아닌가.
다시 자리에 앉은 다이몬은 인상을 쓰며 머리를 짚었다.
체르노서는 아델의 마음을 얻었다고 장담했지만, 아무래도 착각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두 사람이 따로 올 리가 없었다.
그래도 체르노서가 그렇게 말한 건 아델에게 어떤 낌새가 있었으니 그런 거겠지.
일단 거기에 걸어 볼까. 자세한 건 두 사람과 오찬을 들면서 파악할 참이었다.
그때 보좌관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찾아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2황자 전하의 일입니다만…….”
보좌관은 다이몬에게 마티나 영지에서 체르노서가 한 바보 같은 짓에 대해 말해 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다이몬은 시퍼런 힘줄이 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검을 제대로 휘두를 줄 모르는 체르노서가 푸시크 토벌에 참전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했었다.
그런데도 허락해 준 건, 체르노서가 여기서 아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 줘야 아델의 마음을 확실히 굳힐 수 있다고 말했을 뿐더러.
토벌 때 절대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지시만 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뭐?
푸시크가 무서워서 발발 떨다가 오줌을 지렸다고?
아델 덕에 목숨을 구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델의 공을 마치 자신의 공인 것처럼 거짓말한 게 들통나서 개망신을 톡톡히 당했다니.
황자인 체르노서의 망신은 황실의 망신이었고, 더 나아가 제국의 망신이기도 했다.
“네 이놈을……!”
그런데 생각 없이 그딴 짓을 벌인 체르노서가 몹시 괘씸해서 다이몬은 이를 박박 갈았다.
다이몬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이자 시종과 보좌관은 자라처럼 목을 쑥 집어넣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이몬은 마치 눈앞에 체르노서가 있는 것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시종을 쳐다봤다.
살벌한 눈빛을 정면에서 마주한 시종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다이몬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오찬은 취소다. 당장 체르노서, 그 자식을 내 앞으로 끌고 와!”
* * *
기차역 마차 대여소에서 마차를 빌려 황궁에 도착한 나는 높은 외성을 올려다봤다.
멀리서 봐도 황궁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외성은 크고 화려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탑은 고개를 한참 들어 올려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궁을 보며 제국의 자랑이라고, 죽기 전에 한 번만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다고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이런 구역질 나는 곳엔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았는데.
특히 이곳의 주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황제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펴며 속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자가 다른 여자들을 이끌고 다가왔다.
익숙한 얼굴.
나와 눈이 마주친 중년 여자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오폴드 영애.”
그래. 나는 널 수 없이 많이 봤지만, 넌 나를 처음 보겠지.
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왔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봄의 궁을 총괄하는 하녀장인 소피아라고 합니다.”
하녀들은 평민이었지만, 그들을 통솔하는 하녀장은 하급 귀족 중에서 뽑았다.
“그래요, 소피아. 만나서 반가워요.”
“먼 길을 오시느라 몹시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실 수 있게 바로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전에 황제 폐하를 뵈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난 모든 생을 통틀어 황궁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황제를 만나는 거였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생에선 나와 체르노서를 이어 주기 위해서.
두 번째 생에선 날 설득하기 위해서.
세 번째 생은…… 황궁에 아예 가지 않았으니 제외하고.
하여간 황궁에 올 때마다 황제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황궁에 도착하면 궁의 주인인 황제를 먼저 뵙고 인사하는 게 예법에 맞았다.
그런데 바로 방으로 안내하겠다고 하다니.
의아해서 묻자 소피아게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께선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을 영애를 생각하시어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인사하러 와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황제가 날 생각한다고?
지나가던 개도 알아듣지 못할 개소리였다.
하긴. 초반엔 내 환심을 사기 위해 날 위하는 척 연기하긴 했었지.
그래도 처음엔 무조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는데, 무슨 변덕인 걸까.
혹시 내가 체르노서랑 따로 온 것 때문인가?
“그럼 2황자 전하를 뵐 수 있을까요?”
“죄송하지만 황자 전하께선 지금 황제 폐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다.”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 말인즉, 지금쯤 체르노서는 황제에게 신나게 깨지는 중이라는 의미.
방금까지 안 좋았던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 * *
“아델 레오폴드의 마음을 얻으라고 보냈건만, 마음을 얻기는커녕 사고를 치고 돌아오다니!”
아델이 예상한 대로 체르노서는 황제, 다이몬에게 크게 혼나는 중이었다.
체르노서는 다이몬을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네놈이 제정신이 있는 게냐! 제국의 황자로서 체통을 지키진 못할망정 추태를 부리다니!”
“송구합니다, 부황 폐하.”
입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자세와 하는 말만 들어 보면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았지만,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을 응시하는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따금 입 안쪽을 꽉 깨무는 바람에 입 안에 비릿한 혈향이 감돌았다.
모든 건 아델 레오폴드, 그 여자가 잘못한 거였다.
그 여자가 푸시크 토벌에 참전해서 입지를 다지는 게 어떻겠냐며 달콤한 말로 유혹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테니까!
체르노서는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실수라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끔 꾹꾹 눌렀다.
누가 원인을 제공했든 간에 결과적으로 자신이 추태를 부린 거니, 전부 다 아델 레오폴드 때문이라고 말해도 다이몬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디서 말대답을 하냐는 더 분노를 사겠지.
“면목이 없습니다, 부황 폐하.”
이럴 땐 진심이라곤 한 줌도 담겨 있지 않은 거짓 사과를 하며 다이몬의 화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리는 게 가장 현명했다.
한참을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고함을 치던 다이몬은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았다.
드디어 끝난 건가. 체르노서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벼락같은 말이 떨어졌다.
“한 번 더 기회를 줄 테니, 이번엔 실수하지 말고 확실하게 아델 레오폴드의 마음을 얻어라.”
“네?”
체르노서는 처음으로 다이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이몬이 몹시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재차 말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아델 레오폴드의 마음을 얻으라고 했다.”
그러려면 예전보다 더 아델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광활한 제국의 황자인 자신이 일개 공작 영애 따위에게 자존심을 굽히고 살살 기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역겹고 짜증이 났다.
아델이 한 짓 때문에 당한 수모가 생각나면서 분노가 몸집을 키웠다.
“이번에도…….”
“싫습니다.”
분노가 이성을 잡아먹으면서, 체르노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이몬에게 싫다고 말했다.
이에 다이몬은 물론 체르노서도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웬만한 몬스터만큼이나 흉포한 다이몬에게 개기는 건 몹시 무서운 일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송구하오나 부황 폐하의 명령을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홧김이긴 하나 싫다고 말까지 했으니, 체르노서는 이대로 밀고 나가기로 했다.
“아델 레오폴드는 마티나 영지에서 있었던 일로 제게 크게 실망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당당하게 본래의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제가 유혹한다고 넘어오겠습니까? 오히려 반발심과 경계심만 더 커질 겁니다. 그러니 저보단 동생들을 보내는 것이…….”
퍽-!
다이몬이 던진 크리스털 잉크병에 머리를 정통으로 맞은 체르노서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깨진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을 적시며 시야를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