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체르노서와 만나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아, 수치심과 분노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보고 통쾌할 수는 있겠네.
그러나 그것 말곤 잃을 게 더 많으니 최대한 체르노서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하늘이 알아준 건지, 수도로 가는 내내 체르노서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굳이 나가지 않아도 객실 내에서 식사 등의 일을 대부분 해결할 수 있기는 했다.
게다가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해야 해서 거의 나가지 않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건 이상했다.
의아해서 알도르 경에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자 그가 뜻밖의 정보를 가져왔다.
“황자 전하께서도 아가씨와 부딪치는 걸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네. 객실을 나오려다가도 아가씨께서 외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외투를 벗고 다시 소파에 앉으셨다고 합니다.”
“풉.”
참지 못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알도르 경도 입술 끝에 힘을 딱 주고 있는 걸 봐서 체르노서의 행동이 웃긴 모양이다.
“좋네요. 황자가 앞으로도 계속 절 피해 다녔으면 좋겠어요.”
“지금 상황을 봐선 그러실 것 같습니다.”
아니요. 그는 황궁에 도착하면 언제 날 피했냐는 듯, 다시 거짓으로 웃는 가면을 쓰고 내게 작업을 걸 거예요.
황제가 그렇게 하라고 시킬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내 환심을 사서 나와 결혼하라고 황명을 내릴 테니, 체르노서는 내키지 않아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아. 체르노서를 생각하느라 나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나 보네.
“괜찮아요. 그것보다 이제 곧 수도에 도착하죠?”
“네. 한 시간 후에 도착입니다.”
“그렇군요.”
수도에 도착한다는 건 곧 황제를 만난다는 의미이니 긴장됐다.
부디 이번 생에는 황제에게 당연히 내가 가져야 할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를, 그에게 복수할 수 있기를 바라며 차가운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 * *
체르노서를 다시 만난 건, 기차가 수도역에 멈췄을 때였다.
“…….”
체르노서는 나를 보자마자 정색하며 싫은 티를 풀풀 풍겼다.
날 싫어할뿐더러, 나 역시 싫어하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만 하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대로 마차에서 내리려는데 체르노서가 내 팔을 잡았다.
내 짐을 들고 뒤따라오던 알도르 경은 반사적으로 체르노서의 팔을 잡았고.
체르노서가 눈을 치켜뜨며 알도르 경을 노려봤다.
알도르 경은 내 호위로서 당연한 일을 한 거지만, 상대가 황자라면 경우가 조금 달랐다.
특히 황족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댔다간 큰 처벌을 받을 수 있기에 나는 황급히 알도르 경에게 말했다.
“그 손 놓으세요, 알도르 경.”
알도르 경도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아는지 순순히 체르노서의 팔을 놓고 물러났다.
그러자 체르노서가 이기죽거리며 말했다.
“주인을 위해 목숨도 내걸다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호위 기사군요.”
마디마다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는 둥, 입에 발린 칭찬만 늘어놓던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황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알도르 경은 순수하게 저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런 것이니 부디 너그럽게 넘어가 주십시오.”
체르노서에게 몸을 낮추고 용서를 구하는 건 몹시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래야 알도르 경을 구할 수 있으니 기꺼이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체르노서가 팔짱을 끼고 못마땅한 눈으로 날 내려다봤다.
“내게 할 말은 그것뿐입니까?”
그럼? 내가 달리 해야 할 말이 있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에 쳐다보자 체르노서가 혀를 차며 입술을 비틀었다.
“이래서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말하는 뉘앙스를 봤을 때 내가 가해자이고, 그가 피해자인 것 같은데…… 무슨 일을 말하는 거지?
아, 설마?
“혹시 푸시크 토벌 때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정답인지 체르노서의 얼굴이 와장창 일그러졌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처음부터 내게 창피를 줄 계획이었습니까?”
그걸 이제 눈치챈 건가. 하여간 더럽게 눈치가 없긴.
“그럴 리가요.”
나는 시커먼 속마음을 감추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전하께 무슨 앙심이 있어, 창피를 줄 계획을 세운단 말입니까. 전 순수한 마음으로 전하를 도와드리려고 한 겁니다.”
체르노서가 실소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정말이에요.”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짜 진심이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전 정말로 전하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푸시크의 약점을 비롯하여 토벌할 때 조심해야 할 부분들을 알려 드렸죠.”
그걸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해서 푸시크의 주목을 받은 건 바로 체르노서였다.
설령 잘 지켰다고 해도 내가 특별하게 제조한 향주머니 때문에 그는 푸시크의 타깃이 됐겠지.
“게다가 전 전하께서 주변에 거짓 무용담을 말하고 다니셔도 전부 모르는 척 눈감아 드렸죠.”
“…….”
“이래도 제 진심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부정할 수 없는 사실들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묻자, 체르노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여전히 불만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여간 하는 짓만큼이나 속도 좁지.
이런 남자에게 껌뻑 속아 결혼했던 첫 번째 생의 나는 얼마나 멍청했던 걸까.
“아무래도 전하께서 절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황궁에는 따로 가겠습니다.”
“……!”
체르노서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 황궁에 따로 간다는 건 그와 내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러면 어떻게든 내 환심을 사라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게 되니 그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이만.”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기차에서 내렸다. 체르노서와 따로 황궁에 가는 게 내 계획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체르노서와 따로 황궁에 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가 먼저 자리를 깔아 주니 내 입장에선 행운이었다.
황급히 뒤따라 내린 알도르 경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아가씨?”
“안 될 건 뭔가요. 폐하께선 저보고 수도에 오라고만 하셨지, 황자 전하와 ‘함께’ 오라곤 하시지 않으셨잖아요.”
체르노서는 그렇게 명령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러니 이렇게 따로 가도 황제는 내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내 설명을 듣고도 불안한지 알도르 경은 계속 기차를 돌아봤다.
나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기차역을 나왔다. 역 입구에는 황실에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마차가 있었다.
그 앞에 서서 사람들을 살펴보던 남자는 날 발견하고 빠르게 다가왔다.
“아델 레오폴드 영애, 맞습니까?”
콜린 브래들리. 브래들리 자작이자 황제의 보좌관이었다.
“맞는데, 당신은 누구죠?”
이전 생에선 많이 봤지만, 이번 생에선 처음 보는 거니 모르는 척 물었다.
브래들리 자작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콜린 브래들리라고 합니다.”
“아, 브래들리 자작이군요.”
콜린 브래들리가 황제의 보좌관이 되기 전까지 브래들리 자작가는 영지도 없고, 인지도도 없는 제국의 흔한 자작가 중 하나였다.
훗날엔 콜린 브래들리가 황제의 보좌관으로 활약하면서 가문이 알려지긴 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선 황제의 보좌관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모르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가 단번에 자작인 걸 알아채니 브래들리 자작은 놀라며 날 쳐다봤다가, 이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명망 높은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께서 제 가문을 알고 계시다니. 무한한 가문의 영광입니다.”
나는 뭐라 말하는 대신 웃었다.
브래들리 자작도 화답하듯 웃으며 날 바라보다가 내 곁에 체르노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자 전하께선 같이 오지 않으신 겁니까?”
“같이 오긴 했지만, 황궁에 갈 땐 따로 가기로 했어요.”
브래들리 자작의 눈이 커졌다.
“네? 그 무슨…….”
“아가씨.”
알도르 경이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체르노서가 보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그럼 전 이만.”
체르노서에게 붙잡혀서 같이 마차를 타고 황궁에 가면, 시작부터 계획이 어긋나게 되니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 * *
황제, 다이몬은 근래 몹시 기분이 좋았다.
거치적거렸던 방해꾼이 사라진 데다가, 아델을 꼬드기라고 보냈던 체르노서에게서 좋은 대답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경외하는 부황 폐하. 아델 레오폴드는 제게 완전히 푹 빠졌으니 아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곧 폐하께서 원하시는 걸 바치겠습니다.”
체르노서는 영악한 황후의 배를 빌려 태어난 것치고 눈치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그 와중에 욕심은 많아 자꾸 남의 밥그릇에 껄떡거려서 골치가 아팠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이제 곧이다.”
곧 ‘그걸’ 손에 쥘 수 있을 거야.
와인 잔을 기울이는 다이몬의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다이몬은 와인을 마시며 체르노서가 아델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할지 계획을 세웠다.
체르노서가 완벽하게 아델의 마음을 얻었다고 했으니, 결혼을 추진해야지.
물론 다짜고짜 결혼하라고 하면 당황해서 도망갈 수도 있으니, 일단 그녀의 상황을 몹시 안타까워하며 같이 슬퍼해 주다가.
은근슬쩍 그녀의 처지가 얼마나 안 좋은지 상기시키고, 약간 겁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겁에 질린 아델은 냉큼 결혼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게 제 목을 조이는 목줄이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그러길래 순순히 넘겨줬으면 좋았잖아.”
그랬더라면 개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해야 하나?
죽은 레오폴드 공작을 떠올린 다이몬이 낮게 조소하며 빈 잔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