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내가 체르노서에게 준 향주머니에는 푸시크를 흥분시키는 특별한 약초가 들어 있었다.
푸시크들이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체르노서에게만 달려든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단순히 흥분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푸시크의 몸이 마비되는 효과도 있었다.
그 덕분에 손쉽게 푸시크들을 처리할 수 있었고, 몇몇 부상을 당하긴 했어도 토벌 자체는 대성공이었다.
이에 마티나 백작은 무척 기뻐했지만, 체르노서는 아니었다. 몹시 못마땅해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성질을 막 부렸다.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했던 무용담이 가짜인 게 들통났을 뿐만 아니라, 오줌까지 지려 개망신을 당했으니 그럴 수밖에.
어지간히도 창피했는지 그는 다음 날 바로 수도로 돌아가야겠다며 새로이 기차표를 끊었다.
토벌이 끝나자마자 먼 여정을 떠나겠다니. 정신 나간 짓이었다.
게다가 그를 보호하다가 다쳐서 당장 움직이지 못하는 호위 기사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체르노서가 기어코 가야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친 사람은 두고 가기로 했다.
나는 새로 끊은 기차표를 보다가 창밖을 쳐다봤다.
정원에선 토벌을 성공적으로 끝낸 기념으로 작은 파티가 열렸다.
마티나 백작은 내게 파티에 참석하기를 권했지만,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건 체르노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피곤하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 창피해서 거절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알도르 경도 피곤하다고 거절했고.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들은 체르노서의 못된 성질을 받아 주느라 바빴다.
그러다 보니 파티에 참석한 건 마티나 백작가의 기사들뿐이었다.
갑자기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체르노서를 보호하다가 다친 사람들에겐 미안했고.
‘적당히 할 걸 그랬나.’
하지만 그 자식이 짜증 나게 하는 걸 어떡해.
이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똑똑-
턱을 괴고 정원에서 열리는 파티를 구경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티나 백작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설마 이제 와 파티에 참석하라는 건 아닐 테고.
의아해서 묻자 마티나 백작이 다가와 천에 싸인 길쭉한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푸시크 토벌을 도와준 답례입니다.”
답례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답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닌걸요.”
“그래도 받아 주세요. 이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마티나 백작이 준 무언가를 받아 천을 걷었다.
“검입니다.”
은은한 촛불 아래 매끈한 검집이 자태를 드러냈다.
“아까 보니 호위 기사의 검을 쓰는 것 같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영애가 쓸 만한 것을 가져와 봤는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마음에 들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자세한 건 휘둘러 봐야 알겠지만, 검을 선물 받은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사람들이 내게 주는 선물은 대부분 관심도 없는 꽃이나 액세서리였으니까.
검을 선물 받은 건 모든 생을 통틀어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준 올벤 경이었다.
“오래전에 레오폴드 공작가를 방문했을 때, 올벤 경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올벤 경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티나 백작이 마침 그의 이야기를 꺼냈다.
“눈부신 재능을 가진 제자가 있는데, 그 제자가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환경이 아쉽다고 말이죠.”
“그 제자가 혹시 저인가요?”
“글쎄요. 제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알 수 없지만, 제 예상엔 영애가 맞는 것 같습니다. 영애가 올벤 경의 제자라면 말이죠.”
“제자는…… 맞아요.”
그가 날 가르쳤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올벤 경이 내 재능이 아깝다며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역시 마티나 백작이 말하는 제자는 내가 틀림없었다.
올벤 경이 주변에 그런 말을 하고 다녔을 줄이야. 놀랍고 신기했다.
말없이 검을 보고 있는데 마티나 백작이 말했다.
“솔직히 공작 각하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걱정했습니다. 특히 공작위 승계 문제에 대해서 말이죠.”
공작위 승계. 지금 내게 가장 예민한 문제였기에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레오폴드 공작가는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다 보니 대대로 기사 작위를 가진 후계자가 공작이 됐습니다.”
마티나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영애는 기사 작위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요.”
“무슨 의미죠?”
“영애가 공작위를 승계하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일이긴 하나, 객관적으로 봤을 땐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마티나 백작을 쳐다봤다.
“절 가지고 장난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제가 검을 다룰 줄 안다고 해도, 기사 작위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기사 작위는 따시면 됩니다.”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라는 소리군요.”
마티나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이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건, 같은 이야기를 알도르 경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제가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갔다고 칩시다.”
같은 말을 번복해야 한다는 게 짜증 나고, 속에선 깊은 한숨이 들끓었지만, 참고 물었다.
“그럼 그동안 레오폴드 공작령과 공작가는 누가 돌보죠? 가신들이 있긴 해도 최종 결정자가 있어야 할 텐데요.”
“영애가 기사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잠시 대리로 세워 두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없으니 문제죠.”
믿었던 하녀도 황제와 손을 잡고 날 배신하는 판국에 누굴 믿겠는가.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나마 알도르 경이나 하녀장인 사라, 총괄 집사인 하네스는 믿을 수 있었지만.
일개 사용인인 사라와 하네스에게 최종 결정권을 줄 수는 없었다.
알도르 경은 두 번째 생의 비극이 반복될 것 같아서 자격을 주기가 무서웠고.
애초에 황제가 내가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걸 눈 뜨고 지켜볼 리도 없지만.
황제의 눈을 속이면서, 완벽하게 내 편이 되어 대리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있다면 모를까, 기사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건 꿈같은 일이었다.
공작위 승계에 대해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체르노서를 골탕 먹여서 좋았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나는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피곤해서 이만 쉬고 싶네요.”
“제가 너무 눈치 없이 오래 있었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눈치챘는지 마티나 백작이 깔끔하게 물러났다.
혼자 남은 나는 마티나 백작이 주고 간 검집에서 검을 뺐다.
매끈한 칼날에 비친 내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게 검을 쓸 줄 아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들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왜 들키면 안 되는 건가요?”
혹시 제가 검을 쓰는 게 부끄러우셨나요?
아버지도 여자는 검을 쓰면 안 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그래서 절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 주지 않으신 건 아니겠죠?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 메아리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가 공허하게 사라졌다.
날카로운 검으로도 베어 낼 수 없는 답답한 마음을 움켜쥐며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내게 새로운 기차표를 준 호위 기사는 내일 아침 10시에 출발할 거라고 말했었다.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황자 전하께서 30분 전에 이미 떠나셨다고?”
부상 때문에 당분간 영지에 남기로 한 호위 기사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이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체르노서가 혼자 가 버린 건 괜찮았다.
내 입장에서도 그와 함께 가는 것보다 혼자 가는 게 나았으니까.
문제는 체르노서가 ‘말도 없이’ 혼자 가 버렸다는 거였다.
이건 명백하게 나와 레오폴드 공작가를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내세울 거라곤 이름밖에 없는 황자에게 무시당한 건 몹시 짜증 나는 일이었다.
그래도 달리 생각해 보면 수도로 가는 동안 그가 날 귀찮게 할 일이 없다는 의미이니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 그 남자에겐 관심받는 것보단 차라리 무시당하는 게 나았다.
“아무리 황자 전하라도 아가씨를 이렇게 무시하는 건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만, 알도르 경.”
충직한 알도르 경이 분개하자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호위 기사가 약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 숙여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레오폴드 영애.”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니죠.”
사과하려면 체르노서, 그 남자가 직접 해야지.
사과한다고 해서 받아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그럼 우리도 이만 출발하죠, 알도르 경. 이러다 기차 시간에 늦으면 큰일이잖아요.”
“네, 아가씨.”
마티나 백작의 배웅을 받으며 알도르 경과 함께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은 여러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기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일등석의 특권으로 기다리지 않고 바로 기차에 올라탔다.
마법 증폭 기차는 총 8개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일등석은 첫 번째 칸에만 존재했으며, 객실도 4개밖에 되지 않았다.
좁은 기차 객실에 침대며 소파며, 이것저것 넣다 보니 많이 만들 수가 없었다.
즉, 아주 가까운 곳에 체르노서가 있다는 의미.
나는 두꺼운 모피 코트를 벗으며 알도르 경에게 물었다.
“체르노서 황자의 좌석은 어디죠?”
알도르 경이 자연스럽게 내가 벗은 코트를 받으며 대답했다.
“바로 옆 객실에 계십니다. 인사하러 가실 생각이십니까?”
“하하.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요, 알도르 경.”
1분 1초도 보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인사 따위를 하러 갈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파에 앉자 알도르 경이 의아해하며 내게 되물었다.
“그럼 황자 전하의 객실은 왜 물어보신 겁니까?”
왜 물어본 거냐고?
그야 당연히…….
“최대한 황자랑 마주치지 않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