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정말 괜찮은 거 맞겠지요?”
“네?”
“푸시크 토벌 말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정말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 거 맞겠지요?”
그건 내 팔을 잡은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정말이지. 체르노서가 겁쟁이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저절로 그려지는 비웃음을 억지로 삼키기 위해 말없이 쳐다봤더니, 체르노서가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는 괜찮지만, 영애가 걱정돼서요. 전에는 푸시크의 수가 적고, 영애가 푸시크의 약점을 알고 있어서 무사히 처치했지만…….”
뭐지? 그는 내가 직접 푸시크를 해치운 걸 모르는 건가?
체르노서야 당시 바보같이 기절해 있었으니 그렇다 쳐도, 호위 기사들이 말해 주지 않은 게 의아했다.
내가 검을 쓸 수 있는 걸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체르노서에겐 말할 줄 알았는데.
“이번엔 푸시크가 우글우글한 소굴에 가는 거니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돼서……. 아, 물론 제가 아니라 영애가 걱정되는 겁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전 무사할 테니까요.”
당신은 아니겠지만.
그 말을 삼키며 환하게 웃자 비로소 안심됐는지 체르노서도 웃었다.
* * *
이튿날, 새벽.
해가 뜨자마자 우리는 푸시크를 잡기 위해 성을 나섰다.
내가 함께 간다는 소식을 들은 마티나 백작은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체르노서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레오폴드 영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 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누구를 지킨다는 건지.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체르노서는 그의 주제를 전혀 모르는 걸까?
체르노서가 강력하게 주장하니 마티나 백작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대신 내게 호위를 몇 명 붙였다.
호위를 주렁주렁 데리고 다니는 건 조금 귀찮긴 하지만, 이 계획은 구경꾼이 많을수록 좋으니 받아들였다.
그랬는데, 설마 호위를 다섯 명씩이나 붙일 줄이야.
마티나 백작이 내 검술 실력을 모르니 그런 거라고 생각해도 너무 많았다.
내가 뒤따라오는 호위들을 슬쩍 쳐다보자 바로 옆에서 나란히 가던 체르노서가 말을 바짝 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마티나 백작에게 호위 기사를 많이 붙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황자 전하께서 직접요?”
“네. 이러는 편이 영애가 더 안전할 것 같아서요.”
그게 아니라 네 안전을 위해서 그런 거겠지.
내 호위라고 해도 나와 체르노서가 동시에 위험에 처하면 저들은 십중팔구 제국의 황자인 그를 구할 테니까.
체르노서 전속 호위 기사만 해도 열 명이나 되는데, 그걸로는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지.
“그러시군요. 제 걱정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체르노서가 뿌듯하게 웃었다.
“제가 영애의 걱정을 하는 건 당연하죠. 영애는 장차…….”
장차?
“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지. 굉장히 꺼림칙한 말을 하려다 삼킨 것 같은데.
내가 쳐다보자 체르노서가 딴청을 피웠다.
“전하!”
때마침 마티나 백작이 그를 찾으면서, 체르노서가 멀어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니케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진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준 향주머니를 제대로 지니고 있구나.
좋아. 계획대로 잘되고 있어.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다가왔다.
“아가씨께서 직접 만든 향주머니를 황자 전하께 드렸군요.”
“제가 향주머니를 만들 걸 알고 있나요?”
“쪽지에 적어 주신 재료가 보통 향주머니를 만들 때 쓰는 재료라 그럴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아, 그래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구나.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죠.”
그 한 가지가 뭔지 바로 알 것 같아 말없이 웃었다.
알도르 경이 미간 사이를 좁히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시는 겁니까, 아가씨.”
“별거 아니에요. 그냥 사소한 장난?”
“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전하께선 조금도 다치지 않을 테니까.”
‘몸’은 말이지.
그가 다치는 건 정신이었다.
알도르 경이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깊이 내쉬며 말했다.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그럴게요.”
“만약 위험한 일이 생기면 절 바로 불러 주십시오.”
“네.”
“전 언제나 아가씨 편입니다.”
“떠나지 않을 겁니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아가씨 편이니까요.”
아. 왜 그때와 비슷한 말을 해서 내 정신을 흔들어 놓는 건지…….
그러니까 두 번째 삶, 알도르 경과 결혼을 했을 때였다.
내가 그와 결혼하는 바람에 황제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안 나는 알도르 경에게 지금이라도 떠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알도르 경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저렇게 말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라고.
“아가씨?”
그 일이 뭉게뭉게 떠올라 알도르 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정직하고 좋은 사람을 내 손으로 죽였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빠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레오폴드 공작가를 떠나라고 할까.
역시 그러는 편이 알도르 경에게 좋을 것 같아 이야기를 꺼내 보려는데 그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었다.
“알도르 경?”
“푸시크입니다.”
그 말에 뒤를 돌아보자 한 무리의 푸시크들이 보였다.
빽빽한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몇 마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림잡아도 열 마리는 넘는 것 같았다.
그중엔 새끼 푸시크도 있는 걸 봐서 이 근처에 푸시크 소굴이 있는 게 확실했다.
“푸시크의 약점은 미간이다!”
체르노서가 검을 높게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의 검이 햇빛을 반사해서 반짝거렸다.
“미간을 공격하면 된다!”
멍청한 녀석.
아무리 푸시크가 눈이 나쁘다고 해도 저렇게 반짝이는 검을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모두 숨죽이고 있는데 체르노서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푸시크들은 일제히 체르노서 쪽을 쳐다봤다.
“…….”
체르노서는 뒤늦게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검을 내렸다.
입술도 근육이 튀어나올 정도로 앙다물며 말에서 내렸다.
이에 옆에 있던 마티나 백작이 다소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체르노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커흠, 역시 난 기마전은 별로라서.”
“……그러시군요.”
마티나 백작은 미묘한 눈으로 체르노서를 보다가 기사단에게 명령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푸시크의 약점은 미간이다. 모두 미간을 공략해라!”
마티나 백작의 명령을 들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푸시크를 향해 달려갔다.
알도르 경도 푸시크와 싸우려고 하자 나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쪽이에요.”
그리고 체르노서의 근처 나무 뒤에 숨었다.
“왜 여기 숨는 겁니까?”
“그런 게 있어요.”
여기면 들키지 않겠지.
나는 꼼꼼하게 확인한 뒤, 슬쩍 고개만 내밀어 체르노서 쪽을 쳐다봤다.
어느새 호위 기사들이 성벽처럼 체르노서를 몇 겹으로 빙 둘러싼 탓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저 성벽은 곧 무너질 테니까.
그 전에 준비를 해 볼까. 나는 거추장스러운 머리부터 높게 묶었다.
꾸에엑-
“드디어 시작했네.”
푸시크들이 잔뜩 흥분하며 소리를 내지르자, 영문도 모른 채 서 있는 알도르 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 좀 빌려주세요, 알도르 경.”
* * *
전투에서 총사령관이 직접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 뒤에서 전략을 짜고 지휘만 했다.
목숨을 걸고 피 튀기는 싸움을 한 건 병사들이었지만, 그 전투에서 이기면 사람들은 오로지 총사령관의 이름만을 기억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병사의 이름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가족 말곤 없었다.
체르노서가 노린 것도 바로 그거였다.
푸시크의 약점도 알고, 수적으로도 유리하니 뒤에서 호위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적당히 지시만 내릴 생각이었다.
쿠에에엑!
“……!”
그랬는데, 왜인지 푸시크들은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고 일제히 체르노서를 향해 달려들었다.
“황자 전하!”
호위 기사들이 몸을 날려 푸시크들을 제재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푸시크들이 워낙 체르노서만 노리고 달려든 탓에 견고해 보였던 방어막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쿠엑, 쿠에에엑-
망아지처럼 날뛰는 푸시크들을 보고 있으니 마티나 영지로 올 때의 일이 떠올라 체르노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그때처럼 기절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건, 보는 눈이 많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테니 체르노서는 애써 정신 줄을 붙잡고, 아델을 찾았다.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가 괜한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괜찮을 거라더니,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거야!
아델을 만나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그리 다짐하며 그녀를 찾고 있는데, 마티나 백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황자 전하!”
“!”
아델을 찾다가 뒤늦게 제게 달려드는 푸시크를 발견한 체르노서는 검을 휘둘렀다.
카캉-
하지만 단단한 푸시크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게다가 검을 쥔 자세까지 엉성한 탓에 체르노서가 들고 있던 검은 저만치 날아갔다.
쿠에에엑-
검에 맞아 더 흥분한 푸시크가 거대한 앞발을 치켜들자 체르노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앉은 자리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무 뒤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푸시크의 미간에 정확히 검을 내리꽂았다.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푸시크의 약점은 미간이라고.”
포니테일 형식으로 높게 묶은 머리가 흔들렸다.
“알려 드려도 실천하지 못하시면 어떡해요.”
아델이 맥없이 쓰러진 푸시크의 위에 한쪽 발을 얹고, 퍽 안타깝다는 눈으로 체르노서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