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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262)

14화

“그럴 리가요. 전부 전하를 위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속마음을 숨기고 섭섭하다는 듯 말하자, 체르노서가 몹시 미심쩍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를 위해서 그랬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전하께서 믿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정말로 전 전하를 위해서 그런 겁니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의심이 덕지덕지 붙은 그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마티나 영지를 위해 푸시크 토벌에 직접 참전하셨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 제국민들 사이에 전하의 입지와 위상이 올라갈 겁니다.”

“!”

체르노서는 친형인 황태자의 눈치를 보느라 지금껏 뭔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없기도 했고.

그렇다 보니 제국민들 사이에서 체르노서의 입지는 백사장의 모래알만큼이나 좁았다.

체르노서 황자라고 말하면 다들 누구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

2황자 또는 황태자의 친동생이라고 말하면 그제야 누군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렇다고 체르노서가 대접을 못 받는 건 아니었다.

친모가 제국의 황후이고, 황태자의 친동생인 만큼 괜찮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자체를 봐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체르노서가 거기에 만족했다면 모두가 행복했겠지만, 불행히도 아니었다.

아니, 나한테는 행복한 일이지.

“제국민 모두가 황자 전하께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겁니다.”

이렇게 이용할 수 있잖아.

내 설명에 껌뻑 넘어간 체르노서의 얼굴에서 의심이 지워졌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짙은 걱정이었다.

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푸시크를 상대할 줄 모르는데…….”

나는 체르노서의 손을 잡으려다 차마 그러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상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려면 손을 잡아 주는 등 신체적인 접촉을 하는 게 좋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와 닿는 것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나고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으니까.

아주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접촉은 최소화하고 싶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게요.”

“영애가 날 도와준다고?”

“네. 어차피 전하께서 푸시크 토벌에 참전하신다고 해도 직접 나서실 일은 없을 거예요.”

체르노서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은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다칠 위험이 있는 전장에 나가지 않았다.

“전하께선 뒤에서 지휘만 하실 테니, 어떻게 지휘하면 될지 제가 전부 알려 드릴게요.”

“……왜 그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겁니까?”

체르노서가 몹시 의뭉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겁이 많은 만큼 의심도 많네.

나는 지금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해 둘게요.”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미래에 그를 지옥에 밀어 넣기 위한 투자, 라는 걸 약간 생략해서 말한 것뿐이었으니까.

“하하, 그래. 그렇죠. 영애의 입장에선 내가 잘되는 게 좋죠.”

내가 한 말을 제멋대로 해석한 체르노서가 뿌듯하게 웃었다.

어떤 방향으로 해석했는지 알 것 같지만, 생각하지 말아야지.

내 입장에선 굉장히 불쾌한 방향이었으니까.

“그럼 이번 푸시크 토벌에 참전하는 거로 하죠.”

“아직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는데, 마음대로 결정하셔도 되나요?”

“괜찮습니다.”

체르노서가 가슴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부황 폐하껜 무조건 허락을 받아 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영애.”

* * *

체르노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걱정됐다.

체스 말로 비유하자면 폰이나 다름없는 그가 과연 황제에게서 허락을 받을 수 있을까.

“황제 폐하께서 푸시크 토벌에 참전해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몹시 걱정됐는데, 다행히 그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왔다.

무려 4번이나 회귀하는 동안 처음으로 체르노서가 쓸모 있었다.

오늘 떠나는 줄 알았던 호위 기사들은 다시 짐을 풀었고, 기차표도 일주일 뒤로 다시 예매했다.

고작 일주일밖에 시간을 못 번 건가.

조금 아쉬웠지만, 더 욕심을 내는 건 위험했기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체르노서가 푸시크 토벌에 참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알도르 경은 몹시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자 전하께선 푸시크를 상대하는 법을 모르실 텐데요.”

“모르죠.”

푸시크를 보고 ‘어떡해’를 남발했다가 결국 기절한 체르노서가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 푸시크 토벌에 참전하겠다니…….”

알도르 경이 눈썹을 찡그렸다.

“황자 전하도 이해가 안 되지만, 마티나 백작님은 더 이해가 안 됩니다. 도대체 왜 황자 전하를 토벌에 참전시킨 겁니까?”

“왜긴요. 마티나 백작은 우리가 오는 길에 만난 푸시크를 황자 전하께서 멋지게 물리쳤다고 알고 있으니까 그렇죠.”

“네?”

알도르 경의 눈이 약간 커졌다.

“그게 왜 그렇게 된 겁니까? 설마 황자 전하께서 직접 백작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누가 말했겠어요?”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알도르 경은 몹시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돌아섰다.

“어디 가요?”

“마티나 백작님을 만나야겠습니다.”

“만나서 어쩌게요? 설마 전부 거짓말이라고, 사실 푸시크를 물리친 건 황자 전하가 아닌 나라고 말하게요?”

알도르 경이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쯧, 사람이 너무 정직하고 착해도 문제라니까.

나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알도르 경을 말렸다.

“됐어요. 그러지 말아요.”

“하지만…….”

“날 생각해 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정말 괜찮아요.”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푸시크를 처리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체르노서가 한 짓을 몇 배로 되돌려 줄 계획이었으니 상관없었다.

오히려 지금 알도르 경이 나서는 게 방해가 됐다.

그래서 말린 건데, 다른 의미로 알아들은 건지 알도르 경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가씨께선 정말 마음씨가 고우시군요.”

음, 내가 바보 같다는 말을 좋게 포장한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이겠지.

“그것보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요, 알도르 경.”

“무엇입니까?”

나는 메모지에 이것저것 적어 알도르 경에게 내밀었다.

“여기 적힌 걸 전부 구해 줘요. 최대한 빨리. 무조건 푸시크 토벌을 가기 전에 구해 와야 해요.”

* * *

이게 뭐냐고 물어볼 법도 한데. 알도르 경은 군말 없이, 그것도 한 시간 만에 내가 요구한 물건들을 모두 구해 왔다.

덕분에 느긋하게 향주머니를 제조할 수 있었다.

알도르 경이 구해 온 재료들을 비율에 맞춰 조합한 뒤, 전부 향주머니에 넣으니 달콤한 향기가 솔솔 풍겼다.

나는 그 향주머니를 들고 체르노서를 찾아갔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 호위 기사들에게 지시하고 있었다.

“무조건 날 먼저 지켜라. 어떤 상황이 닥치든 간에 날 지키는 게 우선이다. 알겠지?”

체르노서가 당연한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건, 그만큼 푸시크가 무섭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무서우면 얌전히 방에 찌그러져 있으면 될 텐데, 입지를 다진답시고 꾸역꾸역 기어 나가려는 꼴이 웃겼다.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생고생할 건 조금도 생각 안 하지.

하여간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짓이 친형인 황태자와 똑같았다.

황태자 역시 위험하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를 잡을 수 있다며 쓸데없이 오기를 부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았으니까.

“…….”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니 속이 발칵 뒤집히면서 아침에 먹었던 것들이 역류했다.

입을 벌리면 전부 쏟아 낼 것 같아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꾹꾹 눌러 내렸다.

“레오폴드 영애?”

내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날 발견한 체르노서가 무척 놀라며 물었다.

“어, 언제부터 그곳에…….”

“방금 왔습니다.”

아직 목구멍에서 신물이 느껴졌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전하께 꼭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게 주고 싶은 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호위 기사들을 흘겨봤다.

“전부 나가 있거라.”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단번에 눈치챈 체르노서가 호위 기사들을 물렸다.

나는 전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향주머니를 내밀었다.

체르노서가 약간 경계하며 향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이게 뭡니까?”

“니케라는 꽃으로 만든 향주머니예요.”

“아, 그 꽃이라면 나도 압니다. 아주 달콤한 향기가 나는 꽃이었죠.”

“꽃말은 승리와 영광이죠.”

“그렇죠.”

체르노서는 비로소 경계를 풀고 향주머니의 향기를 맡았다.

“정말 달콤하고 좋은 향기군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향기입니다.”

“그렇죠.”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아주 좋아하는 게 들어 있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체르노서는 향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더니,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영애가 이렇게까지 절 생각해 주다니. 정말 감동했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이만.”

“영애.”

볼일이 끝났으니 이만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체르노서가 내 팔을 잡았다.

“!”

그의 손이 닿은 부위가 더러운 오물이 닿은 것처럼 기분이 나쁘고 끔찍했다.

뱀이 기어가는 듯 소름이 돋기도 했다.

정색하며 뿌리치고 싶었으나 그러면 지금까지 쌓은 탑이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 테니 꾹 참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그,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영애가 걱정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는 건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체르노서는 머뭇거리다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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