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말없이 앞서 걸어가던 체르노서는 인기척이 드문 복도에 들어서자 날 돌아봤다.
“미안합니다, 영애.”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하면서 되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호위 기사들이 제가 푸시크를 처치했다고 알리는 게 제국민의 사기를 올리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랬습니다.”
황족은 제국의 얼굴이자 상징이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영애가 검을 다룰 줄 안다고 알려지는 것도 별로 좋지 않으니…….”
이 역시 사실이었고.
맞는 말을 하는데도 상대가 체르노서라 그런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마냥 기분 나빠할 게 아니라 이걸 이용하면 되잖아.
체르노서에게 개망신을 주면서 황궁으로 갈 시간을 늦추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붙잡을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이해합니다.”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그제야 체르노서는 안도하며 웃었다.
초승달처럼 접힌 눈동자에 나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날 다루기 쉬운 여자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멍청하긴.
다루기 쉬운 건 바로 너야, 체르노서.
눈앞에 거미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유유자적하게 날아오는 벌레의 마지막을 애도하며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 * *
아침 식사는 방에서 조용히 해도 되지만, 체르노서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평소보다 식사 속도를 현저하게 늦추고,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있으니 마티나 백작이 들어왔다.
“방에서 식사하는 게 편했을 텐데요, 영애.”
내가 방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면 그 역시 편하게 방에서 먹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걸 은근히 탓하는 거였다.
“자는 곳과 식사하는 곳은 구별하고 싶어서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마티나 백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곧바로 하녀가 그의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
마티나 백작은 하녀가 떠나자 약간 침울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 각하의 일은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불쑥 나온 말에 나는 샐러드를 뒤적이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정말로 훌륭하신 분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다니…….”
“황태자 전하를 구하다 돌아가신 거니 아버지께선 만족하실 겁니다.”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마티나 백작이 약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이내 쓰게 웃었다.
“영애는 공작 각하를 원망하고 있군요.”
당연히 원망했다. 날 두고 허무하게 세상을 등지셨으니.
그 후 내가 겪은 고초들을 생각하면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닦았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티나 백작이 뭐라 말하려는 그때.
“다들 여기 있었군요.”
식당 문이 열리면서 체르노서가 들어왔다.
옷깃이 살짝 뒤로 젖혀진 거나 머리가 바람에 흩날린 걸 봐서 나와 마티나 백작이 식당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겁지겁 온 모양이다.
혹 내가 마티나 백작에게 푸시크의 일을 말할까 봐 걱정돼서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온 거겠지.
하여간 생긴 거랑 똑같이 간이 콩알만 하다니까.
비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나와 마티나 백작이 일어서서 인사하려고 하자 체르노서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아침 식사 중인데 번거롭게 일어나서 인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작 인사 하나 가지고 융통성 있는 척 말하는 게 역겨웠다.
체르노서는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아 하녀가 내려놓은 찻잔을 들었다.
나는 그가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마티나 백작에게 물었다.
“어제 저녁 식사 때 듣자 하니 푸시크 때문에 무척 고통받으신다고요.”
푸시크 이야기가 나오자 체르노서가 움찔하며 날 쳐다봤다. 떨리는 눈동자가 다소 불안해 보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티나 백작은 그런 체르노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맞습니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폭설 때문에 먹을 게 없어져서 그런지 푸시크들이 자꾸만 산에서 내려와서요. 오고 가는 사람들을 공격하니,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런. 얼른 푸시크를 처리해야겠네요.”
“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용병들을 모집해 뒀습니다.”
“용병이요? 마티나 가문의 기사단은 어쩌고 용병들을 모집한 거죠?”
“그게…….”
마티나 백작이 조금 멋쩍은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영애는 잘 모르겠지만, 푸시크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입니다.”
모르긴.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푸시크를 상대할 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쭙잖게 나섰다간 당하기 십상이죠. 그래서 용병을 고용하는 겁니다.”
요컨대 이미 가문의 기사단을 보냈는데, 푸시크에게 호되게 당해서 용병을 고용한다는 거구나.
푸시크는 웬만한 검으로는 뚫을 수 없는 단단한 거죽 때문에 베테랑 용병들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몬스터였다.
약점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약점을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마티나 가문의 기사단이 푸시크에게 호되게 당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영지를 다스리는 가주의 입장에선 부끄러울 법도 했다.
자신의 가문 기사단이 몬스터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용병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게 몹시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굳이 용병을 고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지금 내가 공략해야 할 부분이 바로 그 점이었다.
“이미 푸시크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가 이곳에 계시니까요.”
“황자 전하를 말씀하시는군요.”
자연스럽게 마티나 백작의 시선이 체르노서에게 닿았다.
나 역시 체르노서를 쳐다봤다.
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의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약간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불안감이 보였다.
“안 그래도 어젯밤에 황자 전하께 푸시크를 어떻게 처치하셨는지 상세하게 들었습니다.”
“호오, 그래요?”
나는 턱을 괴고 체르노서를 지그시 바라봤다.
“황자 전하께서 어떻게 이야기하셨을지 참 궁금하네요.”
그래, 정말 궁금하네.
푸시크를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기절한 그가 어떤 거짓 무용담을 풀어냈을지 말이야.
나와 눈이 마주친 체르노서는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일어섰다.
“크흠. 아침 식사를 다 했으면 이만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하죠. 기차 시간에 늦으면 안 되니까요.”
“기차 시간까지 아직 4시간도 넘게 남았습니다, 전하.”
“4시간밖에 안 남은 거겠죠. 일찍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 어서 가도록 하죠.”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나려고 갖은 핑계를 대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일어서는 대신 체르노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전하께서도 푸시크 토벌에 참전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럼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체르노서의 눈이 커졌다.
“그 무슨…….”
“백작님도 전하께서 도와주시길 바라고 있으시죠?”
체르노서의 대답 따위는 들을 필요가 없었기에 곧바로 마티나 백작에게 화살을 돌렸다.
마티나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마티나 백작의 입장에선 한낱 용병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보다 황자인 체르노서에게 도움을 받는 게 체면을 차릴 수 있는 길이었다.
그뿐인가. 체르노서와 인연을 돈독하게 다질 수 있을 테니, 여러모로 그에게 도움을 받는 게 나았다.
“…….”
문제는 체르노서가 떠벌리고 다닌 것과 달리 푸시크 토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방해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디 도와주십시오, 전하.”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마티나 백작이 체르노서에게 부탁했다.
마티나 백작가는 레오폴드 공작가 다음으로 제국의 북부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가문이었다.
레오폴드 공작이 없는 지금, 마티나 백작이 북부에서 가장 권력이 세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그에게 잘못 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 체르노서는 싫어도 싫다고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 그럼 채찍을 썼으니, 이번엔 당근을 써 볼까.
마음 같아선 채찍만 휘두르고 싶었지만 그러다 말이 목을 자르기도 전에 도망치면 큰일이니, 그전까지는 적당히 조절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전하와 전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고 수도에 가는 중이지요. 이곳에 더 머물려면 폐하의 허락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맞습니다.”
체르노서가 냉큼 내 의견에 동의했다.
“백작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지라. 미안하게 됐습니다, 백작.”
“그럼 황제 폐하께 허락을 받으면 되겠네요.”
내 말에 체르노서가 휙, 소리가 날 정도로 격하게 고개를 돌리며 날 쳐다봤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선 제국민을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성군이시니, 분명 사정을 말하면 허락해 주실 거예요. 제 말이 맞죠, 황자 전하?”
“그건…… 그렇죠.”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황제가 성군이라는 걸 부정하는 꼴이 되니 체르노서는 억지로 웃으며 동의했다.
누가 봐도 억지로 웃는 인위적인 얼굴이라 마티나 백작이 그의 눈치를 보며 거절하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는데.
“지금 당장 황제 폐하께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하는 건지 마티나 백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나갔다.
마티나 백작이 나가자마자 체르노서가 내게 다가와 따지듯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영애?”
“뭘 말인가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하게 되묻자 체르노서는 잠시 멈칫했다가 다시 말했다.
“푸시크 토벌 말입니다. 제가…… 것도……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한 겁니까.”
중간에 갑자기 목소리가 작아져서 다 듣진 못했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못 하는 걸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지는 거겠지.
나는 곧바로 이유를 말하는 대신 커피를 마셨다.
“말해 보세요, 영애.”
마음이 조급해졌는지 체르노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닦달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설마 절 골탕 먹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겠죠?”
응. 그러기 위해서 한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