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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262)

12화

“전 지금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건 늦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보통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나이는 10살 내외니까요.”

그렇다고 내 나이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두 번째 생을 통해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굉장히 힘들다는 걸 알았으니 괜히 무모한 도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기사보다 공작이 되는 게 우선이기도 했고.

물론 기사가 되면 공작이 되는 게 좀 더 쉽겠지만, 지금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봐도 기사가 될 방법이 없어 포기하는 거였다.

“지금 제 나이엔 아카데미보다 사교 파티에 나가서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게 맞죠.”

결혼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으나 알도르 경을 이해시키기 위해 대충 둘러댔다.

그러자 알도르 경이 표정을 약간 어둡게 굳히며 말했다.

“각하께서 어째서 아가씨를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지 않으신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게요.”

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도 아버지께서 절 왜 기사 아카데미에 보내 주지 않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살아 계셨더라면 물어봤을 텐데…….”

내 말에 알도르 경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 이게 그렇게 되는 건가?

그럴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러나 괜찮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알도르 경은 그의 탓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오랜만에 검을 휘둘렀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이럴 땐 그냥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게 나았다.

나는 여전히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기도 했고.”

알도르 경이 반쯤 몸을 일으켰다.

“편하게 누워서 주무실 수 있도록 나가 있겠습니다.”

“그래도 마차 자체가 불편해서 편하게는 못 잘 것 같은데요.”

“그럼 새 마차를…….”

“그건 필요 없어요. 대신 어깨 좀 빌려줄래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알도르 경이 눈을 크게 깜빡였다.

“알도르 경의 어깨에 기대서 잘 수 있게 빌려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조금이나마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아.”

그제야 알아들었는지 알도르 경이 짧게 탄성을 뱉더니 입술을 일자로 굳혔다.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싫으면 거절해도 돼요.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아닙니다.”

알도르 경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더니 내 옆자리로 옮겨 와 앉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네.”

“불편하면 거절해도 돼요. 정말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거니까.”

“불편하지 않습니다.”

아니긴. 표정이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데.

몇 번이나 거절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그러지 않은 건 알도르 경이었다.

“잠시 빌릴게요.”

그러니 사양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기댔다.

알도르 경이 바짝 긴장하며 몸을 굳히는 게 어깨에 기댄 머리를 통해 느껴졌다.

고작 어깨를 빌려주는 건데 뭘 이렇게 긴장하는 건지.

무릎을 빌려달라고 했으면 기절했겠네.

나는 속으로 웃으며 눈을 감았다. 까마득한 수마가 해일처럼 밀려와 의식을 뒤덮었다.

의식이 수마에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내가 마지막으로 느낀 건 내 어깨를 감싸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 * *

오는 길에 푸시크를 만나는 바람에 예상했던 것보다 반나절 늦게 마티나 영지에 도착했다.

붉은 노을이 산봉우리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마차를 타고 마티나의 성으로 가면서 영지를 구경했다.

레오폴드 영지는 아직 눈이 다 녹지 않았는데, 비교적 남쪽이라 그런지 마티나 영지는 눈이 완전히 녹았다.

지독한 폭설로 중단됐던 기차가 다시 운행해서인지 조금 늦은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거리에 활기가 넘쳤다.

레오폴드 영지에 기차역을 세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레드 드래곤이 수호해 준 덕분에 몬스터나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해서 좋긴 하지만, 이럴 땐 아쉬웠다.

영지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덧 마티나 성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 전하.”

미리 연락을 받은 마티나 백작이 버선발로 마중 나왔다. 제국의 황자가 왔으니 당연한 예우였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마티나 백작. 오다가 조금 일이 생겨서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푸시크 때문에 늦으신 건데, 이해합니다.”

푸시크 이야기가 벌써 마티나 백작의 귀에도 들어갔구나.

소식이 빠르네.

하긴 체르노서의 호위가 마티나 백작에게 전서구를 보낼 때 늦는 이유도 같이 적어 보냈겠지.

체르노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마티나 백작이 날 돌아봤다.

눈동자에 안쓰러움이 일렁거렸다.

“장례식 이후로 처음 보는군요, 레오폴드 영애.”

그는 지독한 폭설을 뚫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만큼 백작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웠다.

오래전, 레오폴드 공작이 마티나 영지에 기차역을 세워 준 것과 별개로 두 사람은 기사 아카데미에 다녔을 때부터 친분을 쌓은 걸로 알고 있었다.

“전에 뵀을 땐 안색이 굉장히 안 좋아서 걱정했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진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도 간단하게 안부 인사를 나눈 마티나 백작이 체르노서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황자 전하. 쉬실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 *

마차에서 알도르 경의 어깨를 베고 잠깐 자긴 했지만, 그래도 피곤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포근한 이불을 덮고 푹 자고 싶었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하게 준비해 봤는데,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마티나 백작이 초대한 저녁 식사에 참석하는 거였다.

피곤하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도 있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마티나 백작이 기껏 신경 써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는데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뭐, 나보다 체르노서를 신경 쓴 거겠지만…… 폭설도 뚫고 아버지의 장례식에 와 준 고마운 사람이니 웬만하면 참석하는 게 맞았다.

나는 집사가 직접 빼 준 의자에 앉았다.

체르노서랑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었으면 얹혔을 텐데, 다행히 곁자리였다.

여기도 불편했지만, 고개를 들 때마다 저 짜증 나는 얼굴을 보는 것보단 나았다.

마티나 백작이 저녁 식사 대접에 무척 신경을 썼다는 건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런데 참석하지 않았으면 무척 섭섭하게 여겼을 거야.

역시 참석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하인이 가져온 수프를 떠먹었다.

후추 간이 적당하게 된 따뜻한 수프를 먹으니 몸에 쌓인 피로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대화는 주로 체르노서와 마티나 백작, 두 사람만 나눴고, 나는 간간이 호응만 해 줬다.

딱히 소외시킨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신경을 써 준답시고 이것저것 물어봤으면 더 귀찮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황자 전하의 활약상을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적당히 배를 채웠을 무렵, 마티나 백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푸시크는 베테랑 기사들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는 몬스터인데, 멋지게 물리치시다니! 폐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황자 전하.”

……누가 뭘 물리쳐?

그러니까 체르노서가 푸시크를 물리쳤다는 건가?

위험하다며, 푸시크를 물리치는 건 호위 기사들에게 맡기라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발발 떨며 말했던 그가.

마차에서 내린 후에는 도와주긴커녕 비명을 꿱꿱 지르며, 오히려 푸시크들을 흥분시켰던 그가.

차오르는 긴장감과 공포심을 이기지 못해 결국 기절했던 체르노서가 푸시크를 멋지게 물리쳤다고?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체르노서를 쳐다보자 그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꼴에 양심은 존재하는 모양이지.

나는 속으로 체르노서를 비웃으며 물을 마셨다.

내가 푸시크를 물리쳤다고 사방에 떠들고 다니며 칭찬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공을 체르노서에게 넘겨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공을 날름 가져가 그의 무용담으로 포장한 체르노서가 괘씸하기도 했고.

마음 같아선 전부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으나, 지금 그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푸시크와 싸웠을 당시 목격자가 많긴 했지만, 대부분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였다.

내 호위 기사는 알도르 경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체르노서의 호위 기사들이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면 끝이었다.

내가 검술을 할 줄 안다는 게 알려져 있으면 모를까, 그조차도 아니니 사람들은 날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할 것이다.

체르노서도 그걸 알고 당당하게 내 공을 가로챈 거겠지.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좁쌀만큼도 없는 남자였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푸시크가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골치가 아팠는데, 전하께서 손쉽게 처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티나 백작이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나중에 제게 무용담을 들려주십시오, 전하.”

“으음, 알겠네.”

체르노서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레오폴드 영애는 황자 전하께서 푸시크와 싸우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겠군요. 어떠셨습니까?”

마티나 백작이 내게 묻자 체르노서가 불안해하며 날 바라봤다.

체르노서가 좀 더 불안에 떨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와인을 마시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자 체르노서는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돌발 행동에 마티나 백작이 깜짝 놀라며 체르노서를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폐하께서 레오폴드 영애에게 전해 주라는 말이 있었는데, 푸시크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군.”

체르노서는 몹시 난감하다는 듯 말했다.

“식사 중에 미안하지만, 영애와 먼저 자리를 떠도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어서 가 보십시오.”

“배려해 줘서 고맙군요. 그럼 제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주겠습니까, 영애.”

“그래요.”

비록 거짓말일지언정 황제 폐하의 말을 전한다는데 버티고 앉아 있는 건 이상했고.

체르노서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순순히 그를 따라 식당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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