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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262)

11화

내가 검술을 처음 배운 건 7살 무렵이었다.

이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늦었다고 볼 수 있었다.

기사 가문의 자제들은 보통 4, 5살 때부터 검술을 배웠으니.

물론 ‘영식’의 경우였다. ‘영애’들은 기사 가문일지라도 대부분 검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

예전보다 여기사가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기사같이 몸을 쓰는 직업은 남자들이 하는 거라는 고정 관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렇다 보니 생계 문제 등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여자가 검술을 배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위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래서일까. 아버지도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으레 다른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들처럼 꽃꽂이나 자수 같은 걸 배우길 바라셨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난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다. 재능도 없었고.

내가 관심이 있는 건 검술이나 승마 같이 몸을 쓰는 쪽이었다.

아버지와 공작가의 기사들이 검술 대련하는 모습을 보고 홀딱 반한 나는 무려 1년 동안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검술을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아버지는 처음엔 절대 안 된다며 완고했지만, 나의 집요하고 끈질긴 간청에 결국 백기를 드셨다.

그렇게 나는 부단장이었던 올벤 경에게서 검술을 배우게 됐다.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나는 손바닥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열심히 검술을 배웠다.

그런 내가 기특했는지 올벤 경도 열심히 날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검술 훈련을 잘 받고 있는지 확인하러 온 아버지에게 올벤 경이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께선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계십니다. 검술을 잘 갈고 닦으시면 역사에 남는 기사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니!

당장 춤이라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지만, 너무 경박해 보일까 봐 꾹 참고 아버지의 반응을 살폈다.

그때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보이셨더라.

……기억나지 않아.

오래된 일이라 그런지 꿈속인데도 아버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버지가 올벤 경의 말을 듣고 좋아하지 않은 것만큼은 확실했다.

“올벤 경. 이 이야기를, 내 딸이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게.”

만약 좋아했더라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는 주변에서 딸 바보라고 부를 정도로 무척 날 아끼고 사랑했다.

평범하고 사소한 일도 내가 하면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낸 것처럼 주변에 자랑하고 다니셨는데,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당황스러우면서도 섭섭했다.

아버지께 왜 그러냐고 여쭤보고 싶었으나, 그랬다가 검술을 배우지 못하게 할까 봐 무서워 묻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델, 이 아비와 올벤 경을 제외한 다른 사람의 앞에선 절대 검을 쓰면 안 된다.”

“위험한 상황이 생겨도요?”

“그래. 만약 위험한 상황이 생겨도 나와 호위 기사들이 지켜 줄 테니, 넌 검을 잡을 필요가 없단다.”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검을 쓴다면.”

아버지가 눈을 부릅뜨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땐 검술을 배우지 못하는 건 물론 두 번 다시 검을 잡지 못하게 될 거다. 내 말 알겠지?”

그 얼굴이 마치 귀신처럼 무섭기도 했고.

아버지 다음으로 좋아하는 검을 두 번 다시 잡지 못하게 될 거라고 하니 잔뜩 겁먹은 나는 순순히 그러겠다고 맹세했다.

* * *

“…….”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이 가라앉아 있던 정신이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리자 빛이 눈동자에 스며들면서 어둠이 사라졌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했던 세상이 점차 또렷해지면서 낯선 천장이 보였다.

여긴 어디지?

아, 마차구나.

마티나 영지로 가는 마차.

바로 알아보지 못한 건 머리가 아직 잠에 취해 있는 탓도 있지만, 처음 보는 마차인 게 컸다.

기존에 타고 있던 마차는 푸시크와 싸우다가 부서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근 영지에서 긴급하게 새 마차를 공수해 왔다.

그 영지에서 가장 좋은 마차를 공수해 왔는데도 기존에 탔던 마차보다 좁고 불편했다.

그 때문인지 잠깐 졸았는데도 목에 담이 걸린 것처럼 뻐근했다.

내가 목을 주무르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알도르 경이 물었다.

“목이 아프십니까?”

“조금요.”

원래는 체르노서랑 같은 마차를 탔는데, 푸시크 때 기절한 게 창피했는지 그는 대뜸 따로 마차를 타겠다고 선언했다.

안 그래도 그 남자랑 같은 마차를 타는 게 곤욕이었던 터라 나는 바로 승낙했다.

“잠을 잘못 잔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 잔 건데 알도르 경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요.”

“…….”

알도르 경은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가 다물었다.

또 죄송하다고 말하려고 했겠지.

그러면 내가 뭐라고 할 게 분명하니 말을 삼킨 것일 테고.

알도르 경은 외모만 보면 사과 같은 건 모르는 냉혈한처럼 보이지만, 아니었다.

웬만한 사람들보다 순하고 마음씨도 따뜻했다.

그래서 내가 느닷없이 결혼하자고 했을 때도, 순순히 해 준 것일 테지.

알도르 경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문득 결혼 생활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사실 결혼 생활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나와 그는 신 앞에서 부부가 되기를 맹세했을 뿐, 그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첫날밤도 치르지 않았다.

부부가 됐으니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알도르 경은 내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긴 부부 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렇다고 그가 사창가를 가거나,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판 적도 없었다.

그땐 살아남는 데 집중하느라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그도 남자이니…….

“제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가씨?”

“성욕이 있을 텐데 왜 안 한 거예요?”

“네?”

알도르 경이 몹시 당황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당황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걸 무심코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그것도 이렇게 민망한 이야기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기서 내가 부끄러워하면 알도르 경이 더 민망해할 테니 나는 일부러 태연한 척 말했다.

“다른 남자들은 애인을 만들거나 주기적으로 사창가에 가는 것 같던데, 알도르 경은 그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아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

왜 그런 걸 궁금해하냐는 눈으로 날 보지 마.

나도 2번째 삶에서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다면 궁금해하지 않았을 거라고.

“대답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곤란하다기보다…….”

알도르 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그런 쪽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그 말은 성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데, 설마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건…….

나는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애써 끌어 올리며 창밖을 내다봤다.

눈이 쌓인 창밖은 온통 하얬지만, 내 마음과 머릿속은 새카맸다.

아니, 새빨간 건지도.

“아가씨.”

다시 떠오르는 민망한 생각에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식히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날 불렀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죠?”

“그렇게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가지고 계셨으면서 왜 여태까지 숨기신 겁니까?”

데자뷔처럼 느껴지는 건 2번째 생에서 같은 질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도 내가 검을 쓴 모습을 본 알도르 경은 무척 놀라며 똑같이 물었었다.

“딱히 숨긴 건 아니에요. 검을 쥘 일이 지금까지 없어서 그랬을 뿐이죠.”

빈말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약속한 대로 검술 실력을 숨겨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일부러 숨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비호 아래 안락하게 살아온 내가 검을 손에 쥘 일이 뭐가 있겠는가.

검술을 연마할 때 쥔 게 전부였다.

“오랜만에 검을 잡아서 조금 어색했는데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알도르 경.”

“제가 좋게 본 게 아니라 정말 좋은 실력이었습니다. 아가씨께서 검술을 배우셨다는 건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질문부터 대답 그리고 표정까지 그때와 완전히 똑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기사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이 질문 역시 똑같았다.

“아니요.”

내 대답은 그때와 달랐지만.

그때 나는 ‘가능하다면 기사가 되고 싶다.’라고 대답했었다.

기사가 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기사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정규 교육을 수료하고, 졸업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0년에 한 번씩 열리는 검술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이었다.

그 외 공을 세우는 등 다른 방법들도 있지만, 대표적인 방법은 저 두 가지였다.

후자의 경우엔 대륙 전역에서 실력자들이 모이는 만큼, 우승할 확률이 굉장히 낮았다.

그러니 알도르 경은 내게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어떻겠냐며 권유했었다.

“아가씨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졸업 시험을 통과하고 기사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면서.

검을 쓰는 자라면 누구나 기사가 되는 걸 꿈꿨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극구 반대하셔서 못 했고, 돌아가신 후에는 나이가 있어 감히 도전할 엄두를 못 냈었다.

그러나 이렇게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용기를 내서 기사가 되려고 했다.

……황제가 방해하는 바람에 결국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황제를 생각하니 기분이 확 나빠지면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곧 그를 만날 생각을 하니 짜증이 치솟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실수하는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도 조금 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셨습니다.”

자연스럽게 구겨지는 내 표정을 본 알도르 경이 말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셔서 기사 작위를 받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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