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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262)

10화

설마 황제가 벌써 날 부를 줄이야.

체르노서가 공작저에 머물고 있어서 방심했던 내 잘못이었다.

약간 당황스럽긴 하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어차피 마주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 시기가 조금 당겨진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수도로 가는 게 맞았다.

수도로 가서 귀족회에 속한 고위 귀족들을 만나 친분을 쌓고 그들의 환심을 사야 했다.

내가 비록 기사 작위는 없지만, 공작위를 승계할 만한 자격이 있다는 것도 증명해야 하고.

그걸 증명할 동안 황제의 시선을 돌리고 시간도 벌어야 했다.

거기에 레오폴드 영지를 돌보고 레오폴드 공작가에서 투자하고 있는 상단들과 광산을 챙기는 등 해야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물론 레오폴드 공작가의 일과 영지의 일을 맡아 보는 가신들과 관리들이 있었지만, 최종 결정은 공작가의 핏줄인 내가 내려야 했다.

“할 일이 많네.”

일단 당장 정리할 수 있는 것들부터 하자.

“아가씨.”

영지와 공작가의 일부터 처리하고 있는데 알도르 경이 날 찾아왔다.

“내일 수도로 떠나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나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 알도르 경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알도르 경이 날 호위하겠다는 건가요?”

“네.”

알도르 경이 턱에 힘을 주고 다부지게 말했다. 믿음직스러운 얼굴이었고, 실제로 알도르 경이 잘 해낼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알도르 경이 호위를 해 주면 믿고 내 등을 맡길 수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기사의 맹세를 받아 줄 생각은 없어요.”

알도르 경이 내 호위를 자처하고 나선 게 기사의 맹세를 받아 달라고 시위하는 것 같아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게 아닌데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음, 내 기우였나.

“하지만 아가씨께서 진지하게 고려해 주시길 바라고 있긴 합니다.”

……역시 기우가 아니었어.

“전 언제든지 열려 있으니 마음의 준비가 되시면 절 받아 주세요, 아가씨.”

“알도르 경.”

“그것과 별도로 이번 일정은 제가 호위하게 해 주십시오.”

겔르안이나 체르노서처럼 속에 새카만 흑심을 품고, 겉으로만 다정하고 상냥한 척한다면 무를 썰어 내듯이 단칼에 자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알도르 경 같이 진심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는 그러기가 애매했다.

특히 알도르 경에겐 큰 마음의 빚이 있어 더욱 그를 단호하게 잘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이번 호위는 알도르 경에게 맡기도록 하죠.”

* * *

레오폴드 영지는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기차역이 없었다.

오래전, 레오폴드 영지를 수호하는 레드 드래곤이 사악한 흑마법사가 영지를 더럽히는 걸 막기 위해 영지 전체에 마나 제어 보호막을 설치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레오폴드 영지 내에선 마법 증폭 기차 같이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는 마법이나 마법 도구를 쓸 수가 없었다.

하여 초대 레오폴드 공작은 레오폴드 영지에서 약간 떨어진 ‘마티나’에 기차역을 건립했다.

레오폴드 공작가에서 마티나까진 마차를 타고 이틀 정도 걸렸다.

“마티나에서 하루를 묵고 수도로 향하는 기차를 탈 겁니다.”

맞은편에 앉은 체르노서가 가증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마차 여행은 다소 불편하지만 기차 여행은 편할 겁니다. 일등석이라 침대 좌석이거든요. 그리고 전용 하인도 붙어 있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그 하인에게…….”

“황자 전하.”

내가 말을 자르자 체르노서의 눈썹이 올라갔다. 불만 있는 표정이었지만 못 본 척 무시했다.

“그만 설명하셔도 됩니다.”

“……제 설명이 듣기 싫으셨던 겁니까?”

“아니라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네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요.”

나는 싱긋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가 어느 가문의 영애인지 잊으시면 안 되죠.”

장담컨대 체르노서보다 내가 마법 증폭 기차를 더 많이 타 봤을 것이다.

당연히 탈 때마다 일등석을 이용했고.

그런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으려는 듯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는 꼴이 우스워 참다못해 한마디를 했다.

그러자 체르노서의 얼굴이 약간 벌겋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을 느낀 모양이다.

“……제가 실수했군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내게 화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과하고 물러서는 건 그의 목적이 내 환심을 사고, 나와 결혼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과자 줄 놈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차부터 마신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레오폴드 공작령은 정말이지 풍요로운 땅이군요.”

그렇게 핀잔을 줬으면 입을 다물 법도 한데 체르노서는 끊임없이 떠들어 댔다.

레오폴드 공작가와 공작령을 칭찬하고, 나를 칭찬하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등 끊임없이 내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한 귀로 듣고 흘리기에도 쓸모없는 말인지라 아예 귀를 막고 풍경을 보고 있는데 마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윽.”

그 바람에 마차 벽에 머리를 찧은 체르노서가 인상을 팍 쓰며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거칠게 열었다.

“마차 운전을 이따위로 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화, 황자 전하. 모, 몬스터가, 푸시크가 나타났습니다.”

쿵-!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크게 흔들렸다.

진짜 지진이 난 건 아니고 푸시크들이 땅을 발로 찧으면서 생긴 진동이었다.

이렇게 큰 진동이 일어났다는 건 푸시크의 수가 많다는 의미.

도대체 몇 마리인 거지?

확인하기 위해 마차 문을 열려는데 체르노서가 황급히 내 손을 잡았다.

“몬스터가 습격했는데 마차 문을 열려고 하다니. 미쳤습니까?”

“미친 게 아니라 몬스터의 수를 확인하려는 겁니다. 몇 마리인지 확인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그건 영애가 아니라 밖에 있는 기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황자 전하께서는요? 그동안 전하께선 무얼 하실 건가요?”

“그……!”

차마 자존심에 나랑 같이 마차 안에 숨어 있겠다는 말은 못 하겠는지 체르노서가 입을 다물었다.

“비켜 주세요.”

나는 그런 체르노서를 밀어내고 마차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내려 돌아서자마자 호위 기사들과 대적하고 있는 푸시크들이 보였다.

하나, 둘, 셋…… 다섯인가.

우려했던 것만큼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푸시크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푸시크는 생긴 건 멧돼지처럼 생겼고, 덩치는 오두막만큼 컸으며 피부는 어지간해선 꿰뚫기 힘들 정도로 단단했다.

거기다 무는 힘이 강해 커다란 바위도 씹어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시력이 안 좋아 앞을 잘 보지 못했고, 대신 청각과 후각이 무척 발달했다.

“아가씨, 나오시면 안 됩니다.”

불쑥 등장한 커다란 덩치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알도르 경이었다.

알도르 경은 두르고 있던 털로 된 외투를 벗고 검을 고쳐 쥐었다.

커다란 덩치와 달리 재빠른 푸시크를 상대하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하려는 것이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세요.”

“거절하겠어요. 마차 안에 있다가 푸시크가 저 발로 마차를 내려찍으면 꼼짝없이 깔려 죽을 테니까요.”

“히익.”

마차 안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던 체르노서가 내 말을 듣고 기함하며 황급히 마차에서 내렸다.

쯧쯧, 제국의 황자라는 놈이 한심하긴.

나는 최대한 푸시크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체르노서를 한심하게 흘겨보고 다시 알도르 경을 쳐다봤다.

“알도르 경. 푸시크를 상대해 봤나요?”

“딱 한 번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마리였지만요.”

“그렇겠죠.”

그만큼 푸시크는 보기 힘든 몬스터였다. 마차가 자주 오가는 이런 길목에 출몰할 만한 몬스터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푸시크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다섯 마리나 나오다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옵니다!”

푸시크가 발을 몇 번 구르더니 황소처럼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때문에 나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알도르 경은 내게 달려오는 푸시크를 막아 냈다. 다른 호위 기사들도 푸시크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으아악! 빨리 날 지키란 말이다!”

그런 호위 기사들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체르노서는 마구 소리를 지르며 주위를 산만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푸시크들이 체르노서의 괴성을 듣고 그를 타깃으로 삼았다.

“황자 전하!”

때문에 기사들은 싸우는 전술에서 지키는 전술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모름지기 무작정 베고 싸우는 것보다 누군가를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

안 그래도 힘든 전투가 더 힘들어졌다. 부상을 입어 전투가 불가능한 기사들이 속속히 등장했다.

더 가관인 건 체르노서가 검을 마구 휘두르며 혼자 설치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지더니 그대로 기절했다는 것이었다.

보통 황자가 기절하면 걱정이라도 하기 마련인데 호위 기사들은 되레 안심했다.

체르노서가 조용해진 덕분에 푸시크의 타깃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가씨!”

그리고 그 바뀐 타깃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알도르 경이 황급히 달려와 푸시크를 막아 냈다.

채앵, 단단한 몸과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나는 대답 대신 치렁치렁한 치마를 무릎까지 쭉 찢었다.

이에 몇몇 기사들이 헉,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푸시크를 상대하던 알도르 경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 무슨……!”

나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잘 잡고 있어요, 알도르 경.”

알도르 경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내 명령을 따랐다.

나는 쓰러진 마차를 받침대 삼아 알도르 경이 붙잡고 있는 푸시크의 머리 위로 도약했다.

그리고 검의 칼날이 아래로 향하도록 고쳐 잡아 푸시크의 미간에 찔러 넣었다.

단단하기로 유명한 피부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꿰뚫리면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내 얼굴과 드레스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꾸에에엑-!

푸시크가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쿵, 또 한 번 거대한 지진이 일었다.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으며 반쯤 넋을 놓고 이쪽을 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몬스터를 앞에 두고 넋을 놓고 있다니. 제정신인가요? 정신 차리고 얼른 푸시크를 처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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