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기사들은 기절한 겔르안과 잔뜩 겁에 질린 외숙모를 마차에 태워 영지 밖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사라에게 갤르안의 부탁을 받고 내 방에 정체불명의 향초를 넣은 하녀를 저택에서 내보내라고 한 뒤, 알도르 경을 데리고 아버지의 묘지로 향했다.
늦은 시간인 만큼 내일 가자고 했는데도 알도르 경은 지금 당장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도 그랬었지.’
두 번째 생에서도 알도르 경은 새벽에 아버지의 묘지로 향했었다.
그때도 내가 안내했었는데, 이렇다 할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았다.
알도르 경은 갑작스럽게 주군을 잃은 슬픔에, 나는 첫 번째 생의 충격에 허우적거려 이야기를 나눌 만한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생에선 나 때문에 알도르 경이 죽었다는 죄책감에 그를 만나는 걸 최대한 피했다.
여전히 내 마음속엔 그에 대한 죄책감이 남아 있었다.
나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잔인하게 죽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차, 내가 너무 넋을 보고 있었던 건가?
“미안해요. 기분 나빴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네, 있어요.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었다.
첫 번째 생에서 체르노서와의 결혼 생활이 엉망진창이었던 만큼 나는 내심 알도르 경과 결혼하는 걸 걱정했었다.
그가 체르노서처럼 변할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랬는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알도르 경은 예전과 똑같았다.
날 아내가 아닌 아가씨로서 대했고, 결혼 생활 내내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고마워요.”
지금 생에선 일어나지 않은, 그에겐 없는 일이었지만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정말 고마워요, 알도르 경.”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도착했네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묘지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무덤을 본 알도르 경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아가씨, 실례가 안 된다면 저 혼자 자리를 지켜도 되겠습니까?”
알도르 경이 저런 부탁을 하는 이유는 내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 편히 울기 위해서였다.
“물론이죠. 그럼 전 먼저 돌아가 볼게요.”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다 말고 멈춰 선 건 문득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혼자 둬도 괜찮은 걸까?
두 번째 생에서 봤던 알도르 경의 우는 모습은 굉장히 서글프고 안타까워 보였다.
하지만 그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서지 않았다. 잠시 훔쳐보다가 저택으로 돌아갔었다.
이번에는 아예 훔쳐보지도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에 걸렸다.
나는 멈춰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묘지로 돌아갔다.
“…….”
역시나 그는 울고 있었다. 항상 듬직해 보였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만큼 그는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나는 두 번째 생에서 슬쩍 물어봤지만,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히 알 수 있었지.
그가 진심으로 아버지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걸.
그렇다 보니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그가 무척 안타까웠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하지만 귀신같이 인기척을 느낀 알도르 경이 뒤를 돌아봤다.
곧 날 발견하고 눈물이 고인 눈동자가 한계까지 커졌다.
“아가씨……?”
“그냥 와야 할 것 같아서요.”
이왕 들킨 거 조심할 이유가 없으니 나는 그의 옆으로 성큼 다가갔다.
“울고 있었던 건가요?”
알도르 경은 손등으로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송구합니다, 아가씨.”
“알도르 경이 저한테 미안해할 게 뭐가 있나요?”
가까이서 본 그의 눈가는 빨갰다. 생각보다 많이 울었던 모양이네.
그만큼 슬프다는 의미.
자고로 슬픔은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이었다.
“괜찮아요.”
“아가씨.”
“어디 소문내지 않을 테니까, 마음 놓고 울어도 좋아요.”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가 보는 앞에서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허락한다는데도?”
“제 기사도가 허락하지 않습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는 참으로 고지식했다.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었고.
내가 두 번째 생에서 다른 가신들을 두고 그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옅게 웃으며 그의 넓은 등을 꼭 안아 주었다.
알도르 경의 키가 나보다 훨씬 큰 탓에 정확히는 등이 아니라 허리를 끌어안게 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러면 안 보이죠?”
중요한 건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긴장했는지 알도르 경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괜찮아요.”
나는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그의 허리 부위를 토닥였다.
“마음껏 울어도 돼요. 슬픈 일에 슬퍼하며 우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
“아버지도 알도르 경이 이렇게 슬픔을 참는 것보다 속 시원하게 우는 걸 바랄 거예요. 그러니까 시원하게 울어요.”
열심히 다독인 게 효과가 있었는지 그의 몸이 서서히 부드럽게 풀렸다.
“하아.”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깊은 탄식이 아지랑이처럼 퍼졌다.
나는 그가 진정할 때까지 그의 등을 계속 토닥여 주며 보름달이 환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 * *
알도르 경이 눈물을 그친 건 동이 틀 무렵이었다.
그동안 계속 그를 다독였더니 팔이 저리고 다리도 아팠다.
그러나 그걸 내색하면 저 고지식한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할 테니 최대한 참았다.
“팔이 아프신 모양이군요.”
“……티가 나나요?”
“조금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랬나. 그래도 다리가 아픈 건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괜찮아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걸요. 그것보다 어서 돌아가요. 벌써 아침 해가 떴어요.”
마무리해야 할 일도 있는 터라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야 했건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많은 얼굴로 바닥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알도르 경?”
의아해서 부르자 알도르 경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새카만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로 진지했다.
“왜……!”
왜 그러냐고 다시 물어보려는데 그가 갑자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빼서 땅에 꽂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알도르 경과 알고 지낸 지 오래됐지만, 그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사가 무릎을 꿇는다는 건 그 대상에게 충성한다는 의미였으니까.
그가 무릎을 꿇은 사람은 모든 생을 통틀어 아버지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니 당황스러웠다.
설마…… 나한테 충성을 맹세하려는 건가?
“알도르 샹크티스,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이신 아델 레오폴드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설마 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어째서 알도르 경이 내게 충성을 맹세하는 걸까.
지난 생에선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영원히 당신을 주군으로 모시며, 당신을 위해 검을 휘두르고,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굳은 신념이 담긴 목소리가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검날이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제게 감히 당신을 지킬 기회를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일에 다소 얼떨떨하긴 했지만 내 대답은 그가 검을 땅에 꽂은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미안해요, 알도르 경.”
난 당신을 또다시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그의 맹세는 받아 줄 수 없었다.
* * *
겔르안이 터무니없는 짓을 벌여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저택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조문이 끝나고도 내게 구혼하기 위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짐을 싸서 떠났다.
덕분에 별관이 텅텅 비면서 할 일이 줄어든 사용인들은 좋아했지만, 오히려 난 귀찮아졌다.
“이거 참,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니.”
바로 체르노서 때문이었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체르노서는 거침없이 내게 작업을 걸었다.
체르노서의 작업을 계속 거절하자니 두 번째 생이 반복될 것 같아 그러지 못하고 적당히 받아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나는 짜증을 속으로 삼키며 체르노서에게 물었다.
“황자 전하께선 언제 수도로 돌아가시나요?”
“영애는 제가 수도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렇다기보다 이제 추모식이 끝났으니까요.”
추모식이 끝나고 모두 떠났기에 남은 손님은 체르노서뿐이었다.
“황자 전하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저 때문에 너무 시간을 버리시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걱정은 무슨.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체르노서는 황궁에서 할 일이 없었다.
황태자가 혹 권력이 넘어갈까 봐 황자들에게 일을 나눠 주지 않은 탓이었다.
그 안에는 동복형제인 체르노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체르노서도 황태자를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하냐면, 훗날 황태자가 결국 사고로 죽었을 때 잘 죽었다고 박수를 쳤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게 화풀이를 했었지.’
이유는 나랑 결혼해서 레오폴드 공작이 된 탓에 황위 계승권이 밀렸기 때문이었다.
계승권이 밀리지만 않았더라면 다음 황태자는 2황자인 그가 됐을 테니까.
체르노서의 계승권이 밀려나면서 자연스럽게 황태자 자리는 3황자가 가져갔다.
그 소식을 들은 체르노서는 무척 분개하며 내게 화풀이를 했다.
“너 때문이야! 네년만 없었어도 내가, 내가 황태자가 됐을 텐데!”
웃기지도 않을 개소리였다. 그가 날 꼬셔 놓고, 나랑 결혼해서 레오폴드 공작이 되고 싶다고 말해 놓고 이제 와 내 탓을 하다니.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체르노서가 너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에 살해당해 죽는 그날까지 바보처럼 당하기만 했었다.
“영애?”
손을 살포시 잡아 오는 끔찍한 감촉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체르노서를 바라봤다. 그는 조금 언짢아 보였다.
“지금 제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그저 아버지의 생각에 조금 기분이 울적해서요. 부디 너그러운 아량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흐음, 뭐. 그렇다면 이해해야죠.”
체르노서는 인심 썼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말하겠습니다.”
말하든가 말든가.
“내일 수도로 떠날 예정인데, 영애도 함께 가야 합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적당히 대꾸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수도요? 갑자기 수도는 왜…….”
“이거.”
놀라서 되묻자 체르노서가 금박 테두리가 있는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실링 왁스엔 황제의 인장이 보란 듯이 찍혀 있었다.
“부황 폐하께서 레오폴드 영애를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