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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262)

8화

아직 체르노서가 공작저에 머무는 만큼 그를 막기 위해선 겔르안 부부가 필요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만행을 묵과할 생각은 없었다.

늦은 밤, 본관의 홀로 불려 온 겔르안 부부는 당당했다. 저 행동만 보면 그 남자가 겔르안 부부에게 누명을 씌운 것처럼 보였다.

과연 어느 쪽이려나. 나는 두 계단 남기고 난간에 기대서서 그들을 내려다봤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외숙모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무슨 일로 우리를 부른 거니?”

“그 이유는 외숙모가 더 잘 아실 텐데요.”

외숙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가 잘 안다고? 글쎄. 전혀 짐작되는 게 없는데.”

“조금 전에 제 침실에 웬 남자가 몰래 들어왔어요. 절 겁탈하기 위해서였죠.”

“아, 아가씨!”

내 말에 하네스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불렀다. 다른 사용인들과 겔르안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겔르안 부부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도 역력했다는 것이다.

“저런, 아주 큰일이 있었구나.”

겔르안이 무척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 다행이다. 그래서 그 파렴치한 놈은 잡았니?”

“당연히 잡았죠. 지금 방에 구금해 놨어요.”

“그래……?”

겔르안의 눈꼬리가 살짝 떨리는 걸 본 건 나뿐인 것 같았다. 나는 옅게 웃으며 계단 난간에 비스듬하게 기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

“네. 전부 외숙부가 시킨 일이라고 하던데요.”

겔르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외숙모도 무척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거, 거짓말이란다!”

겔르안이 내 쪽으로 다가오며 황급히 소리쳤다.

“전부 거짓말이야! 넌 내 소중한 조카인데,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니!”

“그런가요?”

“그럼! 그 자식이 너랑 결혼하려고 이상한 술수를 쓴 것 같구나. 그런 사기꾼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말렴, 아델.”

“그래, 네 외숙부 말이 맞단다.”

외숙모가 겔르안의 말을 두둔하고 나섰다.

“생면부지인 남보다 가족인 우리를 믿어야지.”

“가족이 남보다 더한 경우도 있던데요.”

“으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두 분은 그런 적이 없다는 말씀이시죠?”

겔르안 부부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난간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말을 이었다.

“그럼 다른 분들에게도 물어보도록 하죠. 혹시 아는 게 있는지, 어디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이에요.”

처음에 슬쩍 외숙모를 떠봤을 때, 그녀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내가 침실에 웬 불청객이 들어왔다고 말했을 때도 그들은 놀라면서 당황했었다.

그 반응들을 생각해 봤을 때 겔르안 부부는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었음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겔르안 부부가 결백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예상컨대 겔르안 부부는 단순히 그 남자를 부추기기만 했을 뿐, 다른 일엔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방법은 위험한 순간에 발을 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반면 그 남자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지 않으면 모든 게 말짱 도루묵이 된다는 큰 단점이 있었다.

그러니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겔르안 부부가 다른 사람들도 찔렀을 가능성이 무척 컸다.

“자, 잠깐만!”

내 예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별관으로 가려는데, 겔르안이 황급히 내 팔을 잡았다.

“이렇게 시간이 늦었는데 지금 별관에 가겠다고? 그건 손님들에게 너무 민폐일 것 같은데.”

“사건이 터졌으니 어쩔 수가 없죠. 사람들도 이해해 줄 겁니다. 물론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사과도 할 거예요.”

“하지만…….”

겔르안은 처음과 달리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계속 땅만 보며 우물쭈물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외숙부. 제가 외숙부의 누명을 꼭 벗겨 드릴게요.”

나는 웃으며 겔르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감히 외숙부에게 누명을 씌운 그 남자와 그 남자를 뒤에서 조종한 놈까지 아주 혼쭐내 줄 테니 외숙부는 아무런 걱정 하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 * *

겔르안 부부가 어찌나 많은 사람들을 부추겼는지, 물어보는 사람마다 겔르안 부부가 그랬었다고 대답했다.

이로써 겔르안 부부가 뒷배라는 게 확실해졌다.

모든 게 다 들통이 난 겔르안 부부는 그제야 불쌍한 척하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악의는 없었단다, 아델. 그저 우리는 너랑 하룻밤을 보낸 사람이 공작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넌지시 힌트를 줬을 뿐이야.”

“그래. 그건 네 마음에 드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였지, 몰래 침실에 들어가 겁탈하라는 의미는 아니었단다.”

“그런 좋은 의도였다면 처음에 왜 그 사실을 숨긴 거죠?”

“그건 네가 이상한 오해를 할까 봐 그런 거야. 우리 마음, 이해하지? 우리는 가족이잖니. 가족끼리 이해하지 않으면 누굴 이해하겠어?”

이 장면, 어디서 많이 봤다 싶더라니. 오래전에 겔르안이 어머니에게 한 행동과 아주 똑같았다.

그때도 가족인 걸 들먹이며 가족끼리 이해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냐고 칭얼거렸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는데 어쩜 이리도 변한 게 없는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지만, 겔르안은 좀 변할 필요가 있었다.

“아델, 제발.”

“걱정하지 마세요. 외숙부의 마음, 충분히 이해하니까.”

“정말?”

겔르안이 반색하며 웃었다. 과연 이걸 보고도 계속 웃을 수 있을까.

“그럼요. 우린 가족이잖아요. 그러니 외숙부도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래요?”

내가 손짓하자 사용인들이 짐 가방을 그들의 옆에 내려놓았다. 가문의 기사들이 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쌌다.

상황 파악을 하려는 듯 겔르안의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다녔다.

외숙모는 약간 겁에 질린 얼굴을 하며 겔르안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아델, 이게 다 뭐니?”

“뭐긴요. 외숙부와 외숙모를 공작저에서 내보내려는 거죠.”

“뭐?”

“아, 실수했네요. 공작저가 아니라 레오폴드 공작령에서 내보내는 거예요. 부디 짐을 챙겨 들고 나가 주세요.”

내 말에 겔르안 부부가 몹시 기가 찬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들은 왜 자신들이 영지에서 나가야 한다는 건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쩜 이리도 뻔뻔한지. 부모님이 겔르안을 외면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델, 다 널 생각해서 한 건데 내쫓는 건 너무하지 않니?”

“그래. 이건 너무한 것 같구나. 우리에게도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줘야지.”

“지금 기회를 주고 있는 거예요.”

나는 짐 가방을 가리켰다.

“나가세요. 그게 당신들의 잘못을 만회할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널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고작 한 번 실수한 것으로 이렇게 해야겠니?”

“노력? 도대체 무엇을 노력했다는 거죠?”

나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신문에 구혼 광고를 낸 거? 아니면 구혼 광고를 보고 찾아온 손님들에게 중매를 빌미로 돈을 뜯은 거?”

겔르안이 크게 움찔했다. 내가 돈을 뜯은 걸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란 것이다.

“거기다 날 겁탈하라고 사람들을 부추겼죠. 내 침실에 마비 향을 섞은 향초를 넣었고.”

“그건 오해가……!”

“당신들이 부추긴 사람들을 전부 한곳에 모아서 증언하라고 해야 오리발을 그만 내밀 건가요?”

그건 아닌지 겔르안이 입을 다물었다. 일을 크게 벌이면 불리해지는 건 본인들이라는 걸 잘 아는 것이다.

“당신들은 잘못을 저질러서 영지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그러니 다시 돌아올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세요.”

“아델!”

“만약 영지에 들어오면 불법 침입으로 벌금을 부과하고 감옥에 집어넣겠어요.”

난 지난 생에서 겔르안이 레오폴드 영지에서 했던 만행을 막기 위해 미리 경고했다.

“……누가 그 어미에 그 딸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하는 꼴이 제 어미를 똑같이 닮았구나.”

겔르안이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게 가여워서 여태 참아 줬는데, 감히 나랑 맞먹으려고 들어?”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뭐?”

“신분도 직위도, 내가 더 높잖아요. 외숙부가 나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데,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너, 너!”

겔르안의 눈동자에 그려진 핏줄이 좀 더 선명해졌다.

그는 날 때리려는 듯 손을 높게 들었지만, 붙잡혀 내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당장 놓지 못할까! 난 저 애의 외숙부이자 레오폴드 공작 부인의 동생이다!”

겔르안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악했다.

“그런데 네놈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당장 놓지 못할까!”

하지만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으로 묵묵히 겔르안을 붙잡고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용인들이 겔르안의 발악을 보고 있었지만, 그를 연민하거나 동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들 통쾌하다는 얼굴로 겔르안을 바라봤다. 겔르안 부부가 그동안 사용인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네년이 혈육을 버리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천만에! 분명 망할 거다! 쫄딱 망해서 결국은 비참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헤매게 될 거야!”

어쩜 자기소개를 저렇게도 잘할까. 그도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겔르안의 개소리를 들어 주는 것도 슬슬 피곤했다.

기사들에게 이만 끌고 나가라고 말하려던 순간.

덜컥, 본관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왔다.

흙먼지가 묻은 망토가 걸을 때마다 흔들렸다. 어지간히도 다급하게 달려온 건지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거다, 아델. 가족을 버린 것을 후회하게 될…… 컥!”

남자는 계속 헛소리를 지껄이는 겔르안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겔르안의 몸이 축 늘어졌다.

“여보!”

외숙모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겔르안에게 달려갔다.

남자는 그런 외숙모를 무시하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달빛을 녹여 놓은 듯한 은발이 고갯짓에 따라 부드럽게 흔들렸다.

“신, 알도르 샹크티스. 가주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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