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추위가 한풀 꺾인 따사로운 오후.
“이걸 보자마자 영애가 생각나더군요.”
이른 오전부터 공작저를 나갔다가 돌아온 체르노서가 내게 붉은 장미 꽃다발을 내밀었다.
“영애의 붉은 머리칼이 생각나서 샀는데, 괜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이 장미꽃보다 영애의 붉은 머리칼이 더 매력적이니까요.”
체르노서가 눈매를 접으며 느끼하게 웃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애의 붉은 머리, 정말로 탐이 납니다. 저도 붉은 머리였으면 좋았을 텐데요.”
진심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체르노서는 내 붉은 머리를 무척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피를 뒤집어쓴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며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가위로 난도질을 하기까지 했다.
그 탓에 머리가 쥐가 파먹은 것처럼 엉망진창이 돼서 머리카락이 다시 자랄 때까지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
다른 귀족들은 물론 사용인들을 만나는 것도 꺼릴 정도로.
그런데 저딴 소리를 하니 비소가 절로 나왔다.
“영애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제 마음이니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밀어내면 황자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일단 꽃다발을 받았다.
체르노서가 그의 마음을 받아 준 거로 착각해서 질척거릴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겔르안이 알아서 막아 줄 테니까.
“그리고 바쁘지 않다면 같이 산책을…….”
“아델!”
거봐, 알아서 딱 막아 주잖아.
“외숙부.”
나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으며 겔르안을 맞이했다.
“또 방해하는군.”
반면 체르노서의 표정은 똥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체르노서가 내게 작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겔르안과 외숙모가 나타나 방해를 했으니, 그가 겔르안 부부를 싫어하는 건 당연했다.
그 덕분에 난 아무것도 안 해도 체르노서를 떼어 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런 걸 바로 손 안 대고 코를 푼다고 하는 모양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첫 번째 생의 나는 바보같이 체르노서의 연기에 속아 그를 믿고 하자는 대로 했었다.
두 번째 생에선 체르노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벽을 쳤지만, 그게 오히려 내 발목을 잡았다.
체르노서는 나와 있었던 일을 황제에게 그대로 보고했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황제는 체르노서와 내 결혼을 황급히 추진했다.
체르노서랑 결혼하면 끔찍했던 첫 번째 생이 반복될 게 분명하니 나는 어떻게든 결혼을 피하고자 가문의 가신과 결혼했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그 남자가 돌아오겠네.’
레오폴드 가문의 가신이자 두 번째 생의 내 남편이었던 알도르 샹크티스.
알도르 경은 한 달 전,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해양 몬스터 토벌을 나갔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다 보니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굉장히 늦게 접했고, 돌아오는 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때문에 추모식 마지막 날에 겨우 돌아온 알도르 경은 아버지의 묘비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알도르 경과 알고 지낸 지 어언 10년째지만, 그가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는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델.”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옆을 돌아봤다. 겔르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니?”
“괜찮아요. 무슨 일이시죠?”
“아, 추모식 때문에 너랑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서. 시간이 될까?”
“물론이죠.”
나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하녀에게 주고 체르노서를 돌아봤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황자 전하. 꽃 선물은 정말 감사합니다.”
체르노서에게서 받은 장미꽃이 완전히 분해되어 하녀들의 목욕탕에 뿌려진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 * *
체르노서가 온 뒤로 추모객들이 줄줄이 공작저에 도착했다.
지난 생보다 추모객들이 많은 건 겔르안이 구혼 광고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조문을 핑계로 공작저에 들어와 내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선물 공세는 기본이고 온갖 사탕발림으로 나를 위로하고 유혹했다.
“레오폴드 영애,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체르노서도 그걸 보고 위기감을 느꼈는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작업을 걸었다.
“아델! 잠시 이리 와 보렴!”
“아델! 이것 좀 봐 줄래?”
물론 타이밍 좋게 등장한 겔르안 부부에게 번번이 막혔다.
겔르안 부부뿐일까, 내게 구혼하러 온 사람들도 체르노서를 방해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공작저가 북적거렸다.
“어서 오세요.”
그 많은 사람들을 전부 겔르안 부부에게 맡길 순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그러면서 슬쩍 그들의 마음을 떠봤는데, 그들은 여자가 기사 가문을 잇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이유는 귀족회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았다.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귀족회에서 과반수의 동의를 얻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내가 가문과 기사들을 이끌 힘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
‘말이야 쉽지.’
일단 그걸 보여 줄 기회 자체가 굉장히 드물었다. 그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황제가 기다려 줄 리도 없었고.
‘시간을 좀 더 벌어야겠어.’
그래야 없는 기회라도 만들 테니까.
그나마 공작저에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체르노서가 이전보다 더 길게 공작저에 머무는 덕분에 시간을 좀 벌었다.
황제가 지난 생에서 했던 행동들을 끄적이며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계획을 정리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새로 뽑은 전속 하녀였다. 내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면서도 나름대로 일을 잘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하녀였다.
“무슨 일이지?”
“이걸 두러 왔습니다.”
하녀는 가지고 온 물건을 침대 옆에 있는 협탁에 내려놓았다. 향초였다.
“수면에 도움을 주는 향초입니다. 아가씨께서 요즘 잠을 통 못 주무시는 것 같던데, 부디 도움이 되길 바라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그럼 좋은 밤 보내세요, 아가씨.”
하녀가 나가고 나는 좀 더 생각을 정리하다가 침대에 누웠다.
하녀가 말한 대로 요즘 생각이 많아서 침대에 누워도 쉬이 잠들지 못했었는데. 향초 덕분인지 잠이 쏟아졌다.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지려는데.
타박, 타박-
이건…… 발소리?
그 말은 누가 내 방에 들어왔다는 의미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바로 일어나려는데 누군가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움직이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새카만 어둠을 짚었다. 하지만 상대는 내 등 뒤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늦은 밤, 정체도 밝히지 않고 침실에 몰래 잠입한 놈이 정상적일 리는 없으니 필시 이상한 꿍꿍이를 품고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일단 몸이 움직여져야 대항이든 뭐든 할 테니 몸을 움직이려 집중하던 중, 침대가 출렁거렸다.
몰래 온 손님이 내 침대에 올라온 것이다.
상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 팔을 어깨서부터 아래로 쓸어내렸다.
미묘하고 끈적끈적한 손길. 아무래도 몰래 온 손님이 원하는 건 내 몸인 듯했다.
하, 내 몸을 노리다니.
내 목숨을 노리고 온 암살자를 마주했을 때보다 더 화가 났다.
나는 피가 날 정도로 입 안의 연한 살을 세게 깨물었다. 아찔한 통증이 가득 퍼지면서 억눌렸던 신경이 풀린 건지 거짓말처럼 팔이 움직였다.
상대가 내 상의 안으로 손을 넣으려는 순간, 나는 베개 밑에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상대의 목에 겨눴다.
그러자 놀랐는지 상대가 그대로 굳었다.
“누구냐.”
“여, 영애.”
떨리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어디서 들어 봤더라.
그래, 추모식에 왔던 조문객 중 한 명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얼굴과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침실에는 무슨 일이지?”
침실에 몰래 들어온 불청객에게까지 존댓말을 써 줄 만큼 내 아량은 넓지 않았다.
“영애, 일단 그 검 좀 치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되레 단검을 더욱 바짝 들이밀었다.
“그대는 내 침실에 들어온 불청객인데.”
“그, 그건.”
“이럴 땐 바로 죽여도 법적인 문제가 되지 않지.”
“!”
침실에 드리운 짙은 어둠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에 댄 단검을 통해 상대가 얼마나 떨고 있는지 느껴졌다.
이렇게 겁이 많으면서 감히 내 침실에 들어와 날 겁탈하려고 했다니.
“죄, 죄송합니다, 영애! 방을 잘못 찾아서, 그래서 실수로……!”
“손님들이 머무는 방은 별관이고 내 방은 본관인데, 그런 같잖은 소리를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입을 바로 다무는 걸 봐서 믿어 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멍청하게도.
“셋을 셀 때까지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지 않으면 이 단검을 네 목에 꽂을 거다.”
“영애, 그건……”
“하나, 둘.”
남자가 뭐라 변명하려고 했지만 무시하고 카운트를 했다.
“게, 겔르안 아나시드! 그 남자가 시켰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크게 소리쳤다.
“여, 영애와 하룻밤을 보내면 영애랑 결혼시켜 주겠다고, 레오폴드 공작이 되게 해 주겠다고 말이죠!”
내부에서 누군가가 이 남자를 도와줬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 상대가 겔르안일 줄은 몰랐다.
“저, 영애. 이제 단검을 치워 주시면…….”
내가 단검을 치우자 남자는 눈에 띄게 안도하며 크게 숨을 뱉었다.
‘아직 안심하긴 이른데.’
나는 입술을 비틀며 단검을 고쳐 잡아 손잡이 쪽으로 남자의 목덜미를 세게 가격했다.
“컥.”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남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남자가 기절한 걸 확인한 뒤, 설렁줄을 잡아당겨 하녀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아가……!”
하녀는 침대에 축 늘어진 남자를 보고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하녀가 협탁에 두고 간 향초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 향초, 네가 준비한 거니?”
“네? 아, 아니요. 저 향초는 겔르안 님께서 주신 겁니다. 아가씨의 상태가 걱정된다면서…….”
여기서도 겔르안의 이름이 나오네. 그가 뒷배인 건 이로써 거의 확실해졌다.
“됐고.”
하녀의 잘못을 따지고 벌을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두었던 숄을 집어 들며 말했다.
“지금 당장 겔르안 부부를 불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