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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6/262)

6화

겔르안에게 그런 부탁을 하긴 했지만, 진짜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그저 내가 공작위를 승계받겠다고 할까 노심초사하는 황제에게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한 눈속임이었다.

동시에 조만간 찾아올 불청객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이기도 했다.

겔르안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어 줘야 하는데, 다행히 그는 내 기대에 부응해 주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나는 신문 한쪽 면을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는 구혼 광고를 보고 혀를 찼다.

구혼 광고에는 레오폴드 공작가의 영애가 남편감을 찾고 있으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겔르안 아나시드에게 연락하라고 적혀 있었다.

구혼 광고 덕분에 영지민은 물론 제국 전체가 내가 남편감을 찾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증거로 하루에도 수십 건의 청혼서가 저택으로 쇄도했다. 청혼서를 전담하는 사용인을 따로 둬야 할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물론 그 청혼서들이 지금까지 내 손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겔르안 부부 때문이었다.

“우리가 네게 청혼서를 보낸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네게 잘 어울리는 사람인지 엄중하게 선별하고 그중 몇 명을 네게 보여 줄 테니 넌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렴.”

엄중하게 선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뇌물을 많이 주는지 지켜보는 거겠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걸 보아하니 아예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다행이네. 눈치 없는 바보였다면 방패막이로 써먹기 힘들었을 텐데.

“그렇게 하세요. 전 외숙부만 믿고 있을게요.”

그들이 제멋대로 날뛸수록 방패막이의 역할을 제대로 할 테니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겔르안 부부에게 결혼 상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지 정확히 나흘 뒤.

“조의를 표합니다, 레오폴드 영애.”

그 남자, 체르노서가 황족을 대표해서 레오폴드 영지에 방문했다.

황제를 닮은 짙은 금발과 푸른 눈동자,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등 체르노서는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남자였다.

하녀들은 그의 잘난 외모를 보고 얼굴을 붉혔지만, 내겐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저 역겨운 얼굴과 다시 마주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여기서 짜증을 내면 모든 게 무산되니 참아야 했다.

“감사합니다, 황자 전하. 설마 황자 전하께서 친히 오실 거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레오폴드 공작은 제 형님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니 당연히 제가 직접 방문해야지요.”

체르노서가 가슴에 손을 얹고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레오폴드 공작의 일은 정말로 유감입니다. 부황 폐하께서도 진심으로 레오폴드 공작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안타깝게 여기긴 개뿔. 오히려 박수를 치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토록 바라던 레오폴드 공작가를 집어삼킬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으니까.

황제가 비열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져서 속이 쓰렸다. 신물이 올라온다.

나를 비난하고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내 심장에 검을 꽂았던 상대와 마주하고 있어서인지 더욱 속이 울렁거렸다. 애써 꾹 눌렀던 짜증들이 끓어올랐다.

여기 더 있다간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낼 것 같아 이만 자리를 피하고 싶은데, 그를 떠맡아 줄 겔르안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이리도 행동이 굼뜬 건지.

하인에게 데리고 오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체르노서의 뒤로 겔르안이 보였다.

참으로 일찍 오네. 그나마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나타나서 다행이었다.

나는 남아 있는 인내심을 끌어모아 경직된 입술 위에 수줍은 미소를 그리며 볼을 발그레 붉혔다.

“황자 전하께서 오셔서 정말로 기뻐요.”

그런 내 모습에 체르노서는 흐뭇하게 웃었고, 겔르안은 당황하며 주춤했다.

그것도 잠시, 겔르안은 눈썹이 휘날리도록 허겁지겁 달려와 체르노서에게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겔르안 아나시드, 제국의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이렇게 보니 그가 한때 백작가의 영식이었다는 게 티가 났다.

비록 지금은 상종 못 할 망나니이긴 하지만.

“아나시드라. 어디서 들어 본 적이 있는 성인데.”

체르노서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떠올랐는지 탄성을 뱉었다.

“어마어마한 부채를 이기지 못하고 파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작위까지 판 백작가의 성이었지.”

사실이긴 하지만 당사자의 면전에 대고 대놓고 말하다니.

새삼 느끼는 거지만 체르노서의 인성은 쓰레기였다.

“…….”

겔르안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나시드 백작가를 망하게 한 원흉이면서 꼴에 수치심은 느끼는 모양이지.

양심이 티끌만큼이나마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지금은 수치심 따위를 느끼며 주춤할 때가 아니었다.

“외숙부, 황자 전하를 부탁드릴게요. 아버지의 묘지까지 안내해 주세요.”

네 역할을 해야지, 겔르안.

이걸 위해 지금까지 당신의 만행을 참고 넘겨 준 건데, 제 역할을 다해 주지 않으면 무척 곤란하다고.

“그래. 나한테 맡기려무나, 아델.”

다행히 지금까지 내 인내와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

그럼 부탁한다고 말하고 방으로 가려는데 체르노서가 나를 붙잡았다.

“왜 영애가 아닌 이 남자가 안내를 하는 거지?”

“지금 아델은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많이 지친 상태입니다.”

나를 대신해서 겔르안이 대답했다.

“그럴 만도 하죠. 갑자기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은 데다가 그 아버지의 장례식을 홀로 치러야 했으니까요. 불쌍한 아델.”

겔르안은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시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누가 봐도 조카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다정한 외숙부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제가 아델을 대신해서 조문객들의 안내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군.”

겔르안이 저렇게 나오니 체르노서도 불만 가득한 표정이면서도 내게 직접 안내해 달라는 망언은 하지 않았다.

“그럼 황자 전하를 잘 부탁드려요, 외숙부. 제게 특별한 분이니까요.”

드디어 긴 시간 준비해 온 연극의 막이 올라갔다.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부디 다음 장에도 배우들이 제 역할을 잘해 주길 바라며 나는 조용히 무대 뒤로 물러났다.

* * *

“아델이 체르노서 황자한테 반한 것 같아.”

추모식이 끝난 뒤, 체르노서를 본관의 방까지 안내해 주고 별채로 돌아온 겔르안의 말에 아내, 세이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 아이가 그렇게 말했나요?”

“그건 아닌데 눈치가 그랬어. 아델이 황자를 보고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했거든.”

“허, 그럴 수가.”

세이지가 혀를 차며 머리를 짚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황자랑 결혼하면 우리가 신랑감을 구해 준 게 아니니 사례금을 못 받을 텐데요.”

“사례금만 못 받으면 다행이게. 영지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네? 왜요?”

“그 황자, 나를 싫어하더군.”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황자가 당신을 싫어한다니? 황자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요?”

“그게 아니라 그 황자는 내가 아나시드 백작가를 망하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예?”

세이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게 왜 당신 때문이에요? 당신의 누님이 매정하게 가족을 버린 탓이잖아요!”

“그러니까. 누님이 도와줬더라면 작위를 파는 일도 없었을 텐데.”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오른 겔르안이 이를 박박 갈았다.

레오폴드 공작가는 암암리에 황실보다 더 많은 부를 쌓았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엄청난 부자였다.

그런 레오폴드 공작가의 재력이라면 아나시드 백작가가 짊어진 부채를 해결해 주는 건 식은 수프 먹기보다 쉬울 터.

물론 당시 아나시드 백작가가 짊어진 부채는 무려 3만 골드로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레오폴드 공작가가 쌓아 둔 부와 비교했을 때 손톱에 낀 때만큼 적으니 겔르안은 누님이자 레오폴드 공작 부인인 라디안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왜 그런 것까지 해결해 줘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겔르안.”

하지만 믿음은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네가 저지른 잘못이니 네가 해결하렴. 난 네 뒤처리를 해 주는 사람이 아니란다.”

라디안은 매몰차게 겔르안과 그의 부모, 그리고 가문을 버렸다.

때문에 가문은 파산했고, 겔르안은 빚을 갚기 위해 작위까지 팔아야 했다.

이에 부친은 몹시 분개하다가 화병을 이기지 못해 죽었고, 모친은 사고를 당해 세상을 등졌다.

작위까지 팔았음에도 빚을 다 갚지 못해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부랑자처럼 집도 없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길에서 자는 치욕까지 겪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로 분해 겔르안은 인상을 팍 썼다.

“누님도 누님이지만 매형도 우리를 버릴 줄은 몰랐어.”

“그야 당신의 누님이 도와주지 말라고 했겠죠.”

“그렇겠지. 하여간 악독한 여자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여보.”

세이지가 뺨에 손을 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례금도 못 받고 영지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어져요.”

“내가 그 아이의 외숙부인데 쫓겨나긴 왜 쫓겨나? 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두 사람이 결혼하지 못하도록 막으면 돼.”

세이지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겔르안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생각해 봐, 세이지. 황족은 결혼 준비를 하는 데 못해도 석 달은 걸려. 석 달이면 무슨 일이 생기고도 충분히 남는 시간이지.”

“무슨 일이라고 하면……?”

“가령 아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다든가.”

“세상에.”

세이지가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표정만 보면 놀란 것처럼 보였지만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겔르안은 주먹을 꽉 쥐고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두고 봐. 어떻게든 두 사람이 결혼하지 못하게 방해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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