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62)

5화

다음 날, 나는 리네를 해고했다.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에 리네는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뭘 잘못했는데?”

내가 묻자 리네는 용서를 구하던 입을 딱 다물었다.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지금 생에서 리네가 해고당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러니 리네의 입장에선 내가 이러는 게 부당하고 억울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전 생의 기억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상 리네를 내 집에 둘 생각이 없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감수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리네는 내가 이 정도로 끝내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했다.

리네에게 지난 생에 내가 겪었던 그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해 주려다 쓸데없는 희생은 줄이고 싶어 이 정도로 끝내는 거였다.

“나가렴.”

“아, 아가씨. 제가 다 잘못했어요! 다시는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게요!”

무의미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리네를 납득시키는 건 어려울 것 같아 눈물을 펑펑 흘리는 그녀를 무시하고 돌아섰다.

“아가씨, 아가씨!”

리네가 나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오려고 하자 공작가의 기사들이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리네를 저택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난간 앞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 내 뒤를 따라온 하녀장, 사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리네를 내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아가씨?”

“그래.”

“혹 리네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제게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아니.”

내 대답에 사라가 어두운 얼굴을 하며 한숨을 푹 쉬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같은 생을 몇 번이고 반복했는데, 이전 생에서 리네가 날 독살했어, 라고 말해 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사라가 믿어 줄 리도 없었고.

“그것보다 리네가 나갔으니 새로운 전속 하녀를 뽑아야겠네.”

“마음에 드시는 아이가 있으십니까? 말씀해 주시면 그 아이를 교육하도록 하겠습니다.”

“딱히 마음에 드는 아이는 없고. 사라가 보기에 실력이 괜찮은 아이 중, 가족이 없는 아이로 뽑아 줘.”

“네?”

사라가 당황스러워하는 게 표정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난데없이 가족이 없는 아이로 뽑아 달라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가족이 없는 아이로 뽑아 달라고 했어.”

하지만 내 의견은 변함이 없었다.

리네처럼 또 황제에게 가족이 볼모로 붙잡혀 나를 죽이려고 하면 큰일이니, 애당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정말로 가족이 없는 아이를 전속 하녀로 뽑으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하오나 가족이 없는 아이들은 대부분 출신이 불분명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출신은 불분명해도 레오폴드 공작저에 들어왔다는 건, 과거에 범죄 같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줘.”

보통 그런 아이들은 세탁방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지 전속 하녀가 되진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 달라고 하니 사라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외숙부와 숙모를 불러 주겠어? 아, 곧 점심시간이니 그냥 점심 식사에 초대하면 되겠다.”

떨떠름했던 얼굴이 이번엔 딱딱하게 경직됐다.

내가 겔르안 부부를 점심 식사에 초대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저, 아가씨……. 주제에 넘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겔르안 님과는 가깝게 지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예전에 마님께 아주 큰 무례를 저지른 분이니까요.”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지 사라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걱정하지 마, 사라. 외숙부랑 가깝게 지낼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이시죠?”

“그래. 지금은 부탁할 게 있어서 만나려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들을 점심 식사에 초대해 줘.”

“알겠습니다.”

사라는 비로소 안심하며 물러났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소파에 앉아 만년필로 끄적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작위를 이어받아야 해.’

내가 레오폴드 공작의 친딸인 건 제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작위를 이어받는 데 신분과 혈통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귀족회가 내 발목을 잡았다.

제국에서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이 작위를 승계하려면 귀족 회의에서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대체로 고위 귀족들이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만큼 능력 없는 사람이 작위를 승계받는 걸 막기 위해서 생긴 법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작위를 승계받을 자식에게 치명적인 흠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대부분 허락해 줬다.

그 법이 생기고 나서 지금까지 승계를 반대한 사례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문제는 그 사례에 내가 포함된다는 거였다.

귀족 회의에서 내가 공작위를 잇는 걸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여자이고 레오폴드 공작가가 기사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사가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 기사의 9할 이상이 남자였다.

게다가 레오폴드 공작은 대대로 제국의 총사령관직을 맡아 제국의 군대를 이끌었다.

귀족 회의에선 그 역할을 여자인데다가 기사 작위도 없는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고.

그러니 내가 공작이 되는 것보다 결혼해서 남편에게 공작위를 넘겨주는 게 바람직하다며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황제도 그 점을 들먹이며 내가 2황자와 결혼하길 강요했고.

나 역시 그게 맞다고 생각하며 결혼했었지만, 이젠 아니었다.

레오폴드 공작가의 핏줄은 바로 나였다.

그러니 내가 공작이 되는 게 맞았다.

내 남편이 아니라!

‘그러려면 귀족회를 설득해야 하는데.’

고지식한 귀족회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것 자체도 힘들었지만, 강력한 황제의 입김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똑똑-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나는 종이에 적은 것들을 벽난로에 넣어 태우며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사라였다.

“아가씨, 점심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외숙부는?”

“지금 막 식당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식당으로 가자.”

일단 황제의 눈부터 돌려 시간을 번 다음 고민해 봐야지.

그걸 위해서 겔르안을 별채에 머물게 한 거였다. 점심 식사에 초대한 것도 같은 이유였고.

나는 검은 원피스 위에 숄을 걸치고 겔르안 부부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향했다.

“어서 오렴, 아델.”

내가 식당으로 들어서자 겔르안 부부는 마치 그들이 주인인 양 나를 맞이했다.

그 모습이 우스워 비소가 나왔고, 그들의 화려한 옷차림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통 때였다면 화려하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추모 기간이었다.

그런데 원색 옷을 입고 나타나다니. 도대체 저 커다란 머리통에 뭐가 들어 있는 건지 궁금했다.

설마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걸까?

“자, 자. 이쪽으로…….”

나는 내게 손을 내미는 겔르안을 지나 상석에 앉았다.

“크음.”

그러자 머쓱했는지 겔르안이 헛기침을 하며 내 왼쪽에 앉았다.

그 옆에 숙모까지 앉자 하녀들이 음식을 내오기 시작했다.

내가 따뜻한 식전 수프를 한 스푼 떠먹기가 무섭게 겔르안이 푸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를 별채에 머물게 할 거니? 이제 슬슬 본관 정리도 다 된 것 같은데, 본관에서 머물러도…….”

“때가 되면 알아서 부를 테니 보채지 말아 주세요. 자꾸 보채면 오히려 내쫓고 싶어지니.”

“뭐, 뭣?”

“수프 식겠어요. 어서 드세요.”

나는 당혹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겔르안을 무시하고 식전 수프를 떠먹었다.

“여보도 드세요.”

숙모의 말에 멍청하게 앉아 있던 겔르안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어머니를 닮아 예쁘다거나 나 같은 조카가 있어서 자랑스럽다는 둥 내 칭찬을 늘어놓았다.

어떻게든 내게 잘 보여 공작저에 빌붙으려는 술수가 얄궂게 생긴 얼굴에서 훤히 보였다.

나는 겔르안이 제멋대로 떠들게 내버려 두다가 후식이 나올 때쯤, 본론을 꺼냈다.

“외숙부께서 그렇게 절 자랑스럽게 여기시니, 절 위해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지! 뭐든 말해라. 하늘에 있는 별이라도 따다 줄 테니.”

“어라, 별을 따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어?”

저 멍청한 표정을 보라지. 고작 농담 하나 받아쳤다고 흔들리는 꼴이 우스웠다.

“농담이니까 그렇게 놀라지 마세요.”

“아, 하하하. 그렇구나, 농담이었어.”

겔르안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크흠, 흠. 그럼 내게 뭘 부탁하려는 거니?”

“결혼 상대를 좀 찾아 주세요.”

“어, 어?”

이번엔 턱이 빠지겠네. 

쩍 벌어진 입은 주먹 하나도 거뜬히 들어갈 것 같았다.

“제 결혼 상대를 찾아 달라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으응? 어, 그러니까…….”

“조금 놀랐단다. 설마 우리한테 그런 부탁을 할 줄은 몰랐거든.”

바보같이 얼이 빠져 말을 더듬는 겔르안을 대신해서 숙모가 나섰다.

언제까지 저 멍청한 남자랑 대화를 나눠야 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하긴 이제 18살이니 슬슬 결혼할 나이긴 하지. 그래서, 마음에 둔 사람은 있니?”

“없으니 외숙부께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아아, 그렇겠구나.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질문을 했어.”

그걸 알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란다. 하지만 결혼 상대를 찾으려면 자금이 좀 필요한데…….”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종을 흔들자 뒤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다가와 겔르안의 앞에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 든 금화들을 확인한 겔르안과 숙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 마음에 드는 결혼 상대를 찾아 주신다면 수고비로 이것보다 더 큰 사례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 말에 겔르안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득였다. 숙모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이것보다 더 많은 사례를 한다고?”

“물론이죠.”

나는 그들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열심히 수소문해서 찾아 주세요, 외숙부. 이왕이면 제국민 모두가 제가 신랑을 구하는 걸 알 수 있도록 아주 크게 소문을 내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