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장례식이 막 끝난 공작저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아직 추모식이 남아 있어 검은 옷을 벗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어둡고 우울한 느낌이 들었다.
사용인들 역시 침울하고 어두운 표정이었다. 개중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애도하다가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
영지민들도 아버지의 죽음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추모 기간 동안 주점을 닫는 등 유흥을 자제했다.
그러나 모두가 슬픔에 잠겨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하는 와중에도 활개를 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 좀 치우렴.”
“어머, 고작 이 정도도 제대로 못 한다는 거니?”
바로 겔르안 부부였다. 그들은 마치 공작가의 주인이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우며 사용인들의 행동을 지적하고 그들을 괴롭혔다.
아니, 그들은 진짜 이 저택의 주인이 됐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델, 추모 기간 때 오는 조문객들은 우리가 맞이해도 될까?”
그게 아니고서야 저딴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숙모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했다.
“다른 뜻이 아니라……. 지금까지 너 혼자 조문객들을 맞이하느라 힘들었잖니.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가 도와주려는 거란다.”
겔르안이 말을 거들었다.
“그래. 매형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직 마음도 다 추스르지 못했을 텐데, 조문객을 맞이하는 건 우리에게 맡기고 푹 쉬도록 해.”
그들의 이야기만 들어 보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귀족들과 안면을 익히고 입지를 다지는 거였다.
그래야 내가 함부로 공작가에서 내쫓지 못할 테고, 설령 쫓겨나더라도 빌붙을 곳이 생길 테니까.
생각 자체도 버러지 같았고, 남의 슬픔을 기회로 이용하려는 게 역겨웠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럼에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한 건, 그들이 날뛸수록 나중에 더 쓸모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네스는 내 결정에 우려를 표했지만 나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쌓인 눈을 파헤치고 어렵사리 공작저를 방문한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일을 겔르안 부부에게 맡겼다.
그리고 나는 방에 틀어박혀 지난 생의 일들을 정리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현재까지 흐름은 첫 번째 생과 비슷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내 마음은 달랐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큼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럼 일주일 뒤에 그 남자가 오겠네.’
체르노서 2황자. 첫 번째 생의 남편이자 황제의 사주를 받아 나를 죽인 장본인이었다.
체르노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오르고 심장이 빨리 뛰면서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내 심장을 난도질했던 차가운 날붙이의 감촉과 고통에 허덕이며 죽어 가는 나를 비웃던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보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그딴 놈은 잊는 거야, 아델.
“후우.”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울렁이는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나는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그 뒤로 발걸음 소리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굉장히 작은 소리였지만 사위가 조용해서 크게 들렸다.
“무슨 일이지?”
“아가씨…….”
“!”
이 목소리는 설마.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문 앞에 서 있는 하녀를 쳐다봤다.
흔한 갈색 머리에 콧잔등에 가득한 주근깨. 강아지 같은 순진한 눈망울.
“……리네.”
세 번째 삶에서 나를 배신하고, 독살했던 그 하녀였다.
여태 저 하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니.
아무리 다른 일로 바빴다곤 하나 바로 이전 생에서 날 독살한 사람이 같은 집에 머물고 있는데 그 사실을 새카맣게 잊은 내가 바보 같았다.
아니, 그것보다 리네는 내 전속 하녀인데 왜 여태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이제 나타난 거지?
“제가 휴가 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리네에게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가 스스로 이유를 말했다.
휴가라.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면서 10년도 더 된 까마득한 일이 되어 버려 그 사실 역시 잊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시다니, 흑흑.”
“아가씨,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흑, 흑.”
눈물을 펑펑 쏟아 내는 리네의 모습 위로, 이전 생에서 날 독살해 놓고 용서를 구하던 뻔뻔한 모습이 떠올라 부아가 들끓었다.
시계의 태엽이 되감기면서 그녀가 한 짓은 전부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에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솔직히 말해 리네가 그런 선택을 한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와 내가 친하다고 해도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으니까.
그런 나보다 피를 진하게 이은 친동생들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리네가 황제의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독살한 것도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용서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평생 그녀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나가.”
내가 차갑게 말하자 리네가 눈물 고인 눈동자를 크게 떴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의 나는 그녀가 알고 있는 나와 상당히 다를 테니까.
리네가 알고 있는 나라면 그녀를 내쫓긴커녕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렸을 것이다.
실제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생에서 그러기도 했고.
세 번째 생에선 내쫓는 대신 슬퍼하는 리네를 다독여 주었다.
만약 세 번째 생에서 리네가 날 배신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그랬겠지.
“내 말 안 들려?”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보듬어 줄 생각은 없었다. 가엽지도 않았고.
“나가라고 했어.”
리네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주춤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께서도 힘드실 테니 조용히 쉬실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
“이건 제 동생이 만든 선물이에요. 아가씨께 꼭 전해 달라고 해서요.”
리네가 우물쭈물하며 내민 건 조가비를 이어 붙여 만든 드림캐처였다.
리네는 드림캐처를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돌아섰다.
“……리네.”
리네가 방을 나가기 직전, 문득 그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겨 나는 그녀를 불렀다.
리네가 아까보다 밝은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네, 아가씨!”
“친동생이 있다고 했지?”
“네!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럼 만약 여동생과 내가 동시에 위험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야?”
“네……?”
기쁨도 잠시, 다시 당혹감에 물든 얼굴이 경직됐다.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난 대답하라고 했지, 되물으라고 한 적 없는데.”
내가 딱딱하게 응수하자 리네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굴러다니며 내 눈치를 살폈다.
작은 머리로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는 게 얼굴에 훤히 보였다.
저렇게 감정이 잘 드러나는 아이인데, 난 왜 저 애가 날 배신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연기 실력이 딱히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뭐지?
“저, 저는요!”
드디어 대답할 마음이 생겼는지 리네가 두 손을 가슴께에서 꼭 마주 쥐고 크게 대답했다.
“아가씨를 먼저 구할 거예요!”
“그래?”
“네! 전 세상에서 아가씨가 제일 좋거든요! 동생보다 더 좋아요!”
그 대답에 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리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아무래도 리네는 내가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어서 웃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리석게도.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 푹 쉬시고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리네가 나가고 나는 그녀가 두고 간 드림캐처를 들었다. 드림캐처의 장식들이 부딪치면서 맑은 소리를 냈다.
그 위로 방금 전, 리네가 했던 대답들이 잉크처럼 머릿속에 번지면서 실소가 저절로 나왔다.
“거짓말쟁이.”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다면 기분이 이렇게 나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사실대로 말했어도 기분이 나빴으려나.
그냥 그녀의 존재 자체가 내 신경을 긁었다.
그래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했던 거고.
당연하게도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말이지.
나는 입술을 비틀며 드림캐처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드림캐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였다. 내가 어떻게 처신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안 돼.”
리네를 향한 내 믿음과 신뢰는 저 드림캐처처럼 완전히 박살 나서 두 번 다시는 붙일 수가 없었다.
* * *
“저보고 레오폴드 공작의 추모식에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2황자 체르노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황제에게 되물었다.
이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당한 얼굴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레오폴드 공작이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은 제가 아닌 형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제가 추모식에 가야 한단 말입니까.”
“황태자는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아 먼 거리 여행은 무리다. 그러니 네가 대신 다녀와라.”
“하지만 부황 폐하, 저는…….”
“내가 수많은 황자들 중에서 굳이 널 보내려는 이유를 아직 모르겠느냐.”
체르노서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자 황제는 혀를 찼다.
“지금 레오폴드 영애는 갑자기 부친을 잃어 심적으로 굉장히 힘든 상태일 거다. 그럴 때 옆에서 살뜰히 보살피며 위로해 준다면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밖에 없지.”
“저보고 레오폴드 영애의 환심을 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러면 네가 레오폴드 공작이 될 수 있을 거다. 광활하고 비옥한 레오폴드 영지와 막대한 레오폴드 공작가의 재산이 모두 네 것이 되는 거지.”
그 말에 체르노서의 눈동자가 보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조금 전만 해도 추모식에 가기 싫어 오만상을 쓰던 철부지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추모식에 가서 레오폴드 영애를 위로하고, 영애의 마음을 얻어 오겠습니다.”
“그래. 내일 당장 출발할 수 있게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지.”
체르노서는 황제에게 인사하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왔다.
어떻게 하면 아델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 고민하며 황자 궁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웬 그림자가 황급히 수풀 안으로 숨는 게 보였다.
“거기 누구냐.”
“…….”
“당장 나오지 못할까!”
서슬 퍼런 호령에 그림자의 주인이 쭈뼛쭈뼛 수풀 밖으로 나왔다. 이제 1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소년을 본 체르노서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하, 이게 누구야. 반푼이잖아.”
“혀, 형.”
“말하지 마. 병신같이 말 더듬는 걸 들으면 짜증 나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체르노서는 소년의 가슴팍을 세게 걷어찼다.
“악!”
우악스러운 힘에 소년은 내동댕이치듯 뒤로 넘어졌다.
고통이 꽤나 극심한지 소년은 가슴을 움켜쥔 채 좀처럼 일어서지 못했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메마른 기침이 연거푸 터져 나왔다.
“내가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이 정도에서 끝내는 줄 알아.”
“쿨럭, 컥.”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낼 거다.”
체르노서는 바닥에 침을 뱉고 홀연히 떠났다.
혼자 남은 소년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흙먼지가 묻은 옷을 털어 냈다.
그러다 가슴팍에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을 발견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잭에게 혼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