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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3/262)

3화

겔르안 아나시드.

내 어머니의 이복동생이자 아나시드 백작가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원인은 도박 중독.

겔르안은 카지노를 제집 드나들 듯이 다니며 돈을 탕진했다.

외조부모인 아나시드 백작 부부는 어떻게든 겔르안을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잔소리 때문에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더욱 카지노에 돈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아나시드 백작가는 유서 깊은 저택을 팔아야 할 정도로 많은 빚이 생겼다.

저택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아나시드 백작은 수치심을 무릅쓰고 내 어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머니는 배다른 동생인 데다가 망나니였던 겔르안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부친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도와줬었다.

상황이 그 지경까지 이르렀으면 뭔가 깨닫는 게 있어야 정상이건만, 불행히도 겔르안은 비정상이었다.

그는 도박을 그만두지 않았고, 심지어 레오폴드 공작가의 이름까지 팔아먹으며 도박을 계속했다.

이에 화가 난 어머니는 금전적인 지원을 전부 끊었다.

그럼에도 겔르안은 반성하며 사죄하긴커녕 오히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어머니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어차피 썩어 날 정도로 돈이 많으면서 가족한테 베푸는 게 그렇게 아깝습니까? 예? 이기적인 여자 같으니라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며 겔르안을 내쫓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모든 건 내가 7살이 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에도 돈이 궁핍해진 겔르안은 몇 번이고 아나시드 백작을 내세워 공작가에 뻔뻔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먹고살기 어려우니 돈을 빌려 달라면서.

하지만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부모님은 단호하게 그들을 내쫓았다.

그때도 겔르안은 공작가의 정문을 가리키며 너무하다고, 부모도 버리는 거냐며 소리치면서 내 부모님을 저주했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얼굴을 들이밀다니.

뻔뻔해도 이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내쫓고 싶었으나 지난 생에서 그랬다가 그들이 영지에서 패악을 치는 바람에 일이 더 복잡해진 전적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아델, 정말 많이 컸구나. 어엿한 숙녀가 됐어.”

하여 어쩔 수 없이 받아 준 건데,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지 겔르안은 친한 척을 해 왔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역겨운지 저절로 구겨지는 인상을 억지로 펴느라 얼굴에 힘을 줘야 했다.

“좋은 분이셨는데, 이렇게 돌아가셔서 너무 안타깝구나.”

“그러게요.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나오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짜내려는 모습이 참으로 눈물겨웠다.

아무리 부부는 닮는다지만 저런 뻔뻔한 부분까지 닮을 필요는 없지 않나.

“외숙부, 꽃을 내려놓으세요.”

겔르안이 꽃병에 꽂아 둔 흰 국화꽃을 집어 들자 나는 그를 만류했다.

그러자 겔르안이 어리둥절해하며 나를 쳐다봤다.

“꽃을 내려놓으라니. 그럼 매형에게 어떻게 헌화하라는 거니?”

“안 하시면 되죠.”

“뭐?”

“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겔르안은 멍청하게 있다가 뒤늦게 내 말을 알아듣고 인상을 팍 썼다.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거니?”

“그럴 리가요. 그저 아버지께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는 겔르안이 들고 있는 국화를 빼앗아 다시 꽃병에 꽂았다.

“아버지께선 외숙부를 무척 싫어하셨으니까요. 그런데 외숙부께서 헌화하면 평온히 눈을 감지 못하실 거예요.”

겔르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는 황소처럼 발을 구르며 세차게 소리쳤다.

“눈길을 뚫고 어렵게 여기까지 온 어른에게 말하는 꼬라지를 보라지! 제 아비에게 교육을 어떻게 받았는지 눈에 훤히 보이는구나!”

“그럼 외숙부께선 외할아버지께 교육을 잘 받아서 집안의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하신 건가요?”

“뭐, 뭣?”

“어머니께서 올바르셨던 걸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외할머니가 문제였을까요?”

“너, 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파들파들 떠는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우스웠다.

“여보, 진정해요.”

비교적 정상인 외숙모가 그를 말렸다.

그래도 아내의 말은 잘 듣는지, 아니면 본래의 목적을 떠올린 건지 겔르안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아깝네. 겔르안이 눈이 뒤집혀서 내게 달려들었다면, 그걸 핑계로 레오폴드 영지에서 영원히 추방할 수 있었을 텐데.

겔르안은 화를 가라앉힌 뒤, 다시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 일은 이만 잊자꾸나, 아델. 그땐 내가 너무 철이 없었어.”

나이 서른에 철이 없었다니.

그럼 도대체 언제 철이 든다는 거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단다. 나도 내 잘못을 인정하고 크게 반성하고 있어.”

방금 전의 행동은 반성한 사람이 보일 만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사이좋게 지내자꾸나, 아델.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이잖니.”

피를 나눈 가족.

첫 번째 생에선 저 달콤한 말에 속아 호되게 당했었다.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으니까.

게다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충격과 슬픔에 빠져 사리 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의지하고 따를 존재가 간절하게 필요했는데, 바보 같게도 그 존재를 겔르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겔르안 다음에는 황제였지.’

황제가 더 지독한 놈이라는 건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정말이지, 첫 번째 생의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 멍청이였다.

“너도 이제 혼자니까 함께할 가족이 있으면 좋잖니?”

“괜찮아요. 혼자서도 잘할 수 있거든요.”

“부담스러운 건 알겠지만 너무 사양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다 네가 걱정돼서 그런 거니까.”

“제가 걱정된다고요?”

“그래. 넌 올해 데뷔탕트를 갓 치른 나이라 세상 물정을 잘 모르잖니.”

외숙모가 겔르안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니까 어른인 우리가 도와주겠다는 거란다. 너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걸?”

쓸데없는 걱정이고 오지랖이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을 바엔 홀로서기 하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같은 생을 몇 번이나 거듭하면서 저들보다 훨씬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거절하려던 나는 문득 저들에 대한 쓸모가 생각나 멈칫했다.

일자를 그렸던 입술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정말로 절 도와주실 건가요?”

그들의 호소가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아나시드 부부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뭐든 도와주마.”

“뭐든요?”

“그래. 우리는 가족이니까. 가족끼리 못 해 줄 게 뭐가 있겠니?”

“그럼, 그럼. 그러니 부탁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어려워하지 말고 우리한테 말하렴.”

“그것참, 다행이네요.”

앞으로 내가 부탁할 일은 당신들의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그럼 별채에서 쉬시면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부를게요.”

“본관이 아니라 별채라고?”

본관에는 주로 가족 혹은 혈족이 머물렀고, 별관에는 손님들이 머물렀다.

즉, 그들을 가족이 아닌 손님 대접하겠다는 의미이니 당황한 겔르안이 더듬더듬 말했다.

“우. 우리는 당연히 본관에 머물 줄 알았는데…….”

“저도 그러고 싶은데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본관 정리를 제대로 못 해서요.”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리를 해야 하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들을 진짜 가족으로 생각했다면 본관에서 머물게 했겠지만, 그게 아니니 적당한 핑계를 댄 것이다.

“당분간 정리 때문에 본관은 번잡할 것 같아 별채로 모시는 거니 이해해 주세요. 본관 정리가 끝나면 부를게요.”

물론 본관 정리가 끝나도 그들을 다시 부를 생각은 없었다.

“정말로 끝나면 부를 거지?”

“그럼요. 걱정하지 말고 쉬세요.”

나는 하인에게 그들의 안내를 맡기고 본관으로 들어갔다.

겔르안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눈은 그쳤지만, 이미 눈을 많이 맞아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하녀에게 말했다.

“따뜻한 차를 가져다주렴. 감기를 떨칠 수 있는 약차로.”

“어머나, 감기에 걸리신 건가요? 주치의를 부를까요?”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푹 쉬면 나을 것 같아.”

“그럼 따뜻한 물에 목욕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허브 입욕제를 넣고 푹 담그시면 감기도 날아가고 기분도 좋아질 거예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하녀가 떠나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에 비친 여자를 쳐다봤다.

“어리네.”

이전 생의 끝보다 고작 3살 어려진 건데, 한참은 어려 보였다. 고생을 덜해서 그런 걸까.

‘앞으로 나에게 남은 기회는 몇 번이려나.’

한 번? 두 번? 아니면 이번이 마지막일까?

어느 쪽인지 몰라 불안했다.

이번 생이 마지막이라면, 그런데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영영 복수할 기회를 잃게 되니 그게 두려워 미칠 것 같았다.

“잘될 거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자고 최면을 걸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하녀인 줄 알았건만 뜻밖에도 찾아온 사람은 하네스였다.

“무슨 일이지?”

“아가씨, 별채에 겔르안 님을 들였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것 때문인가.

“맞아.”

“하지만 겔르안 님은…….”

“집사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첫 번째 생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걱정 어린 잔소리를 들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들에게 휘둘릴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정말로 괜찮을까요?”

“물론.”

하네스의 뒤로 그 하녀가 보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추모식 준비를 해 줘. 기간은 아까 말한 대로 한 달 정도면 충분하겠네.”

“네? 하오나 아까는 추모식을 하지 않으신다고…….”

“그럴 생각이었는데, 바뀌었어.”

쓸 만한 패가 손에 들어왔는데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갈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추모식을 준비해 줘.”

이제 겨우 달무리가 모습을 드러낸 이른 저녁.

네 번째 생의 수레바퀴가 삐걱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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