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62)

1화

Prologue.

“결혼하겠습니다.”

내 대답에 황제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빛은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암, 그래야지. 드디어 레오폴드 영애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기쁘군.”

당연히 잘 알고 있지. 그 빌어먹을 마음 때문에 무려 3번이나 당신 손에 죽었으니까.

새삼 이전 생에서 그에게 당했던 일들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다. 입 안이 약초라도 씹은 듯 썼다.

나는 그 모든 걸 삼키며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

화려한 꽃잎 속에 가시와 독을 감춘 내 미소가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는 더욱 흐뭇하게 웃었다.

“영애와 레오폴드 영지의 빠른 안정을 위해 속히 결혼식을 치러야겠군. 그래야 레오폴드 공작도 편히 눈을 감을 테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부황 폐하.”

황좌 바로 아래 서 있던 황태자가 황제의 말을 두둔하고 나섰다.

“체서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상태입니다. 오래전부터 어서 빨리 레오폴드 영애와 결혼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죠.”

“형님, 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황태자의 옆에 서 있던 2황자가 수줍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황제와 같은 탐욕이 가득했다. 온정 같은 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나,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부부가 탄생하겠군요.”

황제의 바로 옆에 앉아 있던 황후가 한마디 거들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도 입을 열었다.

“축하드립니다, 황자 전하. 레오폴드 영애.”

“두 분이 결혼하시면 올해 최고의 경사군요.”

“아이는 몇 명이나 낳으실 겁니까? 당연히 둘 이상은 낳으시겠지요?”

사람들은 벌써 나와 2황자가 결혼을 한 것처럼 웃으며 떠들었다.

“내가 레오폴드 공작이 된다면 제국을 위해 힘쓰겠소.”

2황자는 이미 레오폴드 공작이 된 것처럼 굴었고, 황후는 그런 2황자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과자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차부터 마신다는 누군가의 명언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어 절정에 도달했을 무렵, 입을 열었다.

“제가 결혼할 분은 2황자 전하가 아닙니다.”

내가 툭 던진 말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조용해졌다.

귀족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바라봤고, 2황자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졌다.

황태자와 황후는 물론 다른 황자들과 황녀들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 나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

“……그게 무슨 소리지, 레오폴드 영애?”

황제가 황금색 손잡이를 부술 것처럼 세게 움켜쥐며 물었다.

“조금 전에 결혼을 하겠다고 영애의 입으로 말했을 텐데?”

“네,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만 2황자 전하와 결혼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하.”

황제가 몹시 기가 찬다는 듯 혀를 차더니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살벌하게 쏘아붙였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씀드린 겁니다.”

첫 번째 생의 나였다면, 황제가 무서워서 벌벌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 번의 끔찍한 지옥과 죽음을 경험한 지금의 내겐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마 벌써 저와 한 약속을 잊으신 겁니까, 폐하.”

나는 당당하게 황제의 시선을 받아치며 말을 이었다.

“누구와 결혼할지 제게 선택권을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랬었지.”

황제가 떨떠름해하는 게 길게 늘인 말꼬리에서 느껴졌다.

‘그러길래 말조심을 했어야지.’

미리 각서를 받아 둔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만약 각서를 쓰지 않았다면 황제는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를 뗐을 테니까.

“그 뒤로 며칠 동안 누구와 결혼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2황자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제가 영애와 결혼하기 부족하다는 의미입니까?”

2황자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따지듯이 내게 물었다. 

그러나 나는 2황자 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오로지 황제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결혼 상대로 선택한 분은 다른 분입니다.”

“내 말을 무시하는 겁니까, 레오폴드 영애!”

“조용히 하라, 2황자.”

황제가 노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2황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 공백을 채운 건 1황비였다.

“그럼 3황자인가요?”

1황비는 내가 그녀의 소생인 3황자와 결혼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야 레오폴드 공작가의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쥘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어쩌지. 난 당신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3황자 전하도 아닙니다.”

“아, 그런가요.”

눈에 띄게 실망하는 꼴이 우습고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여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황자 중 혼기가 꽉 찬 두 황자가 아니라고 하니 귀족들이 웅성거렸다.

황제도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설마 7황자는 아니겠지?”

“설마요. 제가 10살도 안 되신 어린 7황자님을 결혼 상대로 선택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도대체 누구지?”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좌중을 쭉 훑어봤다.

황태자를 지나 점점 아래로 내려가던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가장 끝이었다.

그곳엔 엄숙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방실방실 웃고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언제 자른 건지 알 수 없는 덥수룩한 머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잔뜩 뻗쳐 있었고, 옷차림도 초라했다. 흔한 장신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나이가 훨씬 어려 보이는 황자나 황녀들도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서 있는데 소년은 산만하게 손을 꼼지락거리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나는 그 소년의 앞으로 다가가 서며 말했다.

“제가 결혼할 분은 바로 이분이십니다.”

*

*

*

레오폴드 공작가.

광활한 북부 영지의 패왕이자 제국의 검이자 일등 공신 가문이었다.

5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가문의 유일한 핏줄인 나, 아델 레오폴드는 지금 독약을 먹고 죽어 가는 중이었다.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한 움큼씩 튀어나왔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탁자에 기댔다. 갈대처럼 흔들린 손짓에 탁자 위에 있던 것들이 우스스 떨어졌다.

쨍그랑-!

깨진 유리 파편이 탁자 주변에 낭자하게 퍼졌다.

몸에 독이 퍼지면서 탁자에 기대서는 것조차 힘들어진 나는 그 위에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얇은 옷자락을 뚫고 사정없이 박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신경 쓸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아, 하아…….”

불덩이를 집어삼킨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숨이 마그마 같았다.

“……어째서.”

나는 눈물 젖은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노려봤다.

“어째서…… 나한테 독을 먹인 거야?”

“아, 아가씨.”

“널 믿었는데 어째서…… 쿨럭!”

울컥, 뜨거운 핏덩이를 토하는 바람에 하려던 말을 다하지 못했다.

입 안에 감도는 비릿한 냄새에 헛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나는 유리로 까끌까끌한 바닥을 손톱으로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여자의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발발 떨리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여자는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고백했다.

“저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지 않으면 폐하께서 제 동생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또 황제인가.

또, 또, 또!

첫 번째 삶에선 황제의 명령대로 2황자랑 결혼했다가 아이를 낳자마자 황제의 사주를 받은 2황자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2황자와 황제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이를 박박 갈며 다시 시작한 두 번째 삶.

황제에게 복수하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공작도 뭣도 아닌 일개 영애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의 털끝 하나 건드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래도 황제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자 가문의 가신 중 한 명과 번갯불에 콩을 볶아 먹듯이 결혼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황제는 노발대발했고, 내 남편을 죽이고자 암살자를 수도 없이 보냈다.

나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황제가 보낸 암살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나 역시 그때 같이 죽었지만, 영원한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다시 세 번째 삶을 살아야 했다.

두 번씩이나 결혼의 끝이 좋지 않았으니 이번 생에는 결혼 자체를 하지 않았다.

누구랑 결혼하든 간에 황제가 정한 놈이 아니면 죽게 될 테니까.

황제가 정한 놈이랑 결혼해도 죽을 테고.

그러니 어서 결혼하라는 황제의 명령도 무시하고, 영지에 틀어박혀 황제에게 복수할 방법을 찾아 골몰했다.

그랬는데…… 믿었던 하녀에게 독살을 당하는 결말이라니.

빌어먹을 운명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나는 자조적으로 웃으며 눈을 감았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흑, 흑.”

여자가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사죄했지만, 진심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역겨웠다.

네 손으로 날 배신하고 죽여 놓고 가증스럽게 울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그럴 수가 없었다.

“쿨럭.”

뜨겁고 비릿한 것이 자꾸만 목구멍에 차올랐기 때문이다.

눈을 떠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바로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죽음이 가까워졌구나.’

2번씩이나 죽음을 경험해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죽는 건 몇 번을 경험해도 기분이 나쁘고 끔찍했다.

특히나 이번에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서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번에도 돌아갈 수 있을까.’

신이 바보같이 기회를 놓쳐 버린 내게 한 번 더 기회를 줄까?

만약 한 번 더 기회를 준다면 그땐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반드시 황제를, 그리고 황실을 무너뜨리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곧 까마득한 어둠이 해일처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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