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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34)화 (234/234)

혹시나 했지만, 동면이라니. 믿을 수 없어서 그를 바라보며 눈만 깜빡였다.

“동면을……. 꼭 해야만 하는 거야?”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힘을 너무 한 번에 과용하면 무리가 와. 지금 영혼이 아주 너덜너덜한 상태거든. 회복을 못 하면 죽을지도 몰라.”

카이든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아주 태연하게 대답하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동면해야 하는데?”

“글쎄. 그건 나도 장담 못 하겠어. 그래도 빨리 회복해보도록 노력해볼게.”

카이든은 여전히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 함께 미소 지을 수 없었다. 카이든을 당분간 볼 수 없다는 소리인데, 심지어는 그게 언제까지인지도 모른다.

일 년? 아니면 십 년인가? 만약 내가 죽고 나서 그가 깨어나면 어떡하지?

“네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어.”

“카이든.”

나는 놀라서 내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야. 신의 영역을 건드렸는데 이 정도 대가는 양호한 편이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마거릿.”

카이든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의아해서 질문을 하려던 찰나에 그가 입을 열었다.

“에녹하고 결혼할 거야?”

“……어?”

“알아. 두 사람 서로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나 없이 너무 잘 지내지는 마.”

마지막 대답은 정말로 카이든다웠다.

게다가 그는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의 진짜 마음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성적 사랑이란 감정을 배제해도 우리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건 그도 알고 나도 안다.

나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그에게 말했다.

“기다릴 거야. 언제가 되었든.”

그게 언제가 되었든 나는 기다릴 거다.

“그리고 고마워. 구해줘서.”

카이든은 그런 나를 보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어 놓더니 홀연히 사라졌다.

바로 내일, 동면에 들어갈 거란 말만 남기고.

* * *

마법사 협회는 무너졌지만, 대륙에서 유일하게 카이든의 마탑만이 살아남았다.

물론 마력이 없는 세상이라 마법사들은 모두 떠났다. 마력 그 자체가 되었다는 카이든을 위해서 그의 마탑만이 굳건히 자리에 남겨졌다. 에녹과 루제프의 안배였다.

카이든은 그곳의 맨 꼭대기 층에서 동면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뜻밖에도 다른 이들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각기 어떤 말들을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든의 동면을 우리는 다 함께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그가 동면에 들어가기 전에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마탑을 찾아왔는데, 마찬가지로 에녹과 아스달, 유안나, 루제프와 디에고까지 모두 마탑을 방문했다.

카이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우리를 훑었다.

“뭐야, 귀찮게 왜 다들 찾아왔어?”

“찾아오라고 알려준 거 아니었나? 로드가 의외로 관심을 좋아하나 했다네.”

아스달이 웃으며 맞받아치자 유안나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찍었다.

“로드의 마지막은 당연히 봐야죠. 가장 큰 희생을 했는데요.”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 희생은 성녀님이 한 거고. 나는 꿈을 이룬 거라고.”

카이든의 불만 가득한 대꾸에 나는 유안나를 돌아봤다.

“맞아요, 안나. 정화의 힘을 사용하면서 하신다는 희생이 뭐였어요?”

내 물음에 유안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로드가 동면에서 깨어날 때 즈음 알게 될 거예요. 제 희생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라.”

그게 무슨 소리지. 카이든을 제외하고 모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대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말게.”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에녹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카이든은 흘끗 에녹을 보고 나를 보더니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당연히 기다려야지. 둘이서만 행복하려고 했어?”

“둘이라니 서운하네. 로드, 우리는 너무 배제하고 얘기하는 것 아닌가?”

카이든의 말에 대답한 것은 에녹과 내가 아닌 아스달이었다. 아스달이 카이든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루제프와 유안나, 디에고도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더러운 마법사라는 말도 이제는 못 하겠군요. 동면은 짧게 다녀오십시오.”

루제프의 말에 카이든이 눈썹을 찌푸렸다.

“야, 따까리.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줄 아냐?”

“그놈의 따까리 소리 좀 그만 하십시오.”

“그래요, 이제 주교님도 교황이 되셨는데, 따까리는 너무하다.”

유안나가 루제프의 편을 들었지만, 카이든은 귀를 후비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큰 따까리 정도로 불러주마. 교황이든 뭐든 망할 신의 종인 건 똑같잖아.”

루제프는 결국 카이든을 교화시키길 포기한 사람처럼 해탈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하십시오.”

“아무튼 다들 나 없이…….”

카이든이 말끝을 흐리며 찬찬히 우리를 훑었다. 그가 교양 없이 우리를 향해 차례로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한다. 다들 나 없이 잘 지내지 마. 짜증나니까.”

역시나 이번에도 카이든다운 마지막 인사를 하고 그는 동면에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에녹은 황제 즉위를 마쳤고 나는 그에게 청혼을 받았다.

아스달은 헤스티아 국왕으로 즉위를 했고 디에고는 유안나와 세계 여행을 떠났다. 유안나가 했던 희생이 뭔지, 아무래도 디에고는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루제프는 교황으로서의 업무처리를 하느라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을 찾았다.

너무도 길게 돌고 돌아 겨우 이룬 행복이지만, 우리는 모두 이따금 카이든의 부재에 커다란 공허를 느꼈다.

아마도 카이든이 우리의 곁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이야기의 퍼즐이 완성될 것이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의 행복이 완성될 테니까.

언제 끝날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그렇게 그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 *

유안나가 했던 희생이 무엇인지 내가 알게 된 것은, 카이든이 깨어날 시점 즈음이었다. 그 시기에 그녀의 노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앞으로 20년은 더 생을 살다가 갈 수 있다고, 살날이 너무 많이 남았다며 유안나는 활짝 웃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거의 1년 가까이 괴로움과 죄책감에 시달리며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디에고가 그녀를 데리고 세계 여행을 하던 이유를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울며 시간을 보내기엔 유안나와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부터라도 더 많은 추억을 쌓아야 했다.

그리 결심하고 그녀와 되도록 자주 만나며 함께 하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이었다.

나는 불현듯 카이든의 기운을 느꼈다.

“카이든이 깨어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외출 준비를 하던 중에 거울 속에 비친 에녹을 보며 말했다. 셔츠에 크라바트를 메고 있던 에녹이 나를 쳐다봤다.

거울 속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게 시종을 부르라니까.”

나는 손수 그의 목에 크라바트를 메주었다. 그러자 에녹이 픽 하고 웃음을 짓더니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손가락 마디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그대가 이렇게 매어 주면 될 것을, 굳이.”

부드러운 입술 감촉에 나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그를 흘겨봤다.

“저를 시종처럼 부려먹겠다는 얘긴가요? 저 그렇지 않아도 할 일 많아요.”

“얘기가 왜 그렇게 되나. 그대와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뜻인데.”

그가 손을 뻗어 내 허리를 휘감았다.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쇄골 안으로 뜨거운 숨이 고였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고 지나간 입술이 이윽고 목 뒤에 닿았다.

촉.

목 뒤에 입맞춤을 남긴 에녹이 미처 채우지 못한 단추를 여며 준다.

“오늘도 마탑에 다녀올 건가.”

나는 뒷목을 매만지며 오른 열을 식히고자 노력했다.

“오늘은 같이 가요. 그렇지 않아도 모두에게 연락을 돌렸거든요.”

나는 지난 십년 간 매일같이 마탑에 출근했다. 카이든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그래서 어렴풋이 카이든의 기운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카이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이 세상에서 마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겠지.

에녹이 내 뺨을 움켜잡고 내 입술 위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로드가 정말 깨어날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느낌이 그래요. 만약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모두의 얼굴도 보고 좋잖아요.”

“교황과 성녀, 헤스티아 국왕을 그런 식으로 태평하게 오라가라 하는 사람은 그대뿐일 거야.”

“한 명 더 있잖아요, 여기. 란그리드 제국의 황제.”

“나는 예외지. 그대의 남편이니까.”

에녹이 내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술이 맞닿고 키스를 하려는 찰나, 카펫 위를 뒹굴거리던 은지가 달려왔다.

“잠깐만! 은지도 있어!”

녀석이 우리를 향해 양팔을 뻗으며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다.

나와 에녹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본 뒤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에녹이 은지를 안아 들었고 나는 은지의 이마에 입맞춤을 남겼다.

은지가 행복한 얼굴로 배시시 미소를 짓는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행복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카이든은 어둠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너무 강한 힘을 사용한 부작용으로 찢기고 너덜너덜해진 영혼이 이제야 가까스로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지난날을 회상하고 또 회상했다.

마거릿과 함께했던 나날들, 그리고 에녹이나 아스달 일행과 함께 시련을 극복해낸 나날들.

그 모든 고통을 겪고 난 후에야 그는 지금과 같은 완벽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가 지금껏 버티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음을 잘 안다.

마력이라는 힘 그 자체가 되었기에 이제 정말로 더는 그를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마탑의 봉인진 안에서 그렇게 고요히 눈을 떴다.

코끝에 바람이 스쳤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도의 선선한 바람. 부드러운 꽃향기가 풍겼고 창문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카이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을까.

1년?

아니야, 그건 너무 짧다.

5년?

그건 희망사항이고.

10년? 20년?

어쩌면 100년, 그 이상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마거릿은? 혹시 그가 마거릿은 물론 에녹도 따까리도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는 시간에 깨어난 것이라면?

카이든은 고요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마탑을 내려왔다. 사람이 없었다. 그가 동면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마탑에는 남은 마법사들이 몇 명은 되었었는데.

‘하긴, 마력도 사라진 마당에 마탑에 남아있을 마법사들이 있을 리가.’

이젠 그들을 마법사라고 부를 수도 없을 텐데.

카이든은 덤덤히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이 마탑이 끔찍하게 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시. 그는 어디선가 온기를 느꼈다.

마탑에는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꼭 마치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마탑에 온기를 불어넣고 관리를 한 것처럼

그 따뜻함에 이끌려 그는 천천히 마탑을 내려갔다. 혹시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시간이 그리 오래 흐른 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으로 내려왔지만, 역시나 마탑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공허한 공간 속에 그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마탑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게 보였다.

“카이든?”

한 여자가 문을 열며 그를 발견하고 놀라서 멈춰 섰다. 그녀의 등 뒤로 한 남자도 따라 들어오다가 놀라 자리에 멈췄다.

금실로 엮어 만든 것처럼 눈부신 백금발이 시야에 넘실거린다. 그를 마주하는 바다색을 닮은 파란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꿈에도 그리던 얼굴과 목소리. 지난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보고 또 보던 그리움이 실체가 되어 그의 눈앞에 있었다.

“카이든! 깨어났구나!”

마거릿이 그에게로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체취가 풍겨온다. 사람의 따뜻한 온기가 카이든을 감쌌다.

멍하니 그녀에게 안겨 있던 카이든은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끌어안았다. 그의 시야에 에녹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 십 년 정도 걸렸나. 일찍 돌아 와줘서 고맙군.”

에녹의 덤덤한 인사에 카이든은 입을 꾹 다물었다. 기다려달라는 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십 년이 흐르고 이십년이 흐르고 수없는 시간이 흐르면 어쩌면 모두가 그를 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사실 그는 기대를 하고 있었던가 보다. 모두가 자신을 기다려줄 것이라고.

카이든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울음을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카이든은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태어나서 그렇게 울어본 것은 결단코 처음이었다.

인생의 시작은 비참하고 괴롭고 힘들었다. 그 과정도 결단코 쉽지 않았지만, 끝내 그의 인생은 완벽했다. 이보다 더 없을 충만한 사랑으로 그는 행복했다.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에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을 이토록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구나.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기분인지, 그는 지금의 행복만으로도 영원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는 카이든을 품에서 떼어낸 마거릿이 그에게 말했다.

“나가자. 다들 널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우리 모두의 행복이 저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카이든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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