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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33)화 (233/234)

듣기로 로하데 후작의 혈서에서 황제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고 하던데.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녹을 응원하는 것처럼 보이던 황제가 사실은 모란꽃 세력이었다니.

로하데 후작이 우리 모두의 눈을 피해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황제의 원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모란꽃 세력과 우리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던 모양이다. 누가 되었든 이기는 쪽의 손을 들어줄 생각이었으며, 란그리드 남부 해안가에 직접 찾아왔던 것도 로하데 후작이 가진 혈서를 회수하려던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 플로네 공작인 우리 아버지가 직접 지원을 나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결국은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황제가 좋은 사람이 아닐 거라는 건 예상했다. 그건 어쩌면 에녹이 가장 잘 알고 있던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껏 자신의 자식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에녹을 그 지경으로 방치한 사람 아니던가.

에녹은 진실을 확인하고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걸 예견했다는 듯이.

어쩌면 모란꽃 세력의 처형은 에녹이 가진 과거와 아픔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자리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에녹 뿐 아니라, 카이든과 아스달, 유안나를 비롯한 지난 시간동안 그들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억울함이 해소되는 순간일 것이다.

처형식은 란그리드 광장에서 진행됐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모여들었기 때문에 아주 북새통이었다.

오랜 세월 마력에 기대어 살아왔기에 그 힘이 사라졌을 때 세상의 혼란은 엄청났다. 그렇기에 마력이 없어진 원인이 모란꽃 세력이라는 점이 세간에 알려지자 이들에 대한 대륙 전체의 분노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폭동이 일어날 뻔한 것을 연합국 대표들이 모란꽃 세력을 공개처형하는 것으로 진정시켰다고는 들었다.

사람들의 분노는 모두 이 모란꽃 세력에게로 쏠렸다. 공공의 적인 셈이다.

고문을 심하게 당한 건지, 단상에 줄줄이 올라오는 이들의 몸이 성치 않았다.

그곳에 선 이들이 란그리드 제국의 황제 부부와 교황과 로하데 후작 같은 수많은 고위 인사들이라는 것이 대중의 분노를 더욱 들끓게 만들었다.

단상으로 올라오는 모란꽃 세력의 얼굴이 보이자 사람들이 극도로 흥분했다.

죽여라! 죽여라!

나는 인파 속에서 분노하고 흥분한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함성에 잠시 귀를 틀어막았다. 단상 위로 에녹을 비롯한 연합국 대표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뒤로 좀 오게.”

사람들에게 치이고 있는 날 아스달이 잡아 끌었다. 드레스 주머니에 들어있던 은지가 불편한지 꿈틀거린다.

이윽고 모란꽃 놈들이 차례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것이 보였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아악!”

로하데 후작은 끝까지 발악을 하며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근처에 서 있던 기사의 검에 직접 목이 잘려 죽음을 맞이했다.

실로 깔끔하고도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제나스라는 큰 산을 넘었기 때문인지 정작 모란꽃 세력이 죽는 데는 큰 감흥이 없었다.

물론 아스달이 손으로 눈가를 가려주는 덕에 직접적으로 목이 잘리는 장면을 보는 건 피할 수 있었다.

“허무하네요. 저런 놈들 때문에 천년 동안 그 많은 사람이 죽었다니.”

“원래 세상의 이치란 게 그런 거지. 대단해 보이는 것도 막상 열어보면 별 것 없는데, 사람들은 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살지 않는가.”

아스달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단두대를 노려보는 그의 표정을 보자니 속마저 덤덤하지는 않았던 듯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게 앞으로의 내 꿈일세.”

아스달의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하께서 만드실 그 세상, 저도 궁금해요.”

내 말에 아스달이 나를 돌아봤다.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요히 나를 쳐다봤다.

뭐지. 왜 저렇게 느끼하게 쳐다봐.

부담스러워서 한 마디 하려는데, 때마침 아스달이 입을 열었다.

“전에 내가 했던 말, 아직 유효해.”

“전에 했던 말이요?”

“헤스티아에 왕세자 자리가 비어…….”

“어머, 여기 계셨군요?”

아스달의 말을 끊고 유안나가 나타났다. 그녀가 내게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며 해맑게 우리를 보았다.

“두 분 무슨 얘기 나누던 중이었어요?”

그리고 아스달이 그런 유안나를 흘겨 보며 물었다.

“알고 끼어든 것 아닌가?”

“글쎄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대답한 유안나가 우리에게 물었다.

“루제프 주교는 지금 즉위식을 준비하러 갔어요. 저희도 이만 가봐야죠.”

그 물음에 다시금 단상 위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에녹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나도 따라 미소가 나왔다.

“흠……. 확실히 에녹을 이길 수는 없겠군.”

내 옆에서 아스달이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건 살짝 무시하자.

아무튼 간에 천 년 동안의 악행을 저질러 온 모란꽃 세력의 말로는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아스달의 말대로 세상의 이치란 그런 것이겠지. 사실 대단한 악인 것처럼 보여도 막상 열어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많았다.

나는 이제 고작 이런 놈들 때문에 받은 고통은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대신에 시련을 함께 겪으며 성장한 내 자신을 돌아봐야겠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 남은 이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기에도 짧을 테니까.

모란꽃 세력에 대한 처형이 있고 교황의 즉위식이 바로 이어졌다. 악의 처단 뒤에 있는 종교 의식이라서인지 사람들의 반응도 대단했다.

연합 대표들이 란그리드 제국에 때마침 모여 있는 시국이었으므로 교황의 즉위식은 란그리드 제국에서 치러졌다.

마법사 협회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는데, 교황청은 그렇지 않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물론 교황청의 신뢰와 권위는 땅에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차라리 이 세상에서 종교가 사라질 수 없다면, 그들의 수장이 루제프인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란그리드 수도에 있는 헤임브리지 대신전에서 교황 즉위식이 치러졌다.

신성력은 사라졌지만 유안나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성녀로서 새로 교황이 된 루제프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여 나는 아스달과 디에고와 함께 대신전에서 루제프가 입장하기만을 기다렸다.

“내가 남자한테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루제프 주교, 아니 교황에겐 잘 어울리는 단어 같군.”

아스달의 중얼거림에 나는 그제야 입구 쪽을 돌아봤다. 그곳엔 흰색 수단을 입고 그 위에 단정한 대례복을 입은 루제프가 교황관을 머리 쓴 채로 서 있었다.

평소 교황 즉위식에서 보던 화려한 차림은 아니었지만, 그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외모 탓인지 이 의식이 한층 더 고결하고 성스러운 의식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대주교 두 명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간 루제프는 교황으로 거듭나는 신성한 세례 의식과 열두 대주교들의 순명 서약을 받으며, 정말로 교황이 되었다.

그간의 성대한 교황 즉위식과는 달리 아주 수수하고 소박하게 치러진 즉위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새로운 교황의 추대로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란 사람들의 기대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루제프라면, 잘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껏 이보다 더 한 시련도 무사히 극복해왔으니까.

* * *

즉위식이 끝나고 아스달은 헤스티아로 바로 돌아갔다.

디에고와 유안나, 루제프와 인사를 나눈 뒤에 내가 마차에 올라탔을 때였다.

“아가씨, 저는 마부석에 탈게요. 편히 쉬어가세요.”

바네사가 나를 배려하며 마부석에 올라탔다. 덕분에 나는 지친 몸으로 혼자 마차에 앉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도 버네튼에 있는 플로네 공작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멍하니 마차 창밖을 보고 있는데, 돌연 마차가 멈춰 섰다.

“어……?”

마부석에서 바네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리다가 끊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마차 문을 열고 나가려는 찰나에 누군가가 마차 안으로 들어섰다. 먼저 길게 자란 은발이 시야에 들어온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카이든?!”

어깨 아래로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카이든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이 붉은색과 황금색을 오가며 잠시 반짝거리다가 이내 차차 붉은색으로 돌아왔다.

“마거릿, 몸은? 괜찮아?”

그는 마치 우리가 어제도 만났었던 것처럼 내게 안부를 전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한숨과 함께 머리카락을 헤집던 그가 고민하는 얼굴로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물었다.

“안아 봐도 돼?”

“어?”

“대답이 너무 늦잖아.”

그가 내게 다가와 나를 깊게 끌어안았다. 아니,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대답이 느리다고 하면 어떡해?

“정말 카이든이 맞아?”

나는 그에게 안겨 있는 채로 되물었다. 방금 눈색도 이상했고 머리카락도 너무 길게 자랐다.

요즘 들어 믿기지 않는 일들의 연속이라 나는 묻고 또 물어야 했다.

“하아…….”

카이든은 대답 대신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내 체취를 맡으며 하나하나 속으로 되새김질을 하듯이.

“보고 싶었어, 마거릿.”

카이든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닿았다. 이 체취, 목소리, 날카로운 말투. 이건 분명 카이든이 맞다. 나는 긴장한 채로 그에게 안겨 있다가 다시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식간에 긴장이 풀어진다. 다행이다. 카이든도 무사했다. 정말 다행이다.

“너야말로 몸은 괜찮아?”

나는 그의 어깨를 잡아 내게서 떼어내고 안색을 살폈다.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만져보았다. 그러자 그가 내 손바닥에 뺨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걱정했어.”

내 말에 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마거릿, 나는 여전히 네가 너무 좋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카이든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짙은 시선이 고요히 내 시선 끝에 고인다.

카이든은 동요가 없었다. 그는 처음과 끝을 모두 예상한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대답하지 마, 답은 나도 알아.”

카이든은 내 대답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의 뜻대로 입을 다물었다.

“이런 결말은 어쩌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걸지도 모르겠어. 로하데 가문과 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야겠다는 집념 때문에, 다른 건 생각할 여유가 없었으니.”

“예정된 결말이 어디 있어.”

그러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카이든이 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거릿, 그래도 나는 지금 만족해. 내 인생에서 부족한 것들을 모두 채웠거든.”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그런 식으로 웃는 건 처음 본다.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게.

카이든이 행복해하는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다니. 기쁜 일인데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난 제나스가 해내지 못한 걸 해냈어.”

“들었어. 대단해, 정말이야. 멋있어.”

“이제야 비로소 완벽한 나 자신이 된 기분이야.”

카이든이 환히 웃으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제 동면에 들어갈 생각이야.”

그리고 이어진 말에 나는 동작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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