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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32)화 (232/234)

“걱정했어요.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내 격한 반응에 에녹이 처음엔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단단한 팔뚝이 내 허리를 휘어 감았고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닿는다.

“이런 격한 환영 인사는 좋은데, 그대의 가족들이 놀라 쓰러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

그 말에 나는 뒤늦게 정신이 들어서 에녹에게서 떨어졌다. 등을 돌리자 역시나 나를 따라 뛰어온 가족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미처 준비할 시간이 모자라 이런 모자란 모습을 보였군요.”

“급히 방문한 제 탓이니 괜찮습니다.”

어머니의 사과에 에녹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어쩐지 내가 철없는 귀족 영애가 된 것만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닌가?

“저……, 저희 둘이 따로 먼저 얘기 좀 해도 되죠?”

내 물음에 어머니와 이니스, 그리고 로즈메리가 뚝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황궁으로 출근하셔서 에녹과의 데이트를 크게 방해할 사람은 없었다.

“어?”

“어어, 그럼.”

“응접실로 갈 거니?”

“아니, 정원으로 나갈게. 산책도 좀 할 겸.”

세 여자의 물음에 나는 에녹의 손을 잡고 대답했다. 에녹이 피식, 웃음 짓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때늦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래 누워만 있었는데 산책도 필요하지.”

“다녀오렴.”

어머니와 이니스의 대답을 듣고 나는 에녹과 함께 정원으로 나갔다.

포근한 봄에서 싱그러운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이었다. 나는 에녹과 함께 푸릇하고 화사한 정원을 거닐며 눈물 나는 평온함을 느꼈다.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오다니.

나는 잠시 감격하다가 자리에 멈춰 서고는 에녹을 돌아보며 물었다.

“몸은 정말 괜찮아요?”

나를 따라 자리에 멈춰선 에녹이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고요히 쓸어 넘겼다.

“그대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제는 워프게이트를 쓸 수가 없어서 마차를 이용해야 했지.”

에녹의 손가락이 이마를 지나 내 뺨을 쓸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꼈다. 엄지가 부드럽게 뺨 위를 배회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짙어진 시선으로 나를 지긋하게 바라보는 에녹이 보였다.

“저는 괜찮아요.”

에녹의 입가에 붓으로 그린 듯한 미소가 번졌다.

“나는 사실 그대와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겨우 그대의 마음을 확인한 순간 아니었나. 그 상태로 간직한 채 죽는 것도 낭만적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지.”

“낭만은 무슨! 죽는 게 무슨 낭만이에요.”

내 책망 어린 말에 에녹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기색이 한가득 깔려 있었다.

그가 이렇게 개구진 얼굴로 크게 웃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 나는 멍하니 그가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에 대한 미안함이 물밀 듯이 밀려와 나를 잠식했다. 나는 금세 우울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기분 상했나, 실언이었어.”

내 시무룩한 얼굴을 보고 에녹이 당황했는지 안절부절하며 내게 사과했다.

“그게 아니라……. 미안해요. 너무 늦게 깨달아서. 에녹을 좋아하는 마음이요.”

그렇게 말하며 난 에녹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러나 에녹은 이런 내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으로 나를 열렬히 바라볼 뿐이었다.

다정하게 내 얼굴을 살피는 그의 눈이 곱게 휘어져 있다.

“미치겠군.”

그가 아주 좋아죽겠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번엔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우면…….”

그가 내게로 조금 더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뺨과 턱 선을 커다란 손으로 한꺼번에 감싸고는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꼭 마치 입맞춤을 할 듯이 다가오는 얼굴을 보고 나는 놀라 숨을 멈췄다.

“참을 수가 없잖아.”

“네?”

그러나 내 반문에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지 에녹은 내 입술 위로 짧게 입맞춤을 남겼다.

확 달아오른 얼굴로 나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정원엔 아무도 없었고 다시 바라본 에녹은 팔짱을 낀 채로 아주 느긋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나른하게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나는 사랑한단 말이 더 좋은데.”

“에, 에녹!”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능글맞았었나? 내 당황한 외침에 그가 즐겁다는 얼굴로 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웃음이 잦아든 뒤에 에녹이 말했다.

“아, 에녹. 그런데 그 얘기 들으셨어요? 카이든이…….”

“로드는 무사할 거다.”

“네? 어떻게 알아요? 만났어요?”

“돌아와서는 보지 못했고. 차원의 틈에서 우리를 데리러 온 그를 봤어. 그대는 그때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가 곤란한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어쩌면 생각을 더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도 힘을 회복해야 할 거다. 로드에게도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녹의 말에 나는 유안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동면 얘기를 했다고 했던가.

그는 왜 동면을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정말 인간을 벗어난 걸까? 그렇다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일까?

궁금한 것이 많은데.

그렇게 잠시 카이든을 생각하며 서 있을 때, 정원 안으로 유안나가 들어섰다.

“두 사람, 여기 있다고 해서 왔어요. 다들 메그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거든요. 아스달 저하와 루제프 주교님, 디에고 경도요.”

유안나의 품에 은지가 안겨 있었다. 예쁜 친구가 생겨서 좋다고 하더니 유안나를 아주 잘 따른다.

“전하께서는 움직일 수조차 없이 바쁘다고 들었는데, 용케 황궁을 빠져나오셨네요?”

“마거릿이 깨어났다는데 황궁에 쳐박혀 있을 수는 없지. 하지만 다시 돌아가긴 해야 해.”

유안나의 말에 가볍게 대답한 에녹이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다짐을 하듯이 내게 말했다.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기다리다니? 뭘?

“그 뒤에 그대에게 정식으로 청혼할 테니.”

나는 이번에도 어벙한 얼굴로 붕어처럼 입만 달싹였다. 청, 청혼이라니!?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다가 이마에 키스했고 옆에 서 있던 유안나가 썩은 사과를 씹은 것 같은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이만 돌아가야 해서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겠군. 대신 안부 전해주게.”

“그럼요. 힘드시겠지만, 어쩌겠어요. 시국이 이런 걸. 힘내세요.”

유안나는 약 올리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모를 인사를 에녹에게 남겼고 에녹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녹은 우리에게 인사를 남긴 뒤에 황궁으로 다시 떠났다. 그리고 나와 유안나, 그리고 은지는 아스달 일행이 기다리고 있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영애?”

응접실의 문을 열자마자 꽃향기가 솔솔 풍겨왔다. 남정네 셋이서 테이블에 둘러 앉아 홍차를 마시고 있었던 모양이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발견한 루제프가 벌떡 일어나 내게 달려왔다. 그가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를 끌어안은 몸이 파르르 떨린다. 이어서 아스달과 디에고가 일어나서 내게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신 겁니까.”

“정말이지, 영애는……. 사람 심장을 아주 들었다놨다 하는 재주가 있어.”

디에고와 아스달이 차례로 내게 말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웃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아스달이 나와 유안나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하다가 은지를 발견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자, 일단 앉지 앉아. 힘들 텐데. 오. 이 녀석도 왔군?”

“이 녀석 아니고 은지야!”

유안나의 품에 안겨 은지가 외쳤다. 그러자 루제프와 디에고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녀석을 쳐다봤다.

은지가 인간화를 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미처 설명할 시간이 없기는 했었지.

“그래, 은지. 너는 미친 마법사를 삼킨 건 괜찮더냐.”

아스달이 신기하단 얼굴로 은지를 관찰하며 물었다. 은지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었어!”

아마도 제나스가 맛있었다는 게 아니라, 제나스가 가진 마력석을 뜻하는 걸 테다. 그러나 숨겨진 의미까지는 모르는 루제프와 디에고, 아스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 맛있는 식사를 한 모양이군.”

아스달이 당황한 얼굴로 은지의 시선을 회피했다.

“다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상황이 정리되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아스달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혼란을 수습하느라 정신없긴 하지.”

“저하께선 왕국에 안 돌아가시고 란그리드에 이렇게 눌러 앉으셔도 되는 거예요?”

“내 능력을 뭐로 보고. 아직은 괜찮다. 하지만 시국이 이러니 곧 돌아가긴 해야지.”

아스달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더니 나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영애의 마력은 멀쩡한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마력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나.”

유안나가 곤란하다는 듯 아스달을 향해 당부했다.

“상황을 다들 알고 있겠지만, 마거릿이 마력을 갖고 있다는 건 저희만 아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당연한 소릴. 어차피 우리에겐 더 큰 마력을 가진 이가 있지 않나.”

아스달이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카이든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조용히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루제프를 바라봤다.

“교황청 상황은 어때요? 신성력이 사라졌잖아요. 교황도 그렇게 되고.”

나를 보며 여전히 울먹거리고 있는 루제프를 대신해서 유안나가 대신 대답했다.

“주교님이 교황으로 추대될 거예요. 신성력이 없는 세상의 첫 교황이죠.”

그 말을 듣던 아스달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인간 세상에서 종교가 사라지긴 어렵지 않을까 싶긴 해. 이럴 때 일수록 다들 무언가 믿고 싶어 하거든. 차라리 루제프 주교가 교황이 된다니 다행인 일 아닌가.”

오. 교황이라니. 그럴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너무도 신기했다. 우리 루제프가 교황이 된다니. 게다가 듣기로 아스달도 곧 헤스티아 국왕으로 즉위를 한다고 들었다.

나는 과묵한 디에고가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홍차를 마시는 것을 보다가 그에게 물었다.

“경은 괜찮나요? 마르셀 경은요?”

내 물음에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무사합니다.”

“덕분이라니, 민망하네요. 그간 란그리드 남부에서 고생 많으셨어요. 아버지를 도와주셨다면서요.”

“제가 외려 도움을 받았습니다. 플로네 공작 각하께서 그렇게 뛰어난 검술 실력을 보유하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디에고가 당혹스러운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도 몰랐어요. 아버지께서 그런 검술 실력을 갖고 계신 줄.”

“아무튼 간에 내일모레 있을 처형식에는 함께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그것까지만 보고 헤스티아로 떠나려 하네만. 그날 우리 주교님 즉위식도 있다지?”

아스달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축하드려요. 그날은 바쁘실 테니 따로 인사드리진 못할 것 같아서.”

내 말에 루제프가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축하인사를 필두로 아스달과 유안나 디에고의 축하가 이어졌다.

“내가 즉위할 때도 다들 참석해야하네. 초대장 보낼 거고. 못 오는 사람은 내가 일기장에 적어놓고 두고두고 기억하겠어.”

“일기도 쓰세요?”

“내가 나름 섬세한 남자야.”

“맞아요. 저희 중에 유일하게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시는 분이니까요.”

생각해보니 귀족영애인 나도, 성녀인 유안나도 손수건을 들고 다니지 않았다. 물론 나와 유안나는 그 점을 전혀 개의치 않아했고 그렇다고 챙겨 다닐 생각은 없었다. 정 챙겨야 한다면 바네사에게 부탁하지 뭐.

“아, 아니 손수건은 기본 중의 기본인 소양……. 하. 말을 말지 그래.”

아스달의 체념어린 대답에 우리는 함께 웃고 말았다.

“이렇게 마음 편히 웃는 날이 오다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루제프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아스달이 크게 웃으며 그의 등허리를 쳤다.

* * *

플로네 공작성에서 만난 이후로 에녹은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가 혼란스러운 시국을 정리하느라 너무도 바빴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는 그에게 꼬박 편지를 전해 받았다. 장거리 연애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다행인 것은 나도 몸을 회복하기 위해 요양 중이었고 새로운 세상에 적응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에녹을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너무 불편해. 마법이 있었다면, 영상구로도 회의 참석이 가능했을 텐데.”

황궁으로 매일같이 출근 준비를 하던 이니스가 기어코 힘든 기색을 내비쳤다. 중요하지 않은 안건도 보안을 위해 직접 황궁에 출근을 해서 회의를 나눠야 했기 때문이다.

불편한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툭하면 신문 발간이 늦어진다든가, 편지가 송부되지 않는다든가 하는 사소한 일부터 마력석으로 움직이던 기차가 운영을 중지하기도 했다.

마법과 신성력으로 유지되던 가게들도 대거 폐업하면서 실업자가 늘어났고 종국엔 경제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뭐, 앞으로 에녹을 비롯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남았다는 소리다.

아무튼 그렇게 세상에 적응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모란꽃 세력의 처형식 날이 밝았다.

놀라운 것은 처형을 당하는 사람 중에 란그리드 제국의 황제도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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