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31)화 (231/234)

* * *

큰 힘을 갖기 위해선 그만한 대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카이든이 포기한 것은 인간의 육체였다.

그에게 육체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력을 가진 자이자, ‘마력’ 그 자체가 되었다.

차원을 지배하기 위해 그것을 무너트려야만 했던 제나스와 달리, 온전한 힘을 가진 카이든은 어렵지 않게 차원의 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차원 너머에서 마거릿과 에녹의 존재를 찾았다.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차원의 틈에서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마거릿과 에녹을 발견했다.

찰박.

카이든은 천천히 그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녹이 마거릿과 은지를 끌어안은 채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 지워질 듯 희미한 형체가 되어.

그는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나온 빛이 사라져가는 이들 위로 폭포처럼 쏟아진다.

영혼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진다. 아마도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힘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버텼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그리고 마거릿과 에녹을 찾아 차원을 넘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힘든 일이 있었는가.

이대로 포기하고 분에 넘칠 힘에 잡아먹힐 수야 없다.

그렇게 마침내 모든 힘을 소진했을 때 즈음 에녹이 먼저 눈을 떴다. 희미해지던 영혼이 다시 짙어지던 와중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신음하며 고개를 들었다. 카이든과 시선이 마주친 그는 주변을 한 번 훑고 상황 파악을 한 뒤에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로드가 방법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

“아니었으면 어쩌려고.”

카이든의 다소 불량한 대답에 에녹이 마거릿을 안은 채 몸을 일으키고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생각만 했다고 했지, 기대를 했다고 말하진 않았는데.”

“XX, 뭐요?”

“이대로 마거릿과 함께 죽음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카이든은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마거릿은 괜찮습니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존재가 지워지고 있었어. 아마도 이곳에 있을 영혼들이 아니어서 그랬겠지. 조금만 늦었으면, 나도 마거릿도 완전히 소멸했을 거야. 이 틈 안에서.”

에녹은 고요한 눈빛으로 카이든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군. 찾아와 줘서.”

카이든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리곤 가만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마거릿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무리 마거릿이 좋아도 목숨을 버리다니. 욕 한 번 해도 됩니까.”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든은 대답을 듣지 않고 욕설을 뱉었다.

“미친놈.”

물론 에녹은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얼굴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는 로드는 마거릿을 위해서 인간으로 남을 것을 포기한 것 아닌가.”

에녹은 카이든에게서 풍기는 기이하고 엄청난 마력 기운을 읽고 그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조금은 짐작했다.

“포기가 아니라 저도 은지 녀석처럼 진화한 거라고 해둡시다.”

카이든은 에녹의 품에 안겨 있는 마거릿과 은지를 훑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녹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거릿의 부재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고 있겠군.”

“마거릿뿐이겠습니까.”

카이든의 말에 에녹이 잠시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따까리도, 성녀님도, 디에고 경도, 그리고 그중에서도 특히 전하의 ‘친우’이신 아스달 저하께서 전하를 ‘애가 타게’ 기다립니다.”

카이든은 그렇게 대답한 뒤 잠시 심호흡을 하고 이어서 말했다.

“전하를 극진하게 모시고 따르는 전우들도 있지 않습니까. 란그리드 제국의 기사들이요.”

묵묵히 그의 말을 듣던 에녹의 눈에 잠시 이채가 서렸다. 카이든은 잠시 고민하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있고요. 연적으로 당신을 싫어한 거지. 인간으로서는 인정합니다.”

뭘 인정한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카이든은 멋쩍은 얼굴로 대충 얼버무리고는 그에게 고갯짓을 했다.

“그러니 가시죠, 집으로.”

* * *

플로네 공작 성,

나는 내 방 침대에서 깨어났다.

돌아오니 보인 것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울고 있는 유안나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젠장, 꿈인가? 사실 차원 너머에 갔던 것도 에녹을 만났던 것도 다 꿈인 건가? 이쯤 되니까 뭐가 꿈이고 현실인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엉엉 우는 유안나를 얼떨떨한 얼굴로 달래던 중에 나는 침대 맡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어 있던 아이를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은지가 방방 뛰었다.

“언니! 언니!”

“은지? 은지야 네가 한 거야? 이거 꿈이니?”

“응? 꿈 아니야!”

“집으로 돌아온 거, 그럼 네가 한 거야?”

“우움, 그거…….”

은지 대신 대답을 한 것은 유안나였다.

“로드께서 마거릿과 전하를 데려왔어요. 직접 차원을 넘어서요.”

“네……?”

혼란스러워서 반문했던 나는 금방 정신을 차리고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지금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떻게요? 마력은 전부 사라졌잖아요. 차원의 균열은 괜찮아요? 저와 은지가 여기 있으면 균열이 안 닫히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차원을 넘는 건 제나스도 못하던…….”

눈물을 닦아내던 유안나가 당황하는 나를 진정시키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균열은 제가 분명히 메웠어요. 차원을 넘는 건 로드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요. 로드가 각성을 했거든요.”

“각성이요?”

“제가 봤을 땐…….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것 같더라고요.”

“카이든은 그럼 지금 어떻게 됐어요?”

“메그를 데려온 직후에 사라져서 로드의 행방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행방을 모른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카이든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때 유안나가 생각을 더듬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얼핏 사라지기 전에 동면 얘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동면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 지워진 영혼들을 다시 데려왔잖아요. 그것도 마력을 가진 상태로. 마력을 가진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하지 마세요. 괜히 시끄러워지니까.”

나는 유안나의 말에 그제야 내 몸에 여전히 마력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은지가 계속해서 인간화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차원이 멀쩡해요. 이게 로드의 힘인 거죠. 아마, 신의 영역을 건드렸기 때문에 동면에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자세한 건 로드에게 직접 들어야 할 것 같은데 행방을 모르니…….”

“그럼 에녹은요? 저와 함께 있었는데 에녹은 어디…….”

똑똑.

“성녀님, 마거릿은 좀 어때요?”

그때 방문을 열고 로즈메리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초췌한 몰골을 한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거릿?!! 마거릿! 세상에! 마거릿!”

로즈메리가 비명처럼 나를 부르며 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나는 펑펑 우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안나가 웃음을 지으며 로즈메리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로즈메리의 요란한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가 머리를 들이밀고 나타났다. 바네사였다.

“아가씨!”

바네사 역시 눈물 바람이 되어 내 침대 맡에 매달려 엉엉 울어버렸다. 나는 눈물바다가 된 방안을 둘러보며 잠시 당황했다.

툭. 투둑.

그리고 문가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더니, 이번엔 스튜가 든 쟁반을 떨어트린 이니스와 어머니, 아버지가 보였다.

“아니,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내가 직접 네게 가져다주고 싶어서…….”

“우, 우리 망아지……!”

세 사람이 곧장 내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두 자매와 어머니,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바탕 눈물을 쏟았다.

어느 정도 진정된 후, 유안나가 내게 그간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내가 사라진 직후, 에녹이 생명을 바쳐 나를 따라왔고 각성한 카이든이 곧장 우리를 찾으러 차원을 넘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사라진 카이든은 기어코 나와 에녹을 찾아내 데려온 뒤,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이후 나는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나흘 내리 잠만 자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한, 유안나가 정화한 세상엔 마력이 사라지고 그간 마력과 마법으로 해오던 모든 업무가 마비된 탓에 대혼란이 찾아왔다고 한다.

나보다 먼저 깨어난 에녹은 플로네 공작인 우리 아버지, 그리고 빌터하임 공작과 함께 사람들을 안정시키느라 애를 쓰고 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공개처형은 나흘 뒤로 정해졌다는 소식까지 듣고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깨어나자마자 물밀 듯이 밀려온 너무 많은 정보와 소식에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녹은 그럼 멀쩡하다는 거죠? 분명 저와 함께 차원 너머에 있었는데.”

“함께 왔어요. 메그와 달리, 그분은 회복력이 괴물 같아서…….”

유안나가 뺨을 긁적이며 웃었다. 뭐가 됐든 에녹은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조금 전까지 목구멍을 콱, 막고 있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문제는 카이든이다. 내가 당장에 카이든을 찾으러 가겠다고 말하자 유안나는 물론 가족들이 모두 나서 나를 말렸다.

“막 일어났는데 너무 멀리 나가는 건, 몸에 무리가 갈 거예요.”

“그래도…….”

내가 반박을 할 기미를 보이자 다섯 여자가 모두 나를 극구 말리며 침대에 눕혔다. 그런데 아직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탓일까. 침대에 강제로 눕히자마자 다시금 파도처럼 졸음이 밀려왔다.

유안나가 내 어깨를 토닥인다.

그러고 보니 유안나도 정화의 힘을 사용하려면 무언가 희생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녀의 희생은 무엇이었을까.

그런 불안한 걱정을 하는 중에도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나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일어나면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하면 어떡하지.

* * *

다행히도 꿈이 아니었다.

충분히 잠을 자고 나서 일어나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나는, 에녹이 공작 성에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급히 공작성의 입구까지 뛰어나갔다. 등 뒤로 가족들의 걱정 가득한 외침이 들려왔지만, 내 신경은 오로지 에녹에게로 쏠려 있었다.

복도를 내달려 로비의 중앙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공작성의 입구에서 시종장에게 재킷을 건네고 있는 에녹이 보였다.

“에녹!”

크라바트를 비틀며 고단한 한숨을 쉬고 있던 에녹이 놀란 듯 내 쪽을 쳐다봤다.

정말 에녹이다. 진짜 에녹. 살아있는 에녹.

나는 단숨에 그에게로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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