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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30)화 (230/234)

뭐가 됐든 X됐다는 거다. 차라리 죽음을 주지. 이렇게 되면 살아도 산 게 아니지 않은가.

나는 나직한 목소리로 은지를 불렀다.

“은지야.”

“우움. 언니?”

은지가 졸린 얼굴로 눈을 뜬다. 나는 녀석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넌 어떻게 여기 온 거야? 나 따라왔어?”

내 물음에 은지가 끔뻑끔뻑 졸며 대답했다.

“응! 은지는 언니 가는 곳이 어디든 따라가. 은지랑 언니는 연결되어 있어.”

아마도 은지가 내게 각인한 마물이라서 그런 걸까. 내가 차원 밖으로 끌려 나갈 때 녀석도 함께 끌려나온 모양이다.

“예쁜 친구가 쓰는 힘, 은지는 아팠어. 그래서 여기가 좋아.”

예쁜 친구라는 게 유안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사용한 정화의 힘이 신성력이기 때문에 은지가 고통을 느꼈던 모양이다.

“너 나쁜 아저씨 먹은 건 괜찮아?”

내 물음에 은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쁜 아저씨, 못생긴 돌 냄새나서 괜찮았어! 은지 더 힘났어!”

아무래도 제나스가 가진 마력석 때문에 오히려 그를 먹어치운 게 은지에게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너 힘 생겼으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은지가 제나스의 마력석까지 전부 먹고 진화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물어봤지만, 은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못해.”

그건 못한다니, 아쉽네. 하지만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기에 빠르게 체념했다.

품 안에 안긴 은지가 몸을 꼼지락거린다. 나는 다시 녀석을 내려다봤다.

“미안하다, 은지야. 힘들지?”

“하나도 안 힘들어. 은지는 특별해서 괜찮아.”

은지가 배시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은지는 언니랑 운명을 같이해. 은지가 언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어.”

“처음 본 순간?”

“응. 섬에서.”

“너 원래는 아나콘다 마물의…….”

나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은지는 강렬한 확신이 담긴 얼굴로 내게 말했다.

“아니야. 은지는 달라. 언니랑 은지는 특별하잖아.”

이번에도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고 복잡한 심경으로 은지의 말간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자 은지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차린 얼굴로 대답했다.

“알아. 은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은지는 언니 만나고 변했어. 힘 생겼어. 언니가 은지 언니고 엄마고 세상이야.”

은지의 멋진 말에 나는 울컥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그만 입을 꾹 다물었다.

“언니가 가진 특별한 마력이 은지를 특별하게 한 거야. 은지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야. 언니처럼. 고마워 언니.”

은지가 내 허리춤을 끌어안고서는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알레아 실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다 은지 덕분이 아니었을까. 물론 유안나와 은지, 그리고 나와 일행들 각각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도 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기도 해.

“나도 고마워, 은지야. 언니도 은지뿐이야. 사랑해.”

그러나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은지는 꾸벅꾸벅 졸다가 이내 새근새근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은지를 끌어안은 채로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자리에 누우니, 차박차박 바닷물에 몸이 반쯤 잠겼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찾아온 것은 공허였다.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내 몸이 조금씩 반투명하게 변해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은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것이 소멸의 과정이라는 걸 직감했다.

만약 이곳이 정말로 차원의 틈이라면 이곳 또한 내가 있을 곳은 아닐 터이니, 어쩌면 정말 이대로 소멸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가 있을 곳은 어디지?

제나스의 죽음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고통이 나를 잠식했다.

외롭다고 느낄 때면 내 품에 안겨 있는 이 작은 생명체가 나를 보듬고 위로했다. 은지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다. 아니면 정말 이곳에서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렇지 않게 모두를 위해 희생했지만, 사실은 희생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다. 희생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신께선 인간이 감당할 만큼의 시련만을 주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하지만 이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인가?

차원 너머에 남기고 온 것들이 떠오른다. 나의 가족들, 친구, 동료,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까지.

에녹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에게 내 마음 한조각 전하지 못한 채 와야만 했던 것이 너무 서럽고 슬퍼서 참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어.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었더라면, 덜 슬펐을까?

두 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어 혼란스러워한 나날이 없었더라면. 그랬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온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지나고 온 자리에 후회만 진득하게 남았다.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며 보내기에도 모자란데, 나는 벌써 얼마만큼의 시간을 허비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걸까.

그렇게 무의미하게 누워 있던 중에 문득 이곳에서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들려왔다.

“마거릿.”

“이제는 환청이 다 들리는 모양이네.”

뭐지. 나는 누운 채로 귀를 벅벅 문질렀다. 이니스와 어머니가 봤다면 귀족 영애답지 않다고 했겠지? 이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웃음을 짓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생각에 다시 잠겨 있는데, 내 귓가에 찰박찰박 누군가 뛰어오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헛것을 들은 게 아니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마거릿.”

누군가가 나를 부르며 내 어깨를 잡았다.

“아, XX 깜짝이야!”

긴장하고 있던 상태라 더 놀랐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자, 덩달아 놀란 은지가 내 배에서 내려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은지를 주워 품에 안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도드라진 목젖 위로 보이는 완강한 턱선, 밤하늘을 가져온 것만 같은 검은 머리카락, 금실을 뭉쳐 만든 것만 같은 벌꿀색 눈동자.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두 눈을 계속해서 깜빡이기만 했다. 꿈인가?

“……에녹?”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몹시 다급한 얼굴이었다. 그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덕분에 이번엔 눈높이가 맞았다.

벅찬 숨을 한참 동안 고르던 그가 나를 쳐다봤다.

“한참 찾았다.”

“정말 에녹이에요?!”

너무 놀라서 비명소리가 나왔다. 품에 안긴 은지가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미안해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바닥에 녀석을 내려놨다.

“정말 에녹 맞아요?”

내 물음에 에녹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죽을 때가 되니 보고 싶은 걸 보여주나 보다. 에녹이 너무 보고 싶어서 신께서 마지막 환상을 보여주는 걸까. 그런 거면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에녹을 멀뚱히 보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도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은지에게 물었다.

“은지야, 너도 이 사람 보여?”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웅. 에녹!”

나는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에녹이라는 걸 깨닫고 비명을 내질렀다.

“세상에!”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에녹을 보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요?”

“성녀가 도왔어.”

“……네? 어떻게요?”

나는 쭈그려 앉은 채 꾸벅꾸벅 조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건……. 비밀이라고 해두지.”

에녹은 내게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내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나를 바라보는 금안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대 옆에 있어야 내 삶이 완전해지는 기분이야. 그게 설사 죽음에 이르는 일이더라도.”

에녹의 말을 듣는 순간 잠시 숨이 턱 막혔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한데 엉킨다. 나는 말문을 잇지 못하고 입가를 가렸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나와 함께 죽겠다는 거다. 목이 메어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한참 뒤에서야 나는 그에게 물었다.

“설마 저와 같이 죽을 생각으로 온 거예요?”

에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하늘을 찌를 듯한 기쁨과 땅 끝까지 떨어지는 절망감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 남자를 대체 어쩌면 좋지?’

나는 에녹의 뺨을 마주 잡았다. 엄지로 부드럽게 그의 뺨을 쓸어내렸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신이 주신 마지막 안배인 걸까. 혹시나, 만에 하나. 정말 꿈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를 쳐다봤다.

“에녹. 당신은 대체 왜…….”

고개를 내려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기댔다.

“당신이 살기를 바랐어요.”

“말했잖아. 그대 없는 삶은 내게 가치가 없다고.”

에녹이 계속해서 내게 속삭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고 에녹이 조용히 흐르는 내 눈물을 닦아준다.

나는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대고 미간을 찌푸린 채, 울었다. 그는 말없이 계속해서 내 눈물을 닦아주고 또 닦아주었다.

“좋아해요.”

그리고 이어진 내 고백에 그의 손동작이 멎었다. 한참 뒤에서야 그가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이제야 고백해서 미안해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에녹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의 금안이 뜨겁게 요동쳤다.

그가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그가 느릿하게 마른세수를 하더니 내게 물었다.

“다시, 다시 말해봐.”

“좋아해요.”

“한 번만, 더.”

“좋아해요, 에녹.”

내 대답에 에녹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내 뺨에 닿는다. 그의 숨결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가까워지는 금안을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술 위로 말캉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윽고 에녹이 내 턱을 당겨 내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얽힌다.

머릿속마저 뜨거운 연기로 가득 찬 기분이다. 그가 내게로 바짝 몸을 밀착했고 이내 더 깊이 나를 삼켰다. 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쓸어내렸고 그 부드러운 감촉에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매달렸다.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내게서 떨어졌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더 드니 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에녹의 금안이 보였다. 그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한 번 더 말해줘, 마거릿.”

애원을 하듯 그가 나를 채근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붉어진 그의 뺨을 멍하니 보다가 그의 뺨을 맞잡았다.

그리고 뒷꿈치를 조심히 들고 고개를 최대한 들었다. 입술끼리 맞닿는 감촉이 생생하다.

“좋아……, 아니 사랑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터운 팔이 허리를 휘감았다. 이윽고 고개를 숙인 에녹이 나를 강하게 끌어안고 입술을 집어 삼켰다. 숨을 쉬기 버거울 정도로 강렬한 키스가 이어진다.

그때 바닥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은지가 눈을 떴다.

“우움? 언니?”

녀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본다.

중요한 순간을 방해한 귀여운 목소리에 에녹이 천천히 내게서 떨어진다. 그리고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보고 은지가 나를 향해 양 팔을 뻗었다.

“언니! 은지도! 은지도 뽀뽀할래!”

나는 그런 은지를 내려다보며 이마에 뽀뽀를 해줬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외롭지 않았다.

혼자 남겨졌다는 슬픔과 절망감에 허우적거리지 않게끔 내 옆에 남아준 이들 덕에 나는 쓸쓸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은지와 에녹에게 감사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시야가 희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은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우리 몸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희미해져 가고 있었는데, 왜인지 이것이 정말 마지막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걸까.

이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쓸쓸하게 혼자 외롭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서.

그때, 에녹이 내 이마에 다시 키스했다.

“마거릿.”

“네.”

“사랑한다. 마음 깊이.”

“은지도! 은지도 언니 사랑해!”

나는 에녹의 뺨에 입맞춤을 남긴 뒤에 품에 안은 은지에게 고개를 내려, 녀석의 이마에 다시금 입맞춤을 남겼다.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야가 흐려진다. 그리고 흐려지는 시야 끝에 에녹이 내 손을 당겨 나와 은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따뜻한 빛이 우리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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