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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29)화 (229/234)

“이런 미친……!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정신 차려! 이봐, 거기! 뭐 하나 지금 워프게이트를 열어! 어서! 황태자를 옮기도록!!”

아스달이 쓰러지는 에녹의 몸을 받치고는 란그리드 제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한 발자국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유안나의 정화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힘의 방출로 유안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의 몸이 경련했다. 애써 정신력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가 아스달을 향해 경고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어요……. 황태자 전하께서 부탁하신 거고요.”

순간 몸 속의 마력이 사라지는 느낌에 아스달이 에녹을 받쳐 든 채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윽. 부탁? 뭘……! 대체 뭘 부탁한 거지?”

“마거릿을 따라 차원 너머에 보내 달라고요.”

“……!?”

“인과율을 어기는 대가로 그의 생명이 필요했어요. 육체가 없이 마력만 남은 영혼이라면 정화의 힘으로 차원 너머로 보내는 건 어렵지 않거든요.”

유안나의 손안에서 발현되는 빛이 점차 강해졌고 에녹의 눈도 천천히 감겼다.

“잠깐, 에녹. 이보게, 정신 차려!”

아스달이 에녹의 몸을 흔들었지만, 에녹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마치 영혼이 텅 빈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충격적인 상황을 카이든은 자리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바라만 봤다.

그때, 그의 발밑으로 데구르르 굴러온 구슬이 채였다.

제나스가 쓰다 만 마력 구슬이었다. 천년 동안 실험을 통해 모아온 마력이 담긴 구슬.

카이든은 조용히 구슬을 주웠다. 분명 제나스가 모두 사용한 줄 알았는데, 구슬엔 마력이 남아있었다.

그는 구슬을 빤히 노려봤다.

유안나는 차원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계속해서 정화의 힘을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안에서 퍼져 나온 신성력은 계속해서 광선처럼 하늘에 직격으로 쏘아졌고 시간이 흐르자, 먹구름이 드리웠던 하늘이 차차 맑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길게 그어진 선도 희미하게 사라져갔다. 물러가는 먹구름 사이로 눈이 부실 정도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하자 한순간에 위험하고 불안정하던 공기가 바뀌었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닌데 하늘에는 거대한 무지개가 떴다.

마음이 평온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경이로운 광경이라고 생각한 순간, 유안나의 몸에서 빛이 완전히 소거됐다.

세상에 존재하는 마력 전체가 사라지고 차원의 균열이 메워진 것이다.

털썩.

힘을 완전히 소진한 유안나가 흙바닥에 쓰러졌다. 근처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루제프가 힘겹게 몸을 움직여 유안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유안나는 기력을 쇠하여 기절 직전인 상태였을 뿐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정말 마력이 다 사라졌…….”

바닥에 손을 짚고 숨을 헐떡이던 아스달이 멈칫했다.

“잠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훑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아 있는 마력이 있는데?”

“마, 마력안을 쓸 수 있는 겁니까?”

루제프가 아스달을 보며 묻자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흐름을 읽는 눈이지, 마력을 쓰는 눈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며 마력의 잔재를 찾아 움직이던 아스달의 시야에 카이든이 포착됐다.

아스달의 말에 루제프의 부축을 받아 상체를 간신히 일으켜 앉은 유안나 역시 카이든을 돌아봤다.

에녹과 마거릿이 사라진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카이든의 얼굴엔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절망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마거릿은…….”

넋이 나가 연신 마거릿을 찾으며 중얼거리는 카이든은 감정적으로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그런 그의 불안정한 감정이 차차 고조될수록 그의 주변으로 거센 회오리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마력의 회오리가 넋이 나간 그를 천천히 집어삼켰다.

그 장면을 유안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세계에 마력이 남아 있다면 차원의 균열이 그에 감응하므로 결코 메워질 수 없었다. 그러나 카이든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 거대한 균열을 메우기 위해 마거릿과 에녹마저 차원 너머로 보내야만 했는데, 카이든은 어떻게 이를 가능하게 한 걸까.

유안나는 얼핏 몰아치는 바람 사이로 카이든의 손에 든 구슬을 발견했다.

‘저건……?’

“로드!? 제기랄!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아스달이 그런 카이든을 보며 당혹스러운 듯이 물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루제프가 유안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플로네 영애는 대체 어디로 간 겁니까? 황태자 전하께서는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겁니까!”

그 모습을 보던 루제프 역시 당혹스러운 얼굴로 유안나를 보며 머리를 싸맸다. 유안나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혼이 나간 벙벙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젠장, 마력이……! 마력이 사라졌어! 마력이……!”

그때 주변에 서서 혼란을 겪던 마법사들이 외치는 절망적인 비명이 들려왔다. 한 마법사가 카이든이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그런데, 마탑주님께서는 대체 어떻게 마력을 사용하고 계신 겁니까?”

모두가 카이든의 주변으로 몰아치고 있는 회오리바람을 쳐다봤다.

* * *

눈앞에서 마거릿이 사라졌다.

그가 조금만 더 강한 힘을 가졌더라면. 제나스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가졌더라면. 그랬다면 마거릿과 에녹을 차원 너머로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왜 그에겐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조차 없는 걸까. 왜 늘 그에겐, 그 무엇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는 걸까.

툭.

그 순간 카이든은 제 발밑에 채는 구슬 하나를 발견했다. 투명한 구슬 안에 요동치는 희뿌연 연기. 기이한 기운이 구슬로부터 흘러나온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보니, 제나스가 실험을 통해 모아온 마력이 담긴 구슬이었다. 제나스가 그간 모은 힘을 전부 방출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고한 실험자들의 희생으로 모인 마력. 그가 함부로, 그리고 쉽게 건드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마물의 모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풍기는 힘이었고 이 힘을 다루고자 한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에겐 이 힘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간절하게.

그가 제나스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실험을 당하지 않았을까. 조금 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을 수 있었을까.

일이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이런 미친 실험을 조금 더 빨리 막을 수 있었을까.

마거릿을 구할 수 있었을까.

카이든은 고요히 손에 든 구슬을 내려다봤다.

복잡하고 강렬한 갈망이 그의 내면을 휩쓸었다.

마거릿을 구하고 싶다.

늘 로하데와 제나스라는 벽에 부딪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다.

이 구슬의 힘이라면 그걸 가능케 할 것이다.

지금 자신의 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력의 변화가 이 힘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안나가 차원의 균열을 메우기 전에 마력을 흡수해야 한다. 카이든은 구슬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그의 손안에 있던 구슬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곧 카이든의 손안으로 스며들었다. 몸 안에 강력한 기운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분노, 절망, 좌절, 회한, 후회.

모든 감정들이 겹겹이 그를 잠식했다. 가슴 속이 타들어갈 것처럼 뜨거웠다.

그가 가진 강렬한 감정들이 뒤엉켜 구슬이 가진 마력과 단단히 응결되었다. 그리고 곧 마력은 안정적으로 그의 몸 안에 흡수됐다.

“마거릿은…….”

카이든은 멍하니 마거릿과 에녹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봤다.

심장이 요동쳤다. 깊은 우물에서부터 들끓던 물이 거꾸로 치솟아 오른 기분이다.

흙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옅게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옅게 불던 바람은 거센 회오리바람이 되어 카이든을 감싸더니 이내 그를 집어 삼켜버렸다.

카이든을 삼킨 회오리바람에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은 곧 하늘 위로 높게 치솟아 올랐다. 카이든의 머리카락과 함께 옷자락이 넘실거린다.

휘날리는 카이든의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났다. 그의 붉은 눈은 눈부신 황금색으로 뒤바뀌며 반짝거린다.

‘이제 됐다.’

내면의 기운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버겁고 벅찬 힘들이 그의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차분하게 감정이 가라앉는다. 다양하게 자리하던 감정이 차차 사라지고 이성만이 남았다.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이 차차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고 그 자리에 ‘힘’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카이든은 제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피부의 표피가 전부 벗겨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인간의 육체는 껍데기가 되어 사라지고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새로이 구성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넘실거리던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카이든은 양팔을 벌려 두 눈을 감았다.

늘 부족하다 여기던 부분이 완벽하게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 제나스를 뛰어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완전해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기분. 아쉬운 것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기분.

하나, 그는 찾아야 할 것이 있다.

‘마거릿과 황태자를 찾아야 해.’

회오리바람이 걷힌 자리에 서서 그는 잠잠하고 고요해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엉망이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했다. 균열이 완전히 닫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라면 차원의 균열을 만들지 않고도 그 너머에 있을 마거릿과 에녹을 찾을 수 있다. 제나스는 해내지 못했던 것을 자신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데려올게.”

마거릿과 에녹을.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배 위가 묵직하다는 느낌밖에 없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옅은 물 위에 누워 있었다. 상황파악이 되질 않아서 누운 채로 눈만 깜빡였다.

하늘엔 해가 없었는데 주변이 환히 밝았다. 굉장히 기묘했다.

고개를 내리니 5살가량의 작은 아이가 내 배 위에 몸을 뉘이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배가 무겁다 했더니, 은지였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이곳은 어디고 시간은 얼마나 흐른 것이고 은지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혹시 이곳이 사후세계는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면 꿈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현실 감각이 없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얕은 바다였다. 아니 바다는 맞는 건가? 모르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방이 온통 그 정도 깊이의 물로 가득했다.

찰랑.

몸을 움직이자 자리에 물결이 쳤다.

나는 차분하게 몸을 일으켜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주변으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적막.

내가 모르는 무수한 차원 중 하나, 혹은 차원의 틈새 정도로 보였다. 차원 너머로 내쳐진다면 한국으로 가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차원을 넘어 한국으로 돌아가도 내가 있을 곳은 없으니까. 나와 은지는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이 섬뜩할 정도로 기이한 장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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