퉤.
바닥에 핏물을 뱉어낸 카이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은 전부 찢겨 있었고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카이든이 내게 다가왔다.
“마거릿.”
메마른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그가 고단한 얼굴로 힘없이 내게 물었다.
“영혼 종속 계약을 해제하라고 했었지?”
너무 감격스러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양 팔을 벌려 보이며 내게서 다시 한 발자국 떨어진다.
“지금 할게.”
카이든의 얼굴엔 굳은 결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조명탄을 다시 고쳐 쥐었다.
“너한테 마력을 쏠 거거든. 직격으로 맞을 거라 아플 거야. 그래도 조절해볼게.”
카이든은 그제야 내가 하려는 게 뭔지 대충 짐작한 얼굴이었다.
“아픈 건 참을 수 있어.”
그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내가 쏜 조명탄에 더 잘 맞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턱을 치켜들며 눈을 감은 그가 입을 열었다.
“해제.”
간단한 계약 해제 시동어를 들으며 나는 그를 향해 마력 탄환을 발사했다. 새하얀 빛줄기가 조명탄의 총구를 떠나 카이든의 심장으로 쏘아졌다.
공기 중으로 넓게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빛줄기는 카이든의 가슴팍에 직격으로 맞았다.
“윽.”
카이든이 짧게 신음하며 반동에 의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의 몸통을 관통한 빛줄기가 내부에 흩어진 제나스의 모래알 같은 영혼들을 한꺼번에 몸 밖으로 내쳐버렸다.
카이든의 등 뒤로 새파란 알갱이들이 분수처럼 퍼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알갱이들이 방출됐다.
경이로울 정도로 기묘한 장관이었다.
빠져나온 알갱이들은 허공에서 둥글게 뭉쳐지더니, 곧 바위로 날아가 거침없이 처박혔다.
콰아앙-!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잠시 시야를 가렸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흙먼지가 걷히자, 물웅덩이가 뭉친 것처럼 한데 고여 요동치던 것이 점차 모양을 변형시키고 있는 게 보였다.
잠시 뒤에 사람의 형상을 갖춘 남자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을 뱉었다.
“크흑.”
은색 단발머리.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중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카이든의 몸속에서 제나스를 분리시켰다.
그 모습을 본 은지가 내게로 달려와 허리춤에 매달렸다.
“은지가! 은지가 먹을래! 저 나쁜 아저씨한테도 못생긴 돌 냄새 나! 먹고 싶어!”
은지가 제나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피가 잔뜩 튄 지저분한 몰골의 루제프가 은지를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잠깐, 이 꼬마가 영애의 애완 뱀입니까?”
“맞아요. 은지야, 못생긴 돌부터 먹어야지.”
나는 루제프 말에 답하며 은지에게 말했다. 제나스가 혹여나 정신을 차리고 반격할까 봐 마음이 매우 급했다.
역시나 상황을 지켜보던 유안나도 말을 보탰다.
“여러분, 빨리 좀 할까요? 이제 정화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는데요.”
나와 유안나가 연이어 채근하자 루제프가 주머니에서 마력석 1개를 꺼내 은지에게 건넸다.
그러자 은지가 곧장 뱀으로 모습을 변형시키고는 마력석을 냉큼 삼켰다.
꺼억-
마력석을 소화시킨 은지는 해맑게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때 녀석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
점차 부피를 키운 몸집이 성인 남성 세 명은 감싸야할 정도의 크기로 커졌다.
나는 은지의 은비늘이 점차 반달 모양으로 날이 서며, 용의 비늘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보았다.
주변을 압도할 정도의 기백이 풍겨온다. 곧 녀석이 거대한 입을 벌리더니 불기둥을 화려하게 뿜으며 위용을 과시했다.
녀석이 한 단계 더 진화를 한 것이다.
* * *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마거릿을 피실험자 명단에 포함시킨 것?
실험 섬을 계획한 것?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마법사의 길을 걷게 된 것?
모르겠다. 뭐가 됐든 간에 지금 이 상황은 실로 말이 되질 않았다. 제나스는 모래알 같은 영혼을 뭉쳐 만든 형체로 바닥을 기었다.
그의 시선 끝에 섬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그리고 바닥을 기는 그의 손 끝에 무언가가 걸렸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 흙바닥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왜 그런 호기심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제나스는 흙을 손으로 치워내고 반짝이는 것의 정체를 확인했다. 흙바닥을 조금 파니 사람의 손으로 보이는 것이 나왔다. 손 안에는 깨져서 색이 죽은 보석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는 펜던트였다.
그리고 그 펜던트가 누구의 것인지 제나스는 알고 있었다. 천 년 전, 그가 직접 제작한 역대 마탑주들의 마력이 담긴 물건.
‘아나타.’
제나스는 펜던트를 쥐고 있는 손이 아나타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천년의 세월을 함께한 누이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천 년 전 비마력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았던 제나스. 사실 그는 비마력인이 아니라 강대한 마력이 몸 안에 고여 있던 것뿐이었다. 아나타는 그 사실을 조금만 빨리 알아차렸더라면 박해받지 않았을 거라며 그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닌 제나스를 위해 손에 피를 묻혀가며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누이. 그런 삶을 살아놓고 결국엔 실험체에게 정을 주어 그를 배신하며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누이.
피는 못 속이는지, 끝끝내 그녀를 따라 자신 역시 실험체에게 한 번 정을 준 대가로 파국을 맞이한다.
아아.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데-
아아아-!
천 년을 어떻게 버텨왔는데-!
절망감에 젖어갈 때 즈음, 제나스의 시야로 주먹만 한 구슬이 바닥을 나뒹구는 게 보였다. 카이든의 로브 주머니에 넣었던 구슬이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천년 동안 실험을 통해 모아온 마력.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구슬을 손안에 쥐었다. 그의 손안에 들어온 구슬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삐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온전히 가질 수 없다면, 전부 망가트려야지.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잖아.
제나스는 천년 동안 모아온 마력을 방출시켰다.
* * *
우리는 바닥을 기어가는 제나스를 가만히 지켜봤다.
진화한 은지는 신이 난 듯 꼬리를 흔들다가 제나스를 돌아봤다. 눈을 계속해서 반짝이는 것이 제나스를 당장에라도 먹어치우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바닥을 기던 제나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는 흙더미를 파내더니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이상한 울음소리 같은 것을 내기 시작했다.
그를 휘감는 음울한 기운에 그가 흡수한 마력석이 영향이라도 받은 걸까. 하늘에 조금 전보다 더 짙은 먹구름들이 끼기 시작했다.
천둥번개가 요란했다.
하늘에 길게 그어진 선이 더 깊게 패는 것을 보며 유안나가 다급하게 은지를 향해 말했다.
“은지야, 먹어!”
그러나 은지는 혀를 내민 채로 그런 유안나를 보다가 흘끗 나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은지에게 말했다.
“그래, 은지야. 먹어.”
그제야 은지가 신이 난 얼굴로 제나스에게 기어갔다. 거대한 용이 다가오자 제나스는 위협을 감지한 모양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그가 형체를 어그러트렸다. 푸른빛의 덩어리가 되어 그가 하늘 위로 둥둥 떠오른다.
나는 제나스로 추정되는 푸른 빛무리 속에서 희끄무레한 연기가 퍼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언뜻 푸른빛 사이로 구슬 같은 게 보였다. 연기가 그 구슬에서 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구구구구구-
하늘에서 기괴한 소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나오던 구슬이 갑자기 발광하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빛을 내며 돌아가던 구슬과 함께 제나스로 추정되는 푸른빛이 잠시 수축했다.
그 모습에서 위협을 느꼈는지 은지가 주춤했다. 수초 후, 구슬에서 거대한 빛기둥이 만들어지며 하늘 위로 치솟아 올랐다.
“XX, 저거 천년 동안 실험을 통해 모은 마력이야.”
그때 바닥에 쓰러져 있던 카이든이 루제프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
저 망할 제나스 XX가 기어코 끝까지 엿을 준다.
높게 치솟은 빛기둥은 가로로 긴 균열이 생긴 하늘을 가격했다.
콰아아아아앙-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대한 굉음이 온 대기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상체를 낮췄다.
마력의 흐름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역시나,
“으윽.”
주변에 서 있던 제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무릎을 꿇고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마치 중력이 그들을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닥에 붙어 일어날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차원의 균열이 무너지며, 마력이 흐름도 망가진 모양이었다.
지금 이건 비단 섬에 있는 사람들만 느끼는 현상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섬 밖, 전 대륙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유일하게 나와 유안나만 마력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멀쩡했다.
시야에 다시 사람의 형상을 한 제나스가 나타났다. 머릿속에 그를 향한 증오가 점철되어 나는 아무런 사고도 할 수가 없었다.
제나스는 힘겨운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아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는 구슬이 들려 있었다.
“마거릿.”
제나스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그는 그 이상 내게 다가올 수 없었다.
텁.
은지가 거대한 입을 벌려 그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은지의 입이 다시 벌어지며 제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은지의 이빨을 붙잡고 간신히 입을 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팔이 파들파들 떨렸다.
“젠장, 이 망할 뱀 새X가……!”
제나스의 몸 주변으로 검은 연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독가스로 보였는데, 은지의 입속에서도 비슷한 보라색 연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은지는 제나스의 몸에서 풍긴 검은 연기에 영향이 없었던 반면, 제나스는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큭. 이……. 이건 말도 안 돼……!”
은지의 이빨을 잡고 있는 제나스의 손에서 점차 힘이 풀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나스가 은지의 힘에 밀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유안나에게 말했다.
“안나. 부탁해요. 정화 작업을 시작해주세요.”
유안나가 양 손을 앞으로 뻗었고 그녀의 손안에서 희게 명멸하는 빛들이 점차 크기를 키웠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때 에녹이 내 손을 잡았다. 그가 힘겹게 몸을 움직여 내게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그의 얼굴에 짙은 절망감이 어려 있었다. 나는 그런 에녹을 향해 말했다.
“가족들에게는 인사 대신 편지 남기고 왔는데, 나중에 소식 좀 전해 주세요. 제방 서랍에 편지가 있다고.”
나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결국 목이 메서 마른침을 삼켰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울음이 새어 나올까봐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다시 말했다.
“직접 말로 전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제가 도저히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거니까 용서해달라고. 전해 주세요. 제가 너무 사랑한다고. 이제야 말해서 죄송하다고.”
에녹에게 할 말도 전해야 하는데 정작 에녹에게 전할 마지막 말은 그 어떤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나를 채근할 줄 알았던 에녹은 아무런 말 없이 나를 그저 괴롭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이상했다. 에녹답지 않았다. 이제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인데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거지?
때마침 하늘이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우르르르- 콰카캉!
그때 카이든이 무너진 마력의 흐름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몸을 움직여 내게로 손을 뻗었다.
“잠깐만, 마거릿.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너 어디 가.”
몸을 가누기 힘든지 그가 기어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나는 가슴 속에 뜨겁게 요동치는 울음을 삼켜내며 그를 불렀다.
“카이든.”
“뭐야. 왜 그래. 이런 말은 없었잖아. 내가 누구 때문에 다시 살 결심을 했는데, 이게 뭐야? 응? 이건 무슨 엿 같은 상황인데, 대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모두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이게 최선이었어.”
그가 천천히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얼굴로. 이윽고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제나스보다 힘이 없어서. 그래서 네가 이렇게 희생을 해야만 한 거지.”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거 아니야.”
“마거릿, 시간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더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유안나가 재촉을 했기 때문이다.
카이든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대로 주저앉았다. 넋을 놓은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안 돼……. 마거릿, 제발…….”
그가 울었다. 울며 내게 애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나도 가고 싶지 않아. 나도 마음 같아선 사랑하는 사람들 옆에 남고 싶었다. 무서웠다.
차원을 넘어가면 내가 죽게 될지, 살게 될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지금에 와서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여전히 은지의 입속에서 삼켜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던 제나스가 우리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다. 그가 나를 향해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안 돼! 마거릿은 여기 있어야 해! 내 옆에! 안 돼!”
구구구구구-
정화 작업을 시작한 유안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다들 남 신경 쓸 때가 아닐 텐데. 제가 정화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직 다들 실감이 안 나죠?”
이윽고 유성처럼 긴 꼬리를 남기며 그녀의 팔을 배회하더니 이내 거대한 빛이 되어 온 세상, 온 시야를 장악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 속에 머리는 계속해서 지끈거린다.
그때 유안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마거릿, 저는 늘 기다릴 거예요. 평생이라고 해도.”
유안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지가 제나스를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텁.
아아아아악! 안 돼! 마거릿! 안 돼!
은지의 입속에서 제나스의 비명이 점차 멀어졌다. 그 비명 같은 외침을 끝으로 느릿하게 시야가 점멸했다.
이윽고 나의 세상은 완전히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