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랐냐? 하……. 이제야 제대로 해볼 마음이 좀 드네.]
카이든은 건조한 웃음을 터트렸다.
숨을 쉬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카이든이 가사상태에 빠지지 않고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이제 제나스는 시동어로 카이든에게 제약을 걸었고 카이든은 그와 한 영혼종속계약을 통해 제나스에게 제약을 걸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제약을 건 상황이다.
그때 제나스는 오른쪽 귀걸이가 타들어갈 듯이 뜨거워진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멈칫했다.
[내가 그 X 같은 귀걸이를 왜 계속 하고 있었는 줄 알아?]
교황에 의해 제나스에게 몸을 내어줬을 때도 계약을 이용하면 어떻게든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카이든은 그러지 않았다.
그에겐 기회가 필요했다. 제나스가 방심했을 때, 한방에 그를 제압할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왔다.
[네가 내 몸을 차지했을 때, 나도 널 통제해보려고.]
“그런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이건 내가 제작한 귀걸이야, 우리 후손님.”
제나스가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귀걸이에는 제나스의 마력이 담겨 있으며 그가 시동어를 통해 카이든을 제압할 때, 그 마력이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귀걸이는 그런 용도 외에도 카이든의 몸 안에 있는 ‘마력’이 원활하게 순화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사용되기도 했다.
제나스가 제 아무리 귀걸이를 제작한 사람이라고 하나, 직접 그것을 착용하고 사용해온 것은 카이든이다.
귀걸이를 이용해 마력의 흐름을 읽는 방법, 그것의 움직임을 카이든의 몸에 맞게 조절하는 방법은 그 누구보다 육체의 ‘주인’인 카이든이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카이든은 몸 안으로 흩어진 마력들을 전부 모아 한데 뭉쳤다.
[천년 동안 제대로 된 몸을 가져본 적 없어서 모르겠지. 내 몸은 내가 더 잘 알아.]
마력이 몸 안에 과도하게 고이면 육체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때문에 마력이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되면 위험을 감지한 귀걸이가 자동으로 이를 조절하기 위해 통제 불능 상태에 접어든다.
이때는 귀걸이를 임의로 작동할 수 없게 된다. 한 마디로 제나스도 더는 시동어를 읊어 카이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소리였다.
카이든은 거대하게 뭉쳐진 마력이 요동치며 떨리는 것을 보았다. 외부로부터의 압박, 즉 귀걸이의 힘이 뭉친 마력을 흩트리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자 입가에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카이든이 제나스를 향해 말했다.
[이곳이 네 무덤이다, XX XX야.]
* * *
폭발로 인해 섬의 이곳저곳이 망가져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마물들이 제법 많았다.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서로의 등을 맞대고 원형으로 섰다.
나는 항공점퍼 주머니에서 여분의 탄알을 꺼내 탄창에 채워 넣었다. 마력 탄환을 쓸 수도 있겠지만 만일의 상황을 위해 내 마력은 아껴 두어야 했다.
조명탄을 장전한 뒤, 래버를 당겨 내렸다. 그리고 모여드는 힘없는 마물을 향해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융-!
달려드는 괴상한 형태의 마물들 사이로 붉은 연기가 모습을 감췄다.
펑! 퍼엉!
마물들의 몸통이 조각조각 분해되어 터져나갔다. 나는 풍겨오는 악취에 콧잔등을 한번 찡그린 뒤, 등을 돌려 다음 타깃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멀리서 몸집을 부풀린 은지가 마물을 먹어 치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서는 에녹이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가 검을 흙바닥에 내리꽂자 검을 감싼 전류가 땅을 타고 흘러 그를 향해 달려들던 마물 열 마리 가량을 순식간에 전멸시켰다.
일당백을 하는 에녹과 은지 덕에 마물 소탕은 금방 끝이 날 것 같다.
유안나는 도끼를 휘둘러 제게 달려오는 물고기 마물의 머리통을 내려찍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빈 옆구리를 향해 달려오는 괴상한 형태의 마물을 발로 걷어찬 뒤, 조명탄을 쏘았다.
펑! 퍼엉!
조각 조각난 마물이 터져나가는 걸 확인한 뒤에 그녀에게 물었다.
“성녀님은 왜 신성력을 놔두고 도끼를 쓰세요?”
“스트레스 풀려고요.”
그렇게 대답한 유안나가 달려오는 마물의 머리에 도끼를 내려찍고는 머리를 발로 걷어찼다. 화끈하기 그지없다.
“전 섬만 탈출하면 편히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내 중얼거림에 한차례 다시 도끼를 휘두르고 온 유안나가 나와 다시 등을 맞대고는 웃었다.
“저도 같은 꿈을 꿨어요.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지옥이네요.”
우리는 짧게 한숨 같은 웃음을 짓고는 다시금 움직였다.
“저쪽에서 오는 놈들이 끝인 것 같네!”
란그리드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아스달이 주변에서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을 파악해 우리에게 보고했다.
“반황 뒤! 저런, 한눈팔면 쓰나. 성녀님, 앞에 봐야지!”
다소 시끄러웠지만 아스달이 마력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덕에 일행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어서 조용히 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마물 진압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력과 신력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과거처럼 마물을 상대하며 고전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마물 수가 많지 않기도 했거니와 남은 것들도 그간 먹은 게 없는지 힘이 없어 보였다.
마력의 수가 줄고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유안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저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됐네요. 이젠 진짜 ‘정화’ 작업을 시작해야겠어요. 로드의 계획이 뭔진 모르겠지만. 더는 기다려줄 수 없겠어요.”
쿠우우웅-!!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북동섬 방향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우리가 있는 곳까지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나는 하늘 위로 어둑한 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불길하다. 이건 마치 어제 있었던 내 생일파티에서 모란꽃 놈들이 마력석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패턴이었다.
“제나스인가?”
아스달이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북동섬 방향을 쳐다봤다.
쿠우웅-!
또 한 번 거센 굉음이 들리자 푸드덕-하며 새들이 하늘로 높이 날아갔다. 새들의 움직임을 따라 하늘로 고개를 올렸을 때였다.
시야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펄럭이는 파란색의 마법사 로브가 멀리서도 눈 안에 박혔다.
하늘에 붕 뜬 남자의 등 뒤로 섬뜩한 번개가 내리쳤다.
윽. 나는 번개와 함께 찾아온 두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늘 위로 크게 뛰어오른 남자는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이쪽으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제나스야, 카이든이야?”
아스달이 의아한 얼굴로 우리에게로 하강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지막 마물을 조각내고 달려온 에녹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검을 빼어 든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남자를 경계하며 나를 불렀다.
“마거릿, 조심해.”
에녹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남자가 우리 앞으로 착지했다. 남자는 입술에 묻은 피를 거칠게 손으로 문대어 닦고 고개를 들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루비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제나스가 아니다. 카이든이었다.
“마거릿.”
그의 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이든, 너 코피.”
카이든이 내 말에 손가락으로 인중을 쓸어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 중 유일하게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아스달이 카이든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을 향해 손을 뻗는 카이든의 동작이 매우 굼떴다. 몸을 통제하기 어려운 건지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힘겹게 손수건을 받아 코를 틀어막은 그가 나를 보며 대답했다.
“지금, 내가 제나스를 제압 중인데, 너한테 부탁 좀, 하려고 왔어. 여긴 황태자도 성녀님도 있으니, 믿고 널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불길한 소리를 하는 카이든을 올려다봤다. 카이든은 코를 막고 있던 손수건을 아스달에게 다시 건네고는 내 양 뺨을 움켜쥐었다.
“내가 이 XX를, 제압하는데 실패하면, 그냥 날 죽여.”
“뭐……? 미쳤어? 절대 안 돼.”
“최선을, 다하는 중이긴 한데, 쉽지는 않네. 윽…….”
카이든이 말을 하다가 다시금 바닥에 피를 토하더니 내게서 서너 발자국 멀어졌다. 그가 잔뜩 경계 어린 태도로 검을 들고 있는 에녹을 쳐다봤다.
“마거릿을 부탁하겠습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으니, 몸이나 챙겨. 죽으면 가만두지 않겠다.”
에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이든의 몸에서 회색빛의 연기가 풍겨 나왔다. 노란 전류가 흐르는 연기는 곧 강력한 회오리가 되어 그의 몸을 휘감더니,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카이든!”
잠시 뒤 카이든의 얼굴이 연기를 뚫고 간신히 보였으나 금세 다시 연기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카이든은 얼굴이 연기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아무래도 몸속의 제나스와 사투를 벌이는 듯 보였다.
우리는 그 모습을 긴장한 채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퍽!
이윽고 카이든이 연기 밖으로 튕겨 나와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몸에 튕겨져 긁혀 나간 자리가 깊게 파였다.
쓰러진 그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입가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으며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는 시선.
저건 제나스의 것이다.
우리는 모두 긴장한 채로 그를 바라봤다. 유안나는 여차하면 금방이라도 정화의 힘을 사용할 것처럼 양 팔을 뻗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나스가 중얼거렸다.
“후손님. 내가 이대로는 못가. 천년의 세월이 억울해서.”
그와 동시에 제나스의 귀걸이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뒤로 회색빛 연기가 다시금 그의 몸을 감쌌고 요동치는 회오리 안에서 몸이 뱅글 굴려진 그가 다시금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냥 꺼져.”
이번엔 카이든이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그 모습을 혼란스럽게 쳐다봤다. 카이든의 몸 하나에 두 개의 영혼이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고, 나는 카이든이 반드시 이길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내가 나설 차례다.
나는 조명탄의 탄창을 열어서 탄알을 우수수 빼 점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탄창을 닫은 뒤에 내면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제나스와 카이든을 향해 조명탄을 조준했다.
‘알레아 섬에서 유일하게 마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아나타가 고안한 섬의 시스템이 마거릿에게만 통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제 정화의 힘이 마거릿에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유안나가 했던 그 말처럼 차원 너머에 다녀온 탓인지 내 마력은 남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이에 더해 은지가 내게 각인한 이후 나는 은지와 공명을 한다. 은지의 진화가 내 마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교황을 공격할 때 느낀 거지만 아스달의 반지를 이용해 방출하는 내 마력은 생각보다도 광범위하게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카이든의 육체를 전부 감쌀 정도의 마력으로 그를 가격하면, 모래알 같이 잘게 쪼개진 영혼이라고 해도 제나스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섬을 탈출할 때 마물의 모체가 카이든을 향해 번개를 쏘았던 것을 기억한다. 카이든의 육체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는데 제나스에게만 타격을 입혔다고 했었지.
나도 그 방법을 활용해보려고 한다.
내가 카이든에게 영혼 종속 계약을 해제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카이든이 영혼종속계약을 해지하는 순간을 노려, 제나스의 영혼에 마력 탄환을 가격시킬 것이다.
나는 카이든인지 제나스인지 모를 남자를 향해 조명탄을 겨누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카이든이 육체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바로 그 순간,
‘끝장내주지.’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