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24)화 (224/234)

* * *

디에고는 마법사들과 란그리드 황제가 보낸 란그리드 제국군을 남부 해역에 집결시켰다.

부둣가에 정박한 선박 중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루제프와 디에고는 그것이 로하데 후작의 짓이라는 걸 짐작했다. 마법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루제프와 함께 섬에 진입해 마거릿 일행을 도울 지원군과 섬 주변을 정찰하며 로하데 후작을 찾을 정찰대를 재 선별했다.

그러나 마거릿에게 마력석을 전해야 할 루제프의 몸은 결코 성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신력에 비해 마력으로 이루어지는 치료는 효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디에고의 물음에 파리한 안색으로 잠시 심호흡을 한 루제프가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마력석, 파괴해야죠. 때를 놓칠까 봐 걱정이 됩니다.”

디에고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는 루제프의 뜻을 이해했다. 이번이 모든 사건을 끝낼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란그리드 남부 해역에 워프게이트가 열렸다. 좌표가 찍힌 장소는 플로네 공작 성이었다.

“다들 이곳에 모여 있었군.”

디에고는 워프게이트를 열고 등장한 이가 플로네 공작임을 알아차렸다.

이어서 플로네 공작과 함께 공작 성에 남아 있던 일부 란그리드 제국군과 그리고 공작 성의 사병이 나타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엔 란그리드 황실 좌표가 찍힌 워프게이트가 열렸다.

그중엔 란그리드 제국의 황제와 그의 신료들이 있었다. 등 뒤로 사람들을 줄줄이 매달고 등장한 황제는 붉은 망토를 펄럭거리며 위용을 과시했다.

전시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화려하고 느긋하게 등장한 제국의 수장이라니. 황제를 발견한 이들은 모두 당황했다.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디에고와 마르셀 또한 다급하게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인사했다.

“란그리드의 광명을 위하여!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디에고가 인사를 마치자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외쳤다.

“란그리드의 광명을 위하여!”

황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해안가에 집결한 제국군과 마법사들을 보았다.

“알레아 섬을 드디어 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내가 행차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플로네 공작도 황제의 행차는 예상치 못했는지, 능숙하게 표정 관리하는 것에 실패하고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황제는 태연하게 웃으며 좌중을 훑었다.

“곧 연합 재판이 열릴 거야. 그 전에 내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겠어.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말이야.”

플로네 공작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역사적인 순간, 말입니까.”

“플로네 공작 성에서 벌어진 사건에 이어서 알레아 섬까지 찾는다면, 이게 보통 큰일인가? 교황청과 마법사 협회의 입지가 무너지는 순간 아닌가. 내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지. 오늘이 바로 역사가 바뀌는 날이 아니겠나.”

역사가 바뀌는 날이라는 말에는 동의하나, 한가하게 그걸 구경하기 위해 전시 중인 장소까지 찾아왔다니.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황제가 알레아 섬 생존자들의 고통을 얼마나 쉽게 여기고 있는지 알만한 대목이었다.

때 없는 황제의 말을 듣고도 디에고는 덤덤했으나, 마르셀의 얼굴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전시 상황에서 의전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잔뜩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플로네 공작은 황제의 시선 끝이 향하는 방향을 함께 쳐다봤다.

그곳엔 버네튼 신문사의 신문국장이 친히 나와 그들의 대화를 메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황제가 디에고를 돌아봤다.

“실험의 배후라는 자가 섬으로 도망쳤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현재 황태자 전하와 헤스티아 왕세자 저하, 그리고 성녀님과 플로네 영애가 섬에 진입한 상황이고 곧 지원군을 파견할 예정입니다.”

“흠. 역시 우리 황태자가 알아서 잘 하고 있군 그래. 믿음직해. 어릴 때부터 남다른 아이였지.”

남다른 아이는 무슨. 디에고는 밀려오는 분노를 삼켜냈다.

황제가 제 자식들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는 란그리드 제국 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황후의 손에 황자 황녀들이 죽어나가는 것조차 관심 없던 사람이었다, 황제는.

황제의 무관심과 저를 노리는 황후의 손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에녹의 모습을 내내 지켜본 디에고이기에 황제의 말은 더더욱 반발심을 안겼다.

“그럼 상황이 종료되면 다 함께 섬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지. 대체 어떤 섬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황제의 말에 디에고와 마르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플로네 공작은 뒤늦게 디에고에게 인사했다.

“아무튼 반갑네, 디에고 경. 도움이 될까 싶어서 와봤네.”

“직접 지원을 나와주실 줄 몰랐습니다. 전력에 큰 보탬이 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의 바른 디에고의 인사에 플로네 공작이 기분 좋게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 걱정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기이한 형태의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빨리 움직여야겠군.”

플로네 공작이 입을 열자 디에고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획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 * *

무너지고 엉망이 된 땅 위로 이끼가 잔뜩 낀 평평한 돌벽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고요한 문 앞으로 돌풍이 불며 흙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새파란 빛이 바닥에서 하늘 위로 치솟으며 사람의 형체가 생겨났다.

벙커 앞으로 워프한 제나스는 돌벽을 열고 가벼운 걸음으로 벙커의 계단을 내려갔다. 천 년 동안 실험을 통해 모아둔 마력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제나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제가 섬까지 끌고 들어온 성녀 일행을 떠올렸다.

마력을 회수하고서 차원을 무너트린 다음, 마거릿을 안전히 데리고 섬을 나갈 것이다. 그리고 로하데 후작에게 지시하여 성녀 일행은 섬과 함께 폭발시킬 생각이었다.

순순히 마거릿을 내놓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다. 아둔하게 반항을 하는 바람에 섬까지 끌려온 그들 잘못이지.

벙커의 지하.

두 개의 문중에서 ‘차원의 문’ 앞에 선 그가 새삼스러운 얼굴로 그 문을 바라봤다. 천 년 동안 이 문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들였던가.

이 ‘차원의 문’은 ‘균열’이 있는 그 자리에 만든 문이었다.

균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마력의 파장이 거세어져서 이를 온전히 다루기는 쉽지 않았다. 하여 그와 아나타는 ‘문’이라는 중간 장치를 만들었다. 위험한 균열을 보다 안정적으로 다루기 위한 문이었다.

아나타와 처음 섬을 만들고 실험을 열 번 즈음 진행했을 때였나. 차원 너머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끌어오는 데 처음으로 성공을 했었다. 십 년 만의 첫 성공이어서 기억에 진하게 남았다.

그러나 그 이후 물건은 몇 번 더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으나 살아 있는 생명체를 통과시키는 데에는 번번이 실패했었지.

그만큼 다루기 어려운 것이 균열이었다. 그러니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선 차원을 온전히 다루겠다는 욕심은 포기해야 했다. 마지막 실험에 실패해서 마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무리를 해서라도 그간 모아온 마력을 사용해 차원의 벽을 억지로 무너트리는 수밖에 없다.

온전하게 가질 수 없다면, 망가트려서라도 지배를 해야지.

제나스는 차원의 문 위로 손바닥을 얹었다. 그러자 그의 손바닥 아래로 푸른빛의 마법진이 그려졌고 마법진이 손안에서 점차 크기를 키워 문 전체를 뒤덮었다.

이윽고 문을 감싸고 있는 마법진에서 배출된 새하얀 연기가 제나스의 손바닥 아래로 결집됐다.

타래처럼 얽힌 연기 더미가 계속해서 회전하더니 이내 동그란 구슬이 되어 제나스의 손안에 잡힌다.

제나스는 손안에 들어온 구슬을 내려다봤다.

천년동안 실험을 통해 모아온 수많은 실험체들의 마력. 이것만 있으면 차원의 균열을 무너트릴 수 있다.

“이제 정말 끝낼 시간이야.”

그는 구슬을 든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때, 제나스는 제 안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꺼졌던 불씨가 간신히 살아난 것처럼 몸 안에 작은 온기가 생겨났다.

그건 분명 카이든의 것이었다.

설마, 깨어나려는 것일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제나스는 찝찝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시동어를 읊었다.

* * *

카이든은 어렴풋이 제나스의 콧노래를 들었다. 제나스가 현재 서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벙커였다.

복종.

목소리를 여러 겹 덧댄 것처럼 기이한 음성이 카이든의 온 몸을 강타했다.

그의 몸에 갇혀 곤란해하는 제나스를 위해 모란꽃 세력이 만든 시동어와는 내용이 달랐다. 이것은 제나스가 직접 카이든을 다루기 위해 만든 시동어였다.

쿠웅--!

이번에도 여지없이 심장에 거센 충격이 가해졌다. 누군가가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잡아당기는 것처럼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카이든의 시야가 명멸하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본래라면 지금 즈음 가사상태에 접어들어 정신을 잃었어야 한다. 교황청 인간들에 의해 육체가 개조되어 세뇌된 몸이다. 그 의지를 거스르는 건 당연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카이든은 버티고 있었다.

마거릿에게 기다려 달라고 제 입으로 부탁까지 하지 않았나. 이건 그가 직접 이겨내야만 하는 일이다. 굴복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틴 카이든은 제나스의 손에 투명한 유리구슬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희뿌연 연기로 가득한 구슬이었다.

구슬에서 풍기는 기운만 해도 남다르다. 카이든은 그게 천 년 동안 실험을 통해 모은 마력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카이든은 제나스와 로하데 후작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남은 마력을 회수하겠다고 했었지. 제나스가 섬에 다시 들어와야 했던 이유는 사실 그것뿐이다.

‘너도 날 믿어. 제나스랑 같이 있는 것도 조금만 참고.’

‘당연히 걱정하고 너를 생각하지. 네가 소중하니까. 꼭 이성적인 감정만이 사랑이라고 하는 건 아니잖아.’

그는 조금 전에 마거릿과 나눈 대화를 계속해서 떠올렸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그녀의 얼굴, 목소리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이성을 유지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바라보던 카이든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바들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떼며 꽤 오랜 시간에 걸쳐 단어를 완성했다.

[발현.]

“으윽.”

마거릿을 찾으러 돌아가려던 제나스가 영혼에 뜨거운 인장이 짓눌리고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젠장, 우리 후손님. 시동어를 읊었는데 어떻게 일어났어?”

인장의 통증을 이겨낸 제나스는 정말 놀란 듯 중얼거렸다.

카이든의 몸은 시동어에 움직이도록 개조되어 있는데, 그걸 정신력으로 이겨낸다는 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