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23)화 (223/234)

“아, 잠깐 가기 전에.”

멀어지던 제나스가 나를 돌아봤다. 그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러자 내 어깨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마법진 밖으로 끌려나갔다.

“은지야!”

캬아악!

은지가 허공에 둥둥 떠가며 몸부림을 쳤지만, 기어코 은지를 빼낸 제나스가 별도의 마법진 안에 은지를 가뒀다.

“지난번에 네놈이 안식의 방에 걸어 둔 봉인을 깼었지? 그래서 너는 특별대우.”

젠장, 과거 은지가 몸집을 키워서 마법진 봉인을 끊고 오두막 밖으로 나갔던 일을 말하는가 보다.

제나스는 나를 돌아보며 보란 듯 싱긋 미소를 짓더니 여유작작한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나는 제나스가 사라지자마자 투명한 결계 벽을 쿵쿵 두드리며 은지를 불렀다.

“은지야, 괜찮아?”

내 물음에 녀석이 나를 따라 머리로 벽을 콩콩 두드리며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마법진의 봉인을 깨부수기 위해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몸집을 아무리 키워도 봉인이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당연했다. 제나스도 과거 오두막 사건을 기억하며 더 철저하게 봉인 마법을 걸었을 테니까.

역시나 마법진 안에 거대한 몸이 꽉 끼어 불편해 보이기만 할 뿐, 마법진이 깨지지는 않았다.

캬아악.

은지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을 모르고 움직이다가 결국 몸집을 다시 줄였다.

‘다시 생각해보자.’

제나스는 아마 은지가 마법진의 봉인을 풀 수 있다는 점과 마력석을 흡수한 마물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녀석을 봉인하는 마법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은지는 단순히 마력석만 흡수한 것이 아니라 진화를 했다. 제나스는 그 점을 아직 모르니 은지가 봉인 마법을 깰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이다.

아니면 조명탄을 써볼까? 교황을 처리했던 것처럼 내 마력 탄환이 제나스의 봉인 수식을 깨는 데에도 효과적일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그때, 가부좌 자세를 하고 은지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스달이 입을 열었다.

“사람 모습으로 변해서 마력을 써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내 반문에 아스달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 녀석, 사람의 모습을 했을 때와 뱀의 모습을 했을 때의 마력의 파장이 달라 보이더군. 예컨대 조금 더 기술적인 측면에서 마력을 다루는 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더 효과적인 것 같다는 소리야.”

마법진 안을 배회하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은지가(녀석의 각인자로서 내가 느끼기에는 일단 그랬다) 그 말을 듣고 무언가가 떠오른 모양이다.

녀석이 갓 잡은 싱싱한 물고기처럼 자리에서 펄떡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곧장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자리에서 방방 뛰며 나를 향해 팔을 흔들며 외쳤다.

“언니! 언니! 은지 봐줘! 은지 할 수 있어!”

“응. 보고 있어.”

내 말에 말랑해 보이는 주먹을 말아 쥐고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곧 녀석의 몸 주변으로 보라색 연기가 스멀스멀 풍겨 나왔다.

은지가 마법진의 투명한 결계 위에 작은 손을 얹자 보라색 연기와 함께 손이 결계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녀석이 결계 밖으로 빠져나오고자 투명한 벽에 얼굴을 밀어 넣었다. 꼭 겹겹이 싸맨 포장 랩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얼굴이 잔뜩 눌렸다.

“으으으! 으디 하 뚜 이써!”

뭉개지는 발음으로 사투한 끝에 은지가 결국 결계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 녀석이 결계 밖으로 나오자마자 마법진의 투명한 결계 벽이 깨진 유리처럼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은지 했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잘했어, 은지야! 잘했어! 그럼 우리도 똑같이 해줄 수 있어? 안 힘들어?”

“응! 할 수 있어!”

녀석이 차례로 우리가 봉인된 마법진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나가며 결계를 깨부쉈다.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결계 밖으로 나오며 은지와 아스달을 돌아봤다.

“고마워요, 은지야. 저하께도 감사하고요.”

“뭘 이 정도 가지고.”

감사 인사를 건네자 아스달이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내 칭찬을 듣는 게 익숙하지 않다는 듯 새삼스레 부끄러워한다.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은지가 내게로 달려와 허리춤에 안겼다.

“언니! 은지 잘했어?”

“응 잘했어.”

마법진에서 빠져나온 이들이 몸을 추스르는 동안 나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에게 칭찬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은지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양팔을 벌렸다.

“은지 안아죠!”

“그건 마거릿이 힘들 것 같은데, 이리와. 내가 안아주지.”

언제 왔는지 코앞까지 다가온 에녹이 가뿐하게 은지를 안아 들었다.

“언니 힘든 거 시러. 근데 은지는 언니가 안아주는 게 더 조은데.”

“결계를 부순 건 잘했다. 하지만 이럴 때 하고 싶은 걸 참을 줄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 되는 거야.”

“으응……. 으, 은지 어른이니까 잠깐은 참을게.”

자긴 어른이라며 에녹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이는 은지가 귀엽고 대견해서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아스달과 유안나도 차례로 은지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칭찬했고 란그리드 제국군 기사 몇몇도 녀석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며 예뻐했다.

에녹이 그제야 나를 쳐다봤다. 걱정이 한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마거릿, 그대는 괜찮나.”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나는 에녹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우리 주변으로 모인 이들에게 말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제나스가 벙커에 간 것 같죠? 그가 이 섬에서 찾을 게 있다면, 천 년 동안 모은 마력밖에 더 있겠어요?”

제나스가 섬에서 찾을 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밖에 없었다. 차원의 문이 벙커에 있으니 천년 동안 모은 마력도 그곳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주변을 훑었다. 땅이 많이 망가져서 과거 북섬에 있던 거대한 산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이 폭발의 잔재 속에서 벙커라고 무사할까 싶지만, 차원의 문이 있는 장소이니 뭔가 보호할 방안을 마련해두었을지도 모른다.

“흠. 그렇다면 제나스란 작자는 지금 즈음 벙커에 도착했을 것 같네만. 마법사니 워프를 할 것 아닌가.”

나는 에녹의 말을 듣고 유안나를 쳐다봤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 계획의 핵심은 유안나가 균열에 사용할 ‘정화의 힘’이기 때문이다.

“정화를 지금 시작할까요? 제나스가 또 워프해서 도망가버리면 곤란하잖아요.”

자연스럽게 흙바닥에 앉아 있던 유안나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아스달이 그녀를 만류했다.

“잠깐, 성녀님. 우리의 목적이 차원의 균열을 메우는 것에만 있는 건 아니지 않나. 일단 로드와 주교님도 찾아야지. 조금만 기다려봄세.”

“로드한테 뭔가 계획이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 기다리는 게 좋겠군.”

나는 아스달과 에녹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일단 기다려 봐요. 카이든이 세운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조금 주죠. 그리고 아까 제나스가 저를 데려갈 거라며 여기서 기다리란 말을 했어요. 그러니 분명 다시 돌아올 거예요.”

내 마지막 말을 들은 유안나가 김샌다는 얼굴로 자리에 도로 앉았다.

“좋아요. 해가 저만큼 기울 때까지만 기다리는 거예요. 그래도 소식이 없다면 바로 계획에 착수하죠.”

“그건 우리 모두 동의하는 바다.”

유안나의 말에 에녹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아스달과 나도 동의했다.

나는 점퍼 주머니에서 작은 영상구를 꺼냈다. 이때를 위해 디에고와 연락할 때 사용했던 영상구를 내가 가지고 있었다.

“그보다 저한테 아까 디에고 경과 연락하던 영상구가 있거든요? 이 틈에 디에고 경에게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주교님도 찾아야 하잖아요. 섬 밖에 있을 테니 상황을 전달하는 게 좋겠어요.”

영상구에 마력을 불어넣자 뿌연 안개가 투명한 유리구슬 안을 가득 채웠고 이내 연기가 걷히며 디에고의 얼굴이 보였다.

[플로네 영애! 괜찮으십니까? 조금 전에 부둣가에 도착했는데, 이곳에 남은 이들에게 소식 전해 들었습니다.]

영상구 안에서 디에고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안부를 물었다.

그런 디에고의 옆으로 루제프의 얼굴이 보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주교님?! 괜찮으세요? 정말 주교님 맞아요?”

새하얀 사제복에 피가 가득하다. 얼굴도 성한 곳이 없어 보였다.

[저 맞습니다. 그리고 제 피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디 바네사도 무사합니다.]

루제프가 애써 웃어 보이며 말하고는 옆에 있는 바네사의 안부를 확인시켜줬다. 나는 두 사람 모두 무사한 것을 보며 시름을 덜었다.

“주교가 살아 있나 보군! 그럴 줄 알았어!”

“제발 좀, 조용히 하세요. 제나스 오겠어요.”

“아니, 성녀님. 성녀님은 내가 왕국의 왕세자라는 걸 가끔 잊는 것 같아.”

“그걸 잊어버리게끔 저하께서 행동하시니 그러지요.”

“허 참.”

아스달과 유안나의 대화를 들으면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다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저런 여유로움이라니.

“아무튼 그럼 이제 로드만 찾으면 되겠군.”

아스달이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현재의 상황을 정리했다. 가장 걱정하던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아, 그리고 잠깐만요, 영애.]

그때 루제프가 다시 나를 불렀다.

[제가 린네하온 대주교에게서 마력석 1개를 회수했습니다. 나머지는……. 로하데 후작이 훔쳐 달아났습니다. 죄송합니다.]

루제프의 말을 전해 듣고서야 이해가 갔다. 역시 제나스는 남은 마력석을 전부 흡수한 것이 맞았다.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죄송하단 말은 마세요. 그리고 혹시 그 마력석도 지원군을 통해서 가져와 줄 수 있어요? 은지에게 필요할 것 같아요.”

내 말에 루제프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게 제나스가 워프 게이트를 열어 섬으로 향하는 ‘문’을 열 때, 게이트 주변으로 떠올랐던 좌표를 보내 주었다.

그들에게 조심하란 당부를 전한 뒤에 나는 영상구를 끄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알레아 섬을 처음 본 란그리드 제국의 기사들은 신기해하면서 주변을 훑고 있었다. 기사들의 뒤에서 유안나는 익숙하게 오두막 주변을 둘러보며 잔해를 뒤적거렸다.

“그 신발과 복장은 다시 봐도 신기해.”

나는 영상구를 점퍼 주머니에 넣고 신고 있던 워커의 끈을 조여 묶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달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와 나를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유안나가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도끼와 석궁이 들려 있었다. 저건 분명 마물의 모체를 찾으러 갔던 동굴에서 그녀와 아스달이 쓰던 무기였다.

“이것 봐요, 마거릿. 이게 오두막 아래 깔려있더라고요.”

유안나가 손에 든 도끼를 휘두르며 말했다. 신성하고 고결한 성직자복을 입고 도끼를 휘두르는 성녀라니.

그녀는 다른 손에 든 석궁을 성의 없는 동작으로 아스달에게 던졌다. 석궁을 받아 든 아스달이 또 무기가 필요한 상황인 거냐며 지겹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석궁에 맞는 화살을 찾아다닌다.

“성녀님께서 잘 쓸 수 있는 무기가 생겨서 다행이에요.”

“어머, 마거릿은 아직도 저를 성녀님이라고 부를 거예요? 대체 언제쯤 저를 애칭으로 불러줄 거죠?”

나는 그녀의 말에 불현듯 그녀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친구를 하기로 해놓고 말이다.

“좋아요, 안나.”

내 대답을 들은 그녀의 얼굴이 점멸하던 전구에 불이 들어온 것처럼 환히 밝아지더니 이윽고 벅차오른 표정이 되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마치 내가 그녀의 애칭을 불러준 것이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좋아요, 메그.”

그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도 그녀를 따라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아팠다.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친구인데, 이제 곧 이별을 해야 한다니.

어쨌든 우리는 최대한 서둘러 이 작전을 끝내야 했다. 제나스가 더 큰 마력을 손에 얻고 차원의 균열을 손에 넣기 전에 말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런, 다들 조심하게. 뭔가 몰려오고 있어.”

마력감지기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는 중인 아스달이 외쳤다. 우리는 곧 침수되어가는 북섬에서 겨우 살아남은 굶주린 마물들과 마주쳤다.

마물들은 꼭 뭔가에 이끌려 온 것처럼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은지가 깨부순 마법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방향이었다.

“……!”

그러고 보니 제나스가 지금 사용하는 마력은, 마력석을 흡수한 힘이었다. 마물을 불러 모으던 그 마력석 말이다.

망할 알레아 섬. 망할 제나스.

“이번에야말로 전부 소탕하도록 하지.”

에녹이 검을 뽑아들며 중얼거렸다. 아스달과 유안나도 각기 찾은 무기를 들었고 나 역시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해보죠. 이 망할 알레아 섬도, 저 엿 같은 마물들도. 그리고 죽일 놈의 제나스도. 이제 정말 마지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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