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22)화 (222/234)

* * *

아무리 기다려도 카이든은 반응이 없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제나스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기대하지 마, 마거릿. 우리 후손님은 이제 동면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런 제나스를 노려봤다.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에녹은 봉인된 마법진 안에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제나스와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답지 않게 매우 불량한 자세였다.

유안나는 상황을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타이밍을 재기 위함임을 알았다. 마법진의 봉인이 풀릴 순간을 노리고 차원의 균열을 메울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원의 균열을 메우고 마력석을 파괴하고 제나스를 처리해야 했다. 남은 마력석을 제나스가 가지고 있다면 차라리 잘됐다. 제나스 하나만 처리해버리면 그만이니.

그래. 이렇게 섬으로 들어온 것 또한, 차라리 잘됐다. 한정된 장소에서 그를 죽일 방법을 모색하는 게 더 손쉬웠기 때문이다.

자동폭발장치가 있다 한들 섬에 제나스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섣불리 섬을 폭발시키지 못할 터. 어떻게든 그를 섬 안에 붙잡아야 했다.

나는 차분하게 주변을 훑었다.

아스달은 가부좌 자세를 하고 앉아 우리 대화를 가만히 지켜봤고 다른 기사들은 언제든 에녹의 지시만 떨어지면 움직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제나스를 바라봤다. 제나스의 등 뒤로는 무너진 오두막의 잔해와 숲이 보였다.

북섬은 디딜 수 있는 땅이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도 아나타가 펜던트의 봉인을 풀며 직격탄을 맞았던 땅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럼에도 오두막의 반경 100미터 주변으로는 비교적 멀쩡하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이러고 있으니 정말 알레아 섬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망할 엿 같은 알레아 섬 말이다.

‘그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게 그냥 이대로 사라지는 거라면…….’

‘그 길 함께해줄게. 그러니 일단 돌아와.’

조금 전 했던 그 말은 빈말이 아니다. 카이든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으니까.

나는 제나스를 향해 말했다.

“너는 카이든을 몰라. 내가 아는 카이든은 뭐든 할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제나스는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못마땅한 얼굴로 그가 내게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젠장, 뭐야.”

그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을 움켜쥐고는 마치 내면의 무언가랑 싸움이라도 하듯이 몸을 움찔거리며 곤란해하고 있었다.

“이 건방진……!”

제나스가 이를 악물었다. 잇새 사이로 샌 신음을 뱉으며 그가 울컥, 피를 토했다. 그를 둘러싼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내 안에서 옅은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나는 바짝 결계 앞에 붙어 위태롭게 바닥에 주저앉은 제나스를 쳐다봤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잠시간 미동도 없던 그가 다시금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의 공기가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움직이지 않은 채로 그를 쳐다봤다. 혹시 몰라 들고 있던 조명탄의 장전 레버를 당겨 내리고 방아쇠 위로 손가락을 걸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은발이 부드럽게 흩날린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 위로 차분하게 내려앉고 남자의 붉은 눈이 또렷하게 초점이 잡혔다.

가만히 나를 보던 그가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마거릿?”

나는 조명탄을 내리고 투명한 벽을 탕탕 두드렸다.

“카이든!”

“세상에, 로드! 드디어 돌아왔군!”

아스달을 비롯한 다른 이들도 놀라서 마법진의 투명한 벽 가까이 다가와 카이든을 쳐다봤다.

“제나스는 어떻게 된 거지? 아직 마법진이 풀리지 않은 걸 보면 죽지는 않은 모양인데.”

아스달이 카이든에게 물었지만, 카이든은 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아스달의 질문을 듣지도 못한 것처럼 보였다.

조금 전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그는 제나스가 방심한 틈을 노려 잠시 주도권을 가져온 것 같았다.

그러나 제나스가 마력을 되찾았다고 했으니 언제 다시 그에게 몸을 빼앗길지 모르는 일이다.

카이든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 다행…….”

발음이 뭉개졌다. 울음과 함께.

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내가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걱정을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는 정말 그걸 알아야 한다.

“동면에 들어간 줄 알았어.”

“그러려고 했는데……. 모르겠다, 젠장. 네 얼굴이 계속 생각나서 그러기 어렵더라.”

카이든이 허탈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카이든을 마주 바라봤다.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이야? 말해줄 수 있어?”

“방법을 모색 중이야.”

“방법? 무슨 방법?”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나왔어. 제나스가 다시 돌아와도 걱정하지 마. 날 믿어.”

그렇게 말한 카이든이 우리 사이에 투명하게 가로막힌 마법진의 결계를 손가락으로 툭 두드렸다.

“이것도 조금만 참고.”

“조금만 참으면, 네가 다시 돌아올 거야?”

“응.”

그러고 보니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 안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부탁 하나 할게.”

“뭔데?”

“내가 말하면, 영혼종속계약을 해지해줘.”

“뭐? 그건 안 돼.”

“너도 날 믿어. 제나스랑 같이 있는 것도 조금만 참고.”

내 말에 카이든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조금 전 그가 한 말을 그대로 읊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나스가 들을지도 모르니 더 자세히는 말할 수 없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카이든이 육체의 주도권을 잡은 지금 당장에 제나스를 몰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카이든에겐 분명 다른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계획을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런 내 얼굴을 흘끗 본 카이든이 물었다.

“나 걱정했어?”

“당연히 걱정했지.”

“내 생각도 했어?”

“응.”

“왜?”

“……어?”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을 들어서 눈만 깜빡이며 잠시 질문을 곱씹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저기 두 사람,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는데 둘이서만 얘기하지 말고 다 같이 대화를 나눠보는 게 어떤가?”

“아 쫌! 눈치 없이 그러지 말고 조용히 하실래요?”

그때 멀리서 아스달이 불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런 아스달을 유안나가 나무랐다.

카이든은 그쪽으로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내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마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건지. 계획이 정말 있는 건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는데 꺼낼 수 있는 질문은 없었다. 지금은 그를 믿어야만 한다.

카이든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왜 내 생각을 하고 나를 걱정했는데? 응?”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뺨을 움켜쥔 그가 나를 채근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생기를 담고 반짝였다.

예전에 카이든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그는 좋아한다는 개념이 뭔지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를 향한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고도 단언했었고.

‘마거릿, 네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개념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 그게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아닌 것 같아.’

‘그냥 난 네가 없으면 보고 싶고, 네가 웃는 게 기분 좋고, 너와 닿는 게 좋고, 네가 오직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너를 만지는 게 좋아. 네가 나를 만져 주는 것도 좋고.’

‘허락 없이 입맞춤한 건 미안해. 그런 이유로 용서해 달라고 하면 나 미워할 거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사랑에 서툴렀다. 나도, 에녹도, 카이든도 그리고 유안나와 섬에 있던 모두.

카이든은 더군다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어서 그게 어떤 감정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랑은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카이든이 내게 원하는 사랑이 에녹과 같다는 걸 안다. 하지만 카이든을 향한 내 사랑은 그것과는 형태가 달랐다.

“당연히 걱정하고 너를 생각하지. 네가 소중하니까. 꼭 이성적인 감정만이 사랑이라고 하는 건 아니잖아.”

“사전적 의미를 말하고 싶은 거라면 나도 알아.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남자로서야.”

카이든이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대답했다. 그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생각을 많이 해봤어. 이 몸 속에서, 굉장히 많은 시간 동안, 계속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내 삶조차도. 그리고…….”

너도.

분명 입 모양은 그런 단어였던 것 같은데, 너무 작게 속삭인 말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았어. 남자로서든, 친구로서든. 아니면 한 인간으로서 애정하는 마음이든.”

카이든이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진짜 중요한 건, 네가 날 어떤 형태로든 사랑한다는 거고. 누군가에게 사랑이란 걸 받아본 내 인생도 더는 나쁘지 않다는 거지.”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그가 한숨처럼 무겁게 고개를 내렸다. 그의 이마가 봉인된 마법진의 투명한 벽에 가로막혔다.

“그래서 고마워. 마거릿. 조금만 기다려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주변으로 옅은 바람이 불었다. 카이든은 마치 이런 상황을 예감했다는 듯이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마치 어떤 고통을 참아내듯이.

크윽.

“카이든!”

벽을 쿵쿵 두드리며 외쳤지만 카이든은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그가 울컥, 다시금 피를 토해냈다.

카이든이 주저앉은 흙바닥을 에워싸고 비정상적인 바람이 휘몰아치며 바닥이 깊게 패였다. 그것은 곧 강렬한 회오리바람이 되어 솟구쳐 올랐고 그 안에 있을 카이든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젠장, 카이든!”

한참이 지나서야 바람이 걷혔다.

그 안에 서서 여유작작한 얼굴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이는 제나스였다.

“아, 방심했어. 시동어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제나스가 방금 한 말로 유추해봤을 때 전에 말했던 ‘시동어’을 읊어 카이든을 가사상태로 만든 모양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겐 마력이 얼마 없어. 그래서 시동어를 읊어줘도 우리 후손님 몸을 완전히 차지하기란 불가능해. 내가 다시 마력을 손에 쥐면 모를까.’

나는 플로네 공작 성 정원에서 제나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의 그는 상당량의 마력을 손에 쥔 상태였다. 조금 전의 그가 ‘이제 마법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거든.’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남은 마력석을 전부 흡수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긴장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유안나가 차원의 균열을 메우는 동안만이라도 카이든이 부디 그 시련을 이겨내고 극복해줬으면 좋겠다. 절대로 제나스의 힘에 굴복해서 동면에 들어가는 것만 아니면 된다.

“지금은 뭘 해도 늦었어. 걱정 마. 말했잖아. 너는 내가 보호해줄게.”

“X 같은 소리 집어치워. 네 보호 따윈 필요 없으니까.”

내 욕설에 제나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꼭 마치 아끼는 애완동물의 재롱을 귀여워하듯이 말이다.

“아 그리고 이 녀석 말이야. 마력석 몇 개 먹었어?”

제나스가 내 어깨에 있는 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캬아아악!

그러자 은지가 격하고 날선 반응을 보이며 제나스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건방진 게 귀엽네. 잡아먹고 싶어지게.”

“뭐?”

“농담이야. 그래서 몇 개 먹었는데?”

“내가 대답할 것 같아?”

“그래, 뭐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지.”

내 말에 제나스가 입을 다물었다. 웃음기가 만연했던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기다리고 있어. 찾는 게 있거든. 그 다음에 너는 꺼내줄게. 얼른 계획을 실현해야지.”

제나스는 그렇게 말을 한 뒤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그는 정말로 섬에 무언가 찾을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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