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21)화 (221/234)

* * *

아나타가 펜던트를 이용해 폭파시킨 섬은 일부 침수되고 여기저기 무너지면서 엉망이 되었다.

알레아 남섬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으나 북섬은 오두막 주변을 제외하고는 발 디딜 땅이 많지 않았다.

제나스의 오두막도 마찬가지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오두막에 있는 ‘문’만은 제 자리를 지키며 굳건히 서 있었다.

고요하던 문 주변으로 옅은 바람이 불었다. 잠시 뒤, 문안에서 번쩍이는 빛이 발현되더니 쾅- 하고 문이 세차게 열렸다.

열린 문 안에서 한 남자가 유유자적하게 걸어 나왔다.

카이든의 몸을 빼앗은 제나스였다.

그가 나온 자리 뒤로 마치 자루에서 물건이 쏟아져 내리듯 사람들이 한데 뭉쳐 우두두 쓰러졌다.

마거릿을 품에 안고 바닥을 구른 에녹이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마거릿의 어깨를 제 품 안으로 감싸 안은 채였다.

무거운 공기가 마거릿의 일행을 압박했다.

알레아 섬은 천 년 동안 시공간이 비틀려 있던 섬이다. 한 차례 폭발이 있고서는 왜곡된 시공간 선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지만, 여전히 천년의 영향이 머물러 있듯 떠도는 공기의 흐름이 바깥과 달랐다.

물에 젖은 솜처럼 육체가 무겁고 추를 단 것처럼 몸 안의 기운이 하락하고 있었다. 일행이 이런 감각에 적응을 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마거릿은 힘겹게 어깨에 매달린 은지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다행히도 은지는 멀쩡한 상태였지만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제나스를 쳐다보며 꼬리를 팡팡 두드리고 있었다.

“다들 오랜만이지? 하. 그리웠어.”

제나스가 양 팔을 좌우로 넓게 벌려 뻗으며 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엉망인 일행의 몰골과 다르게 제나스는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뒷짐을 지고 느릿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제국군 기사 몇몇이 검을 뽑아들고 제나스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들은 얼마 걷지 못하고 발밑으로 생긴 거대한 마법진 안에 봉인되어 버렸다.

쿵-

발밑으로 생긴 마법진을 둘러싸고 투명한 결계가 세워졌다. 기사들은 결계의 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꼭 케이지에 갇힌 동물을 보는 것만 같다.

마거릿은 그 충격적인 장면에 어안이 벙벙해서 눈만 깜빡였다.

제나스가 마법을 쓴다.

워프게이트를 발동시킬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하는 마음이었는데.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하고, 또 고대했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

제나스가 발을 두어 번 구르자, 모두의 발밑으로 각각 마법진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력이라는 물리적 힘에 의해 마거릿에게서 튕겨져 나간 에녹이 그녀의 옆 마법진에 봉인됐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마법진 안에 갇혀서도 하늘 끝까지 수직으로 세워진 투명한 결계를 검으로 갈랐다. 검 주변으로 노란 전류가 흐르고 파도가 갈라지듯 투명한 벽이 갈라지자 제나스가 눈썹을 까딱이며 그쪽에 시선을 던졌다.

“역시 이쪽은 방심할 수가 없군.”

하지만 제나스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에녹의 마법진 주변으로 결계가 곧장 두 번 세 번 덧대어 씌워지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마법진 안에 갇힌 마거릿이 결계의 벽을 쿵쿵 두드리며 제나스를 노려봤다.

마법진 밖에 서 있던 제나스는 그런 마거릿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가 천천히 마거릿에게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마거릿은 재빨리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그를 향해 조준했다.

“그런 건 쏴도 소용없어. 내가 마력을 되찾았거든. 그리고 내가 제작한 탄환으로 나를 공격하겠다는 거야? 발상이 기발해.”

마거릿을 입을 굳게 다물고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푸른 바다색이 가득 담긴 눈동자에 그를 향한 증오와 분노가 가득 차오른다.

제나스는 엉망으로 일그러진 마거릿의 얼굴을 보며 그녀를 굴복시켰다는 희열감을 느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찾아야 하는 게 있거든. 그것만 찾으면 너는 꺼내줄게. 얼른 계획을 실행해야지.”

그러나 마거릿은 순종하지 않았다.

그녀가 올곧은 목소리로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정확히는 그가 아닌 카이든을 향해서.

“카이든.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

“로하데 가문에 복수하겠다는 포부는 어디로 갔어?”

제나스는 팔짱을 낀 채 그런 마거릿을 가만히 지켜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보기나 하자는 얼굴로.

한창 마법진의 봉인을 풀고자 애를 쓰던 일행들이 모두 동작을 멈추고 마거릿과 제나스를 쳐다보았다.

“……아니면, 혹시 나 때문이야?”

마거릿의 입매가 뒤틀렸다. 제나스를 향해 조명탄을 조준하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말이다.

제나스는 자신 안에 잠들어 있는 카이든의 기운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봤자 이제 와 카이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망할 영혼종속계약으로 묶여있지만, 괜찮다. 문제는 없다. 카이든의 영혼을 가사상태로 만들거나 혹은- 사라진다면, 계약 내용을 걱정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제나스가 마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시동어만 읊으면 카이든을 다시 가사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 순간, 다시금 마거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게 그냥 이대로 사라지는 거라면…….”

마거릿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그녀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제나스를 보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 길 함께해줄게. 그러니 일단 돌아와.”

그러나 제나스를 누르고 카이든이 나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나스가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간악하게 미소지었다.

마거릿은 조명탄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이대로 만약 카이든이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마거릿이 느릿하게 시선을 내려 손가락에 끼워진 아스달의 마력 반지를 쳐다봤다. 앞으로 그들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선 카이든이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했다.

‘만약 내가 차원을 넘어가고 유안나가 균열을 메워도 카이든을 살리지 못하면, 그러면 어떡하지?’

제나스가 카이든의 몸을 영원히 차지하게 된다면-

마거릿은 끔찍한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일어나줘.’

* * *

선득하고 황량한 어둠이 카이든을 감쌌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어둠 속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육체 바깥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음은 카이든의 귓가에까지 닿지는 못했다.

이대로 정말 동면에 들어가 버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제나스를 완벽하게 제압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보고 싶다, 마거릿.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거릿을 보지 못한 지 벌써 몇 년은 된 것만 같았다.

“카이든.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로하데 가문에 복수하겠다는 포부는 어디로 갔어?”

그리고 들려온 마거릿의 목소리.

어둠 속을 부유하던 카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아니면, 혹시 나 때문이야?”

그녀가 물었다.

마거릿의 영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결론적으로는 카이든 그 자신의 문제였다.

깨어나지 않는 건 카이든 본인의 의지인 것은 맞았다. 제나스를 대적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로하데’라는 굴레를 벗을 수 없었던, 그의 인생에 늘 주어진 패배감에 대해.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던 그였지만 그보다 더욱 대단한 마법사인 제나스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계획을 세우기 위해 머리를 쥐어짤수록 무기력함이 밀려왔다. 카이든은 순전히 힘으로만 상대해서는 제나스를 이길 수가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그의 영혼에 이어서 마거릿의 목소리가 전달되어 왔다.

“그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게 그냥 이대로 사라지는 거라면…….”

그녀는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길까지도 함께해줄게. 그러니 지금은 일단 돌아와.”

‘그냥 이대로 사라지겠다’는 말은 죽겠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길마저 마거릿이 함께해준다는 말을 한다.

애초에 죽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에 카이든은 고요히 눈을 떴다. 잔잔하던 어둠 속에 옅은 파동이 생겼다.

카이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거릿이 그와 함께 죽어주겠다고?’

그게 그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카이든이 아는 마거릿이라면 그런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되었다.

그런 무조건적인 애정을 주는 사람이 그의 인생에서도 한 사람은 있었다. 그것만으로 그의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목이 메고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어 그는 잠시 목을 매만졌다.

잔잔한 감정이 격렬하게 요동치자 그의 주변을 감싼 기운이 분위기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그 이상 현상을 재빠르게 감지한 건 제나스였다.

[이제 깨어날 생각이 들었나 보지?]

카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후손님. 말했잖아. 지금은 늦었다고.]

제나스는 동요조차 없었다. 사냥에서 우위를 점한 포식자의 여유로움과도 같았다.

제나스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위압감은 무게부터가 달랐다. 도저히 넘을 수 없어 보이는 제나스의 거대한 힘과 마력이 카이든을 압박했다.

그러나 카이든을 둘러싼 황량한 어둠은 휘장이 걷히듯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전부 타들어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심지에 작은 불씨가 붙었다.

그것은 열망이었다.

내면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다는.

그의 인생도 살만한 인생이었지 않은가. 마거릿이라는 찬란한 빛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는 사실 진정으로 살고 싶었던 것이다. 살만한 그 인생을 아직 제대로 만끽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러려면 제나스라는 저 거대한 벽을 어떻게든 무너트려야만 했다.

카이든은 이를 악물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조금씩 변형되고 있었다. 제나스에 의해 장악당한 마력의 파장을 바꾸고 있었다.

“늦었다니. 과연 그럴까?”

제 힘이 제나스를 넘어설 수 없을까?

정말로?

……아니다.

우습게도 카이든은 온 힘과 열정을 다해, 제 영혼마저 바칠 각오로 제나스를 상대한 적은 없었다.

카이든은 헛웃음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아니, 난 한 번도 제대로 시작해본 적이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