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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9)화 (219/234)

내 말을 들은 에녹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절망적인 기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그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마음을 정리해야 했다.

이제 겨우 마음에 움튼 싹을 자각했는데 바로 접어야 한다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목이 메는 것을 참으며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마른 침을 여러 번 삼킨 뒤에야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절 좋아하지 마세요.”

차원을 넘어가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니 무책임하게 내가 그와 사랑을 논할 수 없었다.

에녹은 내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고서 대답했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야, 마거릿. 그대에게 내 마음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 부디 딱 거기까지만 말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불현듯 예전에 카이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거릿, 네게 관심이 생기는 건 이유가 뭐든 내 감정이잖아. 그러니까 그건 내가 결정해. 방금 그 훈계는 조금 건방졌어.’

카이든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난 무슨 생각을 했더라.

‘부디 이들이 여주를 만나고서 오늘 했던 말을 후회하지 않기만을 바란다.’ 이런 생각 따위를 했었지.

그리고선 어떻게 됐지? 카이든은 자신의 말을 후회하게 됐던가?

모르겠다. 어쩌면 에녹도 내가 떠나고 난 뒤 자신의 말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예요. 최선을 다해서. 카이든을 되찾아야죠.”

“그렇게 말하면.”

말을 잠시 끊은 그가 고단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반대하겠나. 난 그대의 의견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존중해. 그대를 좋아하지 말라는 말만 제외하고.”

체념한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이 더 아파서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어두운 얼굴을 가만히 보던 에녹이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말했잖아. 몇 번이고 손을 잡는 건 내가 하겠다고.”

‘몇 번이고 손을 잡는 건 내가 하겠다. 그러니 그댄 그대 하고 싶은 대로 해. 기다리겠다.’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필이면, 왜 이제야 그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되었을까.

하지만 내 마음만 앞서서 그에게 진실되게 고백하는 것은 더 큰 지옥을 초래할 것이다. 나는 그를 향한 이 감정을 평생 홀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때, 멀리서 마법사들과 제국군을 맞이하고 있던 아스달과 유안나가 슬그머니 우리에게 다시 다가온다. 아스달이 허리춤에 손을 척 얹으며 말을 걸어왔다.

“두 사람 그러고 있지 말고 이리 와서 다시 얘기를 좀 나누지? 이제 섬에 진입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에녹은 어두운 표정을 하고서도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 내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고마워요.”

나와 에녹의 미묘한 대화를 보던 아스달이 뺨을 긁적이더니 자리를 다시 피할지 말지 안절부절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렸다.

“분위기 진짜 왜 이래.”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아스달을 보며 고개를 저은 유안나가 내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섬에 자동폭발 장치가 있다고 했잖아요. 괜찮은 걸까요?”

“우선 그 부분에 관해서 디에고 경의 조언도 들어봐야 할 것 같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섬에 대해 가장 많이 알아본 분일 테니까.”

때마침 선박이 정차해 있는 부둣가로 이동할 준비를 하던 제국군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노엘이었다. 그는 가슴 위에 주먹을 얹고 허리를 숙이며 에녹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영상구로 연락이 왔습니다. 근위대장 디에고 경입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던 투명한 유리구슬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마력을 주입하면 좌표를 찍은 이의 영상이 뜨는 식이었다.

문득 마력이 사라지면, 이런 것들은 다 쓸모가 없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혼란이 오겠는데.’

그래도 제나스가 지배하는 세상보다는 낫겠지.

에녹이 구슬 위로 손을 얹자 구슬 안으로 희끄무레한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구슬 안을 배회하던 안개가 걷히더니 디에고의 얼굴이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란그리드의 광명을 위하여. 전하를 뵙습니다.]

디에고가 에녹을 향해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영상구 속으로 비치는 디에고와 마르셀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직까지 외부의 공격을 받은 적은 없는 듯했다.

“우선, 섬에 들어가는 건 보류해야겠어요. 제나스의 마법 실험 일지에 따르면 섬에 자동폭발장치가 있다더군요. 그가 이 근처에 있다면 섬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일이잖아요.”

내가 디에고에게 말을 전하고 있을 때 에녹이 문득 의문을 제기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군. 아나타가 자동폭발장치를 고안했다면, 우리가 탈출할 때는 그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왜 제나스의 펜던트를 사용한 건지 의문이 드는데.”

에녹이 제기한 의문에 잠시 좌중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말이 맞다. 자동폭발장치는 왜 만든 것일까. 증거를 인멸하려고?

마법 실험 일지엔 아나타가 자동폭발장치를 고안했다고만 적혀 있지, 그 이유는 적혀 있지 않았었다.

혹시 그 자동폭발장치라는 게, 섬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걸 폭발시키는 장치라면?

‘아직 섬에 천년 동안 모아둔 마력이 남아있다고 했었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것 또한 모두 추측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고 절망했다.

“이건 제나스를 만나야만 알 수 있는 문제 같은데요, 젠장.”

나는 욕설을 뱉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나스는 섬에 있을까요?”

내 눈치를 보던 유안나가 물었다. 그러자 에녹이 조용히 주변을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는 거라면, 아마도.”

잠시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영상구 속의 디에고와 마르셀은 조용히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자, 그럼 이렇게 하지. 주변을 조금만 더 수색해보고, 그래도 놈을 찾지 못하면 섬으로 진입하도록 하지. 그리고 루제프 주교도 찾아야 해.”

아스달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에녹의 지휘 아래 제국군과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본격적으로 란그리드 남부 해역 수색이 시작됐다.

에녹은 수색대를 지휘하며 마거릿과 유안나, 아스달이 있는 부둣가로 돌아왔다.

그곳에 서서 해역을 둘러보던 마거릿의 어깨 위에서 내려온 은지가 인간화를 했다. 마거릿의 옆에 서 있던 아스달이 대번에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젠장, 깜짝이야! 이건 대체 뭔가?”

“은지는 은지야!”

은지가 마거릿의 다리춤에 매달리며 외쳤다. 아스달은 물론 유안나도 신기한 얼굴로 아이를 쳐다봤다.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나 아이는 누가 보아도 남아였다.

아스달의 격한 반응에 마거릿이 떨떠름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며 은지를 안아 들었다.

“은지가 진화를 했다고 했잖아요. 인간 모습으로 변할 수 있더라고요.”

은지는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갔기에 에녹은 마거릿의 품 안에 있는 은지를 얼른 제가 데려와서 대신 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달이 황당해하며 말했다.

“마물이 어떻게 인간으로 변할 수가 있지?”

아스달의 물음에 마거릿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저하께서 말하셨잖아요. 은지가 저한테 각인을 해서 일반적인 마물들과는 다른 기운을 풍긴다고요. 마력석을 먹을 때마다 진화를 하는데, 그 영향인 것 같아요.”

“아. 그랬지……. 흠. 그래도 인간으로 변한다는 건 놀랍군.”

아스달이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적이고는 에녹의 품에 안긴 은지 앞을 기웃거렸다.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던 마거릿이 박수를 치며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다들 그만하고 수색에 집중 좀 하죠. 은지야, 언니한테 와.”

“응!”

에녹에게 안겨 있던 은지가 마거릿을 향해 팔을 뻗었다. 물론 에녹은 마거릿에게 은지를 넘겨주지 않았다.

“마거릿을 힘들게 하는 건 용납 못 한다.”

“우웅?”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언니가 힘든 게 좋나.”

“아니, 시러…….”

“그럼 참아.”

“참는 것도 시러. 은지 그럼 뱀 할래. 뱀은 안 무거워!”

그렇게 대답한 은지가 미련 없이 뱀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니, 바닥을 기어 마거릿 앞에 다가갔다. 녀석이 고개를 쭈욱 들고 마거릿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안아달라는 뜻 같았다.

에녹이 한숨을 내쉬자 마거릿이 웃으며 괜찮다 말하고는 녀석을 들어 어깨에 올렸다. 아스달이 그 앞에서 은지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말을 걸었지만 뱀으로 돌아온 은지가 말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왁자지껄한 모습을 바라보던 에녹은 유안나를 조용히 불러냈다.

“잠깐 얘기 좀 하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웃으면서 마거릿을 보던 유안나가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봤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자리를 비켰다.

유안나가 흘끗 부둣가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마거릿과 아스달, 은지를 보다가 에녹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에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하긴, 언제는 에녹의 속을 알 수 있었던가. 그는 늘 의중을 읽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였다.

고요하게 서서 유안나를 보며 잠시 망설이는가 싶던 에녹이 이내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거릿이 차원을 넘어가면,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지?”

예상은 했다. 그가 이렇게 그녀를 불러 따로 얘기할 만한 건 마거릿과 관련된 일 말고는 없다는 걸.

구체적으로 마거릿이 차원을 넘어가야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다. 하지만 아스달을 제외하고 유안나와 에녹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 이후는……. 저도 모르겠어요.”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

“하…….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런 선택지를…….”

“알잖아요. 선택지는 없었어요.”

유안나의 덤덤한 대답에 에녹은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물었다.

“마거릿이 그대를 살렸는데. 어떻게 그렇게 잔인한 선택을 하게 만들 수가 있나.”

물론 유안나가 마거릿을 살렸기 때문에 마거릿이 유안나를 살렸다는 인과관계가 발생한다는 걸 에녹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안나의 잘못이 아니란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머저리같이 그녀를 탓하고 말았다.

“……미안하군. 내가 실언했다.”

“사실인데, 뭘 사과를 하고 그래요. 역시 우리 황태자 전하께선 참 신사적이야.”

유안나는 꾸밈없는 화법으로 태연하게 말하고는 넌지시 마거릿을 바라봤다. 그녀를 따라 마거릿을 향해 고개를 돌린 에녹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리고 이어진 에녹의 말을 들은 유안나가 두 눈을 끄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진심이세요?”

유안나의 되물음에 에녹이 고요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였다.

“플로네 영애!”

아스달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사위가 소란해졌다.

에녹과 유안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반사적으로 마거릿을 향해 뛰었다. 부둣가 끝에 선 누군가를 향해 마거릿이 조명탄을 겨누고 있었다.

그 끝엔 놀랍게도 카이든이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로 서서 우아하게 주변을 훑는 그의 모습은 평소의 카이든과 좀 달랐다. 어둡고 짙은 붉은 눈, 고요하게 광기가 들린 시선이 잘 벼린 칼날처럼 반짝였다.

그건 카이든이 아니라 제나스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에녹은 다급하게 마거릿을 잡아 제 뒤로 넣었다.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거릿을 이대로 눈앞에서 잃는다고 생각하자 이성이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갔다.

그가 검을 빼어들고 제나스를 향해 겨누자 제나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마거릿의 주변에 선 사람들을 찬찬히 훑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마거릿, 난 여기서 너만 기다렸는데. 이 짐들은 다 뭐야?”

“X 같은 소리 할 거면 그냥 입 닥쳐.”

물론 곧장 마거릿의 욕설이 내다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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