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8)화 (218/234)

* * *

여전히 파도가 거칠었다.

디에고와 마르셀은 군함의 뱃머리에 서서 망원경을 들었다.

파괴된 알레아 섬은 안개만 끼어있을 뿐, 그 잔해가 고스란히 눈에 보였다. 섬 자체가 워낙 커다랗기 때문이었다.

디에고는 부서진 알레아 섬을 다소 착잡한 얼굴로 바라봤다. 멀리서 보니 정말로 정말 별 것 없는 섬이었다.

“저기에 갇혀 있었다고.”

마르셀이 분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팔짱을 끼고 덤덤한 얼굴로 서 있던 디에고가 흘끗 제 동생을 바라봤다.

“시공간을 비틀어서 지나가는 선박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

디에고의 말대로 섬 주변에 비정상적으로 산재한 안개는 섬에 마력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하께 답변은 왔어? 조금 더 빠른 속력으로 우회하면 진입 가능할 것 같은데.”

마르셀의 물음에 디에고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르셀에게서 망원경을 받아들고 다시 섬을 살폈다.

섬을 찾고 또 섬에 진입할 방법을 찾는 데만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이제는 진입할 방법도 찾았으니 섬에 들어가서 증거를 확보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아직 에녹에게서 진입 허가 명령은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무슨 일인지 지난밤부터 연락이 닿질 않았기 때문이다.

‘모란꽃 세력이 수를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섬을 찾아 선점해야 한다고 했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디에고가 결심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진입하도록 하지.”

그리고 디에고의 지시에 마르셀이 진입 명령을 내리던 때였다.

피융-. 퍼엉-! 펑!

하늘 위로 붉은 연기가 길게 쏘아 올라간다. 분명 육지 쪽에서 쏘아진 연기였다. 이윽고 그것이 거대한 불꽃이 되어 하늘을 장악했다.

“뭐, 뭐야……!”

마르셀이 섬 진입 명령을 내리려다가 당황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디에고는 저 불꽃을 본 적 있다.

바로 알레아 섬에서.

디에고는 황급히 마르셀을 향해 알레아 섬 진입 명령을 철회했다.

“잠깐, 여기서 대기한다. 진입은 황태자 전하께서 오신 뒤에 하도록 하지.”

마거릿이 이곳에 있다면, 필히 에녹 또한 함께 있을 게 분명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저 불꽃에 대해 아는 거야?”

“신호다. 플로네 영애가 보낸.”

“잠깐, 플로네 영애……? 뭐야. 귀족 영애가 저런 신호를 보낸다고? 아니, 무엇보다 그분은 여기에 어떻게 온 건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봤어?”

마르셀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러나 디에고는 어느 질문에도 명확히 답변하지 않은 채, 짧게 지시를 내렸다.

“설명은 전하께서 오시면 하지. 이만 배를 돌려.”

* * *

모래사장에 모여 앉아 우리는 유안나에게서 차원의 균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천 년 전, 차원에 균열이 생겨 틈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 이유 말이다.

“마력과 신력의 과용으로 생긴 균열이라니, 흥미롭군.”

유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에녹이 꺼낸 말이었다. 그 말 그대로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이 세계는 마력과 신력이 존재하는 세계로 이 힘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도가 대단히 높았다.

사람들은 아프면 의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신관을 찾는다. 사회와 기술의 발전 역시 대부분 마법과 신력에 의존해 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이 힘을 가진 마법사 협회와 교황청의 힘이 커지고 부패해 갔다.

제나스는 이러한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천 년이 넘도록 모란꽃 세력을 지배해온 것이다.

유안나가 교황청에서 조사해온 내용에 따르면 차원의 균열 또한 그 힘의 과용으로 인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이 세상엔 마력과 신력이 없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유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아스달이 중얼거렸다.

실제로 제나스가 차원의 균열을 무너트리려는 목적 중 하나도 그 반동을 통해 이 세상의 마력을 전부 없애기 위함이었다.

물론 세상 모든 사람의 마력을 무너트리고 저 혼자만 마력을 쥔 뒤에 모두를 지배하겠다는 그의 발상은 미친 거지만.

“차원의 균열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가.”

에녹의 물음에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메울 수 있어요.”

“어떻게요?”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란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안나가 씁쓸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힘의 부작용으로 차원에 균열이 생긴 거라면, 그 힘을 없애버리는 게 최선이겠죠.”

“그게 가능해요?”

“네. 할 수 있어요. 제가 가진 신성력은 특별하거든요. 제가 백 년 만에 나타났다는 성녀라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셨죠? 이날을 위해서 태어났나 봐요, 저는.”

유안나는 중대한 발표를 하듯이 좌중을 한번 훑고는 이어서 말했다.

“제 신성력은 치유뿐 아니라 정화의 힘을 갖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 정화의 힘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뛰어나요.”

정화의 힘이라니. 혹시 그래서 유안나가 실험체 명단에 올랐던 걸까. 그러고 보니 제나스는 유안나를 좀 더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했다.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고 말하며 말이다.

“아 그리고 마거릿, 지난번에 보내준 편지 읽었는데. 제나스가 마력이 없는 세상에서 사용하려고 만든 마력석이요. 그건 직접 파괴해주세요. 그것까지는 제가 통제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제나스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어루만지며 그녀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성력이라 해도 그런 커다란 힘을 한 사람의 몸으로 사용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없나요? 보통의 힘이 아닐 것 같은데.”

내 물음에 유안나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제 걱정해주는 마거릿 좋아요.”

“농담하지 말고요.”

“그런 건 묻지 마세요. 차선책이 단 한 가지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잖아요.”

유안나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히려 말을 안 해주니 더더욱 걱정이 됐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라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걱정이 가득 담긴 내 표정을 본 유안나가 당황하더니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렇게 걱정할 건 아니에요. 진짜예요.”

이 말이 그저 나를 위한 빈말이었는지 아닌지는 아마 그 상황이 실제로 닥쳤을 때에서야 알 수 있겠지.

그때 에녹이 내 어깨에서 고개를 흔들며 눈치 없이 혼자 흥이 나 있는 은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은지는 어떻게 되지? 마력이 사라진다면, 이 세계의 마물들은…….”

“마물은 전부 사라질 거예요.”

“네?!”

“그런데 은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마력석을 삼켰잖아요. 그 마력석은 차원의 균열이 무너지고서도 멀쩡한 힘이라면서요.”

‘마력이라는 게 공기처럼 우리 몸 안에 존재한다는 건 알지? 차원의 문이 열리면 그게 무너져 내려. 흐름이 망가지니까 일반인들은 마력을 사용도 못 하겠지. 그리고 저들은 그걸 온전하게 다룰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싶었던 모양이고.’

‘이 마력석이 바로 그 무너진 마력의 흐름을 다루는 물건이야. 일반인들이 마력에 손도 못 대고 있을 때, 이 마력석을 이용해 대륙을 지배할 생각이었다더군. ……실험이 실패했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말이야.’

전에 카이든이 해준 말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다시금 은지가 삼킨 마력석이 7개뿐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린네하온 대주교가 훔쳐간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마력석까지 먹으면 좋을 텐데.

“문제는 은지보단 사실 마거릿이죠.”

“네? 저요?”

“마거릿의 마력은 저희랑 흐름이 다르잖아요. 차원을 한번 넘어 온 영혼이라.”

그렇게 말한 유안나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나를 유심히 살폈다.

“알레아 섬에서 유일하게 마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아나타가 고안한 섬의 시스템이 마거릿에게만 통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제 정화의 힘이 마거릿에게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유안나의 말을 들으며 나는 갑자기 모란꽃 세력들이 마력석을 사용할 때 몸이 반응했던 일을 떠올렸다. 하늘에 균열이 생겼을 때, 마치 그 균열에 내 몸이 반응하는 것처럼 몹시 아팠었지.

“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일 아닌가? 플로네 영애 혼자 마력을 갖고 있다는 소리잖나.”

아스달의 질문에 유안나가 잠시 괴로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건……. 안돼요. 차원의 균열을 메울 수 없잖아요. 제나스가 바라던 게 그건데.”

그동안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 내가 차원을 넘어가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결론을 내려야 할 때였다.

왜 하필 나였을까. 내가 실험 도중 차원을 넘어가 한국에서 살다 오지만 않았다면, 이런 희생을 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아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는 벌써 실험섬에서 죽었을지도. 게다가 유안나는 섬에서도 자신을 희생해 우리 모두를 살리지 않았나.

나는 결심이 선 얼굴로 유안나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성녀님은 성녀님의 역할을 끝까지 해주세요. 저는 제 역할을 할게요. 우리 모두 제나스에게 빅 엿을 주자고요.”

그러자 아스달이 빅 엿이 뭐냐고 되물었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데, 에녹이 갑자기 내 팔을 부여잡았다.

팔을 쥔 손에 지나칠 정도로 힘이 세게 들어가 있었다. 팔이 좀 아팠지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무너질 듯한 표정 때문이었다.

“절대 안 돼.”

“뭐가 안 돼요?”

나는 조금 당혹스러워서 변명했는데, 에녹의 얼굴은 매우 단호했다.

“희생하려는 것 아닌가. 그댄 늘 그래왔지.”

“희생은 우리 모두가 하고 있어요.”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안나가 본인을 희생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그녀 또한 뭔가를 희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든 역시 자신을 희생하고 있지 않은가. 제나스라는 거대한 악을 자신 안에 품고서.

“에녹, 생존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다수의 희생과 한 사람의 희생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답이 뭔지 알잖아요.”

우선 모두가 살아야 하지 않나. 다른 건 그 다음이다.

내 대답을 들은 에녹이 무언가 화가 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마침 우리 앞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그리고 마법진 위로 속속들이 카이든 소속 마탑의 마탑주들이 도착했다.

그러자 나와 에녹의 눈치를 보던 유안나와 아스달이 잘됐다는 듯이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는 에녹과 둘이서 마주 보고 앉아 잠시 침묵했다.

“생존보다 중요한 건 없다면서, 그대는 왜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거지?”

한참의 침묵 끝에 에녹이 말했다. 그가 내 뺨 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뺨에 닿았다.

“그대가 계획하는 게 뭐든, 차라리 내가 하겠다.”

“그건 안 돼요.”

나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나를 대신해서 에녹이 희생하는 건 절대로 볼 수 없다. 절대로.

“왜지? 마거릿, 왜 그대는 희생해도 되고. 나는 안 되나.”

에녹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나를 봤다.

“난 그대를 위해서 목숨도 바칠 수 있어. 내겐 나의 생존보다 그대가 더 중요하니까.”

나는 그 순간 내가 지나칠 정도로 에녹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이젠 이 감정이 한철 지나갈 감정도, 흔들다리 효과가 아니란 것도 이제는 알았다.

마치 물감이 물에 번지듯이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렇게 아주 천천히, 그렇게 나는 에녹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걸 결단코 보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섬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그가 마물로부터 나를 처음 지켜줬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사라진 나를 찾아 마물이 득실거리는 숲속을 밤새 헤매고 다녔을 때? 텐타티오넴을 핑계 삼아 그와 키스를 나눴을 때였을까.

내가 이진주임을 알고도, 그리고 과거에 그에게 못되게 군 마거릿임을 알고도 그가 나를 좋아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래 어쩌면 제나스의 오두막에 진입하기 전, 달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밤하늘 아래서 그가 내게 고백을 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대 말대로 상황이 만든 찰나의 감정일 수도 있겠지. 부정하고 싶으면 부정해도 좋다. 그런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을 하고도 제대로 된 마음을 전하는 건 내게 짐을 될까 봐 미뤄두겠다고 말하던 남자였다, 에녹은. 지금까지도 그는 내게 짐이 될까 봐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지 않았고 인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생존보다 중요한 건 내 목숨이라 말해주는 사람.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희생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에녹이 오로지 나를 대신할 목적으로 무분별한 희생을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녹, 당신은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어요. 성녀님께 얘기 들었잖아요. 이건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