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7)화 (217/234)

* * *

유안나는 파도치는 해안가에 서서 손으로 그늘을 만든 뒤 주변을 훑었다.

그들 일행은 란그리드 제국 남부 해안가에 도착했지만, 제나스도 디에고 형제도 란그리드 제국군도 발견하지 못했다.

“여기가 아닌가?”

유안나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아스달이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곳이 맞는데. 디에고 경이 마지막으로 보냈던 좌표가 이곳이라네.”

아스달이 지도와 해안가를 번갈아 보다가 의아한 얼굴로 에녹을 돌아봤다.

“그런데 지원군은 언제 도착하나?”

에녹은 내내 마거릿의 안색을 살피고 있다가 뒤늦게 아스달을 쳐다봤다.

“오늘 중으로 도착한다고 했으니 잠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좋겠군.”

그때 마거릿이 천천히 바닷가 앞으로 걸어갔다. 모두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는데, 그녀가 드레스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드는 게 보였다.

“마거릿?”

유안나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조명탄에 탄창을 열어 탄알을 채워 넣고 있었다.

“신호를 보내려고요. 디에고 형제에게요.”

마거릿이 하하. 영혼 없이 웃으며 말했다. 유안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근처에 망할 제나스가 있으면 어떡해요?”

“그럼 상황을 더 빨리 정리할 수 있겠죠.”

마거릿의 말에 그들 모두 결국 동의하고는 침묵했다. 그러자 마거릿이 웃으며 조명탄의 장전 레버를 당겨 내리더니 하늘을 향해 조명탄을 조준했다.

이윽고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자 붉은 연기가 하늘 위로 쏘아 올라갔다.

수초 뒤, 거대한 불꽃이 되어 퍼지는 것을 그들은 가만히 바라봤다. 마거릿이 민망한 듯 들고 있던 조명탄을 흔들어 보이며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이 조명탄이 드디어 조명탄다운 역할을 하네요.”

“……섬에서 그 불꽃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오르는군.”

아스달이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듯이 말이 없어졌다. 결국 아스달이 다시 입을 열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지원군이 오늘 안으로는 도착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지. 우리는 잠시 머리라도 식히면서 계획을 세우는 게 좋겠군. 얼른 망할 제나스와 주교님 찾고 마력석도 부수고 돌아가자고.”

“좋아요. 망할 제나스, 빨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주교님도 걱정되고요.”

유안나는 아스달의 말에 동의하며 이를 갈았다. 그들 모두 제나스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섬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것과 더불어 아스달은 제나스에 의해 한쪽 눈을 잃었고 그녀는 섬에 영혼을 바칠 뻔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들 제나스는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건 마거릿도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앉을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데.”

마거릿이 곤란하단 얼굴로 중얼거렸다.

계획을 세우기 위해 근처에 앉을만한 장소를 물색했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그들은 결국 모래사장에 앉기로 했다.

“내가 옛날 같았으면 이런 모래에 절대 그냥 앉질 않는데.”

아스달이 투덜거리며 모래사장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들 일행 중 가장 먼저 자리에 앉은 것이다.

도착하고서부터 아스달은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에 반해 마거릿은 내내 어두운 얼굴이었고 에녹은 그런 마거릿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유안나는 아스달 옆에 앉으며 그런 마거릿에게 말을 걸었다.

“은지는 괜찮아요?”

마거릿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퍼뜩 든다. 마거릿이 은지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괜찮아요. 마력석을 먹을 때마다 녀석에게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진화를 하더라고요.”

“호. 진화라니 그거 좋은 소식이군.”

아스달이 마거릿의 어깨에 있는 은지의 머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자 은지가 뿔이 난 얼굴로 그에게 작게 불을 뿜었다. 아스달이 그걸 보고 요란을 떨었다. 유안나는 잠시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에녹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꼰대 처분은 어떻게 한대요?”

“연합 재판이 열린다더군.”

팔짱을 끼고 고요히 앉아 있던 에녹이 대답했다.

연합 재판은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였다. 정확히는 마법사 협회와 교황청이라는 국가 외 기간 때문에 생긴 제도라고 봐도 무방했다.

연합 재판이 열리는 장소는 매년 매해, 또는 사건마다 달라진다. 그리고 이번 재판은 사건이 란그리드 제국에서 일어난 만큼, 란그리드 황궁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마, 이번 모란꽃 세력 일원 모두 연합 재판에 회부될 것이고 목격자가 한둘이 아니니 애매하게 넘길 수도 없을 거야.”

에녹의 대답에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에녹과 마거릿의 분위기가 묘했다. 정확히는 내내 생각에 잠겨 있는 마거릿과 그런 마거릿을 신경 쓰느라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 에녹의 모습이지만.

“두 사람 싸웠어요? 지금 나 눈치 없이 여기 껴 있는 건가?”

유안나가 조심스레 말을 걸자 마거릿이 그제야 당황해서 에녹을 쳐다봤다.

“우리가 싸워요?”

에녹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나를 봤다.

“싸운 적은 없지.”

“뭐예요. 그 애매모호한 대답은?”

“신경 쓸 것 없다.”

에녹은 조금 의기소침한 듯이 대답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에녹, 그 태도는 뭐예요. 그렇게 대답하면 제가 뭐가 되나요?”

마거릿의 물음에 에녹이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영애는 신경 쓸 게 많지 않나. 배려를 해주었을 뿐이다.”

“네? 그건 또 무슨 소리죠?”

마거릿이 계속해서 질문 공세를 하자 에녹이 미간을 좁혔다.

“마거릿.”

“네.”

“나도 체념하는 법을 익히려고 하는 것뿐이야. 그러니 지금은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에녹은 그 이상의 부연설명을 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딱히 마거릿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말 그대로 무언가에 체념이라도 한 것처럼 해탈한 얼굴이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일단 겉으로 보기엔 그랬는데, 그의 속도 차분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유안나는 어색한 얼굴로 그들을 보며 웃다가 품 안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자, 모두 집중해주세요. 이거 차원의 균열에 관한 교황청의 실험 일지거든요.”

* * *

사건 발생 당일, 플로네 공작 성의 주방 뒷문.

성곽의 횃불만이 밝히고 있는 구석진 어둠 속에서 날선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린네하온은 마거릿의 하녀 바네사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녀의 새하얀 목에 칼날을 드리웠다.

그는 눈앞에 선 남자를 향해 경고했다.

“비켜.”

그러나 남자는 미동도 없이 고고하게 서 있기만 했다.

어스름한 밤하늘에 산재한 잔운이 걷히자 남자의 머리 위로 찬란한 달빛이 쏟아진다. 그마저도 신성하고 거룩해 보인다.

그것이 끝내 린네하온의 심기를 뒤틀리게 했다. 남자는 늘 그랬다. 저 혼자만 고결한 신의 대리자인 척. 신의 선택을 받은 완전무결한 성직자인 척.

린네하온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다시 한 번 손안에 쥔 하녀를 당겨 칼날을 거칠게 세웠다.

“루제프 카인 디페르데. 비키라고 말했어.”

“그래봤자 소용없어, 린네하온.”

루제프는 무심한 얼굴로 린네하온과 바네사를 훑었다.

실력으로는 린네하온이 루제프를 이길 수 없다. 바네사를 크게 신경 쓰지만 않는다면 루제프는 손쉽게 린네하온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네사는 마거릿이 아끼는 하녀였다. 그녀를 죽게 놔둘 순 없었다. 거기다가 루제프는 린네하온이 손에 쥐고 있는 수상한 주머니를 발견했다. 그 주머니 사이로 보이는 돌덩어리도.

사라진 마력석을 그가 전부 훔쳐 달아나고 있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저걸 가지고 뭔가를 하려는 모양인데,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넌 날 이길 수 없어.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루제프의 손바닥 위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빛이 점차 크기를 키워 그의 몸 주변을 넓게 선회했다.

린네하온은 루제프가 신성력을 발현하는 것을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의 말대로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꺾이는 쪽은 린네하온이었다. 지금껏 루제프에게 당한 열패의 수모만 해도 몇 번인가……!

‘젠장, 신호를 보내면 워프게이트를 연다더니!’

린네하온은 초조하게 주변을 훑었다. 플로네 공작성에서 마력석을 사용해 하늘 위로 신호를 보내면 로하데 후작이 워프게이트를 열기로 했었다. 그래서 미리 이곳으로 좌표까지 보내줬었는데.

‘그런데 왜 아직도……!’

린네하온은 바네사의 멱살을 쥔 채로 빠르게 옆으로 반 바퀴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그가 있던 자리에 예리하고 뾰족한 빛으로 만든 창이 꽂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 여자가 죽기를 바라나?”

린네하온이 바네사의 목에 드리운 칼날에 힘을 주자 바네사가 울음을 터트렸다.

“흐윽.”

그러자 루제프가 주춤한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마거릿 아가씨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죽어도……. 윽.”

“닥쳐라.”

린네하온이 칼날을 더 깊게 누르자 바네사가 결국 입을 다물었고 루제프도 걸음을 멈췄다.

때마침 그들이 선 흙바닥 위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로하데 후작이 워프게이트를 발동시킨 모양이다.

린네하온은 하녀 바네사를 인질로 잡은 채, 마법진 위에 서 있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루제프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루제프의 당황한 얼굴이라니. 짜릿한 쾌감이 전신에 차오른다. 린네하온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그에게 향해 말했다.

“이긴다는 것이 꼭 무력만으로 실현되는 건 아니지.”

마법진에서 생성된 빛은 하늘까지 일직선으로 빛기둥을 만들었다. 린네하온은 바네사를 인질로 내세운 채로 그렇게 워프하고자 했다.

마법진의 발동이 끝나기 직전에 루제프가 함께 워프게이트에 오르기 전까지는.

“뭐, 뭐야! 너……!”

그들의 일행과 합의된 상황도 아닐 테니, 혼자 그를 따라오면 불리한 것은 루제프다. 그럼에도 루제프는 망설임이 없었다.

시야를 장악한 빛이 완전히 소거되자 거대한 모래사장과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낯선 중년 남성이 보였다.

멋들어지게 뒤로 정리해 넘긴 은발과 붉은 눈, 로하데 후작 가문을 상징하는 외견이다. 중년의 신사가 깔끔하게 정리한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린네하온에게 물었다.

“주교님. 이자는 누굽니까.”

그가 질문하자 순간 방심한 린네하온의 손에서 루제프가 재빨리 바네사를 빼돌렸다.

하지만 린네하온은 바네사에겐 별 미련 없는 없다는 듯 물러나며 로하데 후작 옆에 섰다.

어차피 바네사는 그가 로하데 후작이 있는 란그리드 남부 해안으로 워프하기 위해 잡아둔 인질이었다. 이젠 그 역할을 끝냈으니, 이대로 루제프와 함께 죽여야 했다.

“루제프 대주교입니다. 생존자 중 한 명이니, 이곳에서 저 하녀와 함께 죽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요? 대체 일처리를 어떻게 하는 겁니까. 저들이 왜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까!”

린네하온의 말을 전해 들은 로하데 후작이 성가시다는 듯 목소리를 돋웠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루제프는 긴장했다.

린네하온 한 사람이면 몰라도, 마법사 협회의 수장격인 로하데 후작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는 건 루제프에게도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긴장으로 굳은 루제프의 얼굴을 본 바네사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저, 저를 포기하시고 그냥 도망치십시오, 주교님. 제가, 제가 쓸모가 없어서……. 마거릿 아가씨께도 주교님께도 짐이 되고 있습니다.”

상대를 경계하고 있던 루제프의 시선이 흘끗 그녀에게로 향했다.

‘쓸모가 없어서.’

섬에서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던 문장.

그리고 대주교가 되기까지 그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문장.

린네하온은 늘 루제프가 모든 걸 아무런 노력 없이 쉽게 얻었다고 생각했다. 날 때부터 타고난 재능과 가문의 뒷배 덕이라고 말이다.

‘넌 우리 가문의 자랑이야. 그러니 버텨라. 최고가 되어라. 다른 사제들에게 뒤처지는 꼴은 볼 수 없다.’

루제프가 나고 자란 디페르데 가문은 대대로 대주교와 교황을 배출한 가문이다. 그리고 디페르데 백작은 루제프에게 그 명성을 이을 것을 강요해왔다.

꼭 마치 그가 최고가 되지 않으면 그의 존재가치는 쓸모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초조하게 엇박자로 뛰던 심장이 천천히 이완되는 느낌이었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사고회로가 이성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로하데 후작과 신성력을 발동시킬 준비 자세를 취한 린네하온을 보던 루제프가 바네사에게 말했다.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플로네 영애께 당신은 소중한 사람 아닙니까.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이에게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바네사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의 손안에서 생긴 유성 같은 빛들이 공전하더니 크게 그의 오른팔을 선회하고는 첨예하고 기다란 창을 만들어냈다.

루제프는 새하얀 빛무리로 이뤄진 창을 손에서 한 바퀴 휘두르곤 상체를 숙여 공격 태세를 취했다.

그가 고요히 바네사를 향해 말했다.

“뒤로 물러나십시오. 지켜드리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