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전하께서 언니를 보러 가는 길이라고 하셔서 같이 왔어.”
내 의아한 시선에 로즈메리가 황급히 변명했다. 에녹은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로즈메리를 따라 방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왔다.
“앉으세요. 차 드실래요?”
“그대가 괜찮은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다. 차는 사양하지.”
에녹은 찬찬히 내 얼굴을 훑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내 상태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은 조금 불안정해 보이기도 했다.
어제 정원에서의 일이 있고서 에녹은 내내 이런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내가 사라질 것처럼 불안해했다. 벌써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나를 보러 왔다 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귀찮지는 않았다, 전혀.
오히려 감사했다. 텅 빈 마음이 그가 내게 기울여주는 관심과 배려 덕에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얌전히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로즈메리가 애써 우리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침대 맡에 쭈그려 앉는 게 보였다.
“마거릿. 그런데 은지가 계속 이렇게 힘이 없었어?”
로즈메리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은 아니라고 하지만 은지를 애지중지하는 로즈메리였다.
“어, 응. 그래서 은지는 여기 두고 가야 하나 고민 중이었어. 마력석이라도 먹여볼까? 마력석을 먹을 때마다 은지가 조금씩 자라는 것 같아.”
“마력석을 먹을 때마다 자란다고?”
로즈메리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에녹도 의문 가득한 표정이 되어 나를 보고 있었다.
예전에 알레아 섬의 마물들은 마물의 모체의 힘에 의해 진화했었지. 제나스의 마력석 또한 마물의 모체와 같은 파장을 일으키니까 비슷한 효과가 있지 않을까?
“아스달 저하 말로는 마력석을 먹어도 문제가 없다고 하긴 했거든. 그렇지 않아도 은지가 마력석을 좋아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로즈메리의 말을 들은 건지, 똬리를 틀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지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스스스-
녀석이 힘들어 죽겠는데 왜 이렇게 시끄럽게 구는 거냐며 투정을 부렸다.
나는 에녹에게서 벗어나 책상 서랍에서 마력석을 꺼내왔다. 마력석을 먹이면 은지가 기운을 차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에녹도 궁금했는지 나를 따라 침대 맡에 서서 은지를 내려다봤다.
“은지야, 이거 먹어 볼래?”
나는 녀석이 일어난 참에 마력석을 들이밀었다. 은지가 마치 귀를 쫑긋 세운 것처럼 다시 고개를 들었다. 녀석이 슬그머니 내 손바닥 위로 고개를 내밀고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나를 올려다봤다.
“정말 먹고 싶어?”
내 물음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가 허락을 하기도 전에 마력석 하나를 냉큼 집어 삼켰다.
녀석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녀석의 안색이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았다. 물론 뱀은 표정이 없었으므로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녀석과 나는 공명할 수 있으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게 있었다.
나와 로즈메리의 눈치를 보던 은지가 내 손에 있는 다른 마력석 하나를 마저 집어 먹었다. 그리고 꺽-하고 기분 좋게 트림도 했다. 정말로 마력석이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갑자기 은지의 몸에서 환한 빛이 발현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은지야!”
놀라서 급히 녀석을 불렀지만 은지의 몸에서 나는 빛은 점점 더 환해지더니 급기야 시야를 잠식할 정도로 강해졌다.
잠시 후, 천천히 사그라드는 빛 사이로 무언가 달려오더니 내 허리춤을 덥석 끌어안았다.
나는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곳에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
너무도 당황스런 상황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 꼬마는 뭐야?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데 꼬마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새하얀 백발 머리를 한 아이였다. 카이든의 은발과는 다른. 마치 뱀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는 노란 동공과 마주친 나는 깜짝 놀라 굳었다.
“언니!”
아이가 단풍잎 같은 손을 내게 내밀었다.
“설마……, 은지야?”
“응 맞아! 언니!”
내 물음에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맑게 웃음을 지었다. 티 없이 맑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어, 언니가 아니라 누나 같은데.
“너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거였어?”
그동안 그렇다면 왜 사람으로 변하지 않았던 거지? 마력석을 많이 먹어서 일종의 진화라도 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러자 은지가 양 팔을 휘두르며 재차 자신에게 힘이 생겼다는 점을 어필했다.
“못생긴 돌, 먹을 때마다 은지 힘 생겨. 그래서 변했어!”
“……마력석이 정말로 녀석에게 도움이 되는 모양이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에녹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은지가 맞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은지는 보통의 마물과도 다르긴 했지.’
혹시 그간 시름시름 앓았던 것도 진화를 준비하느라 그랬던 걸까?
“나쁜 할아버지가 은지 공격해서 아팠어. 근데 못생긴 돌 먹어서 은지 힘났어! 그 할아버지 나빠!!”
차분하게 설명하던 은지는 점차 화가 나는지 종래에는 거의 씩씩거리며 말을 맺었다.
나쁜 할아버지란 교황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못생긴 돌은 마력석을 말하는 것 같았고.
그때 은지가 에녹을 향해 양 팔을 벌렸다. 안아달라는 의미 같았지만, 아무리 에녹과 내가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래도 그는 황태자가 아닌가.
“은지야. 언니, 아니 누나가 안아줄게.”
우리 애가 민폐를 끼쳐 그가 곤란해 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에녹은 개의치 않고 은지를 가뿐히 안아 들었다.
은지는 에녹이 제법 마음에 드는지 얌전히 안긴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관찰했다. 에녹에게 안겨 있는 폼도 굉장히 안정적이고 자연스러웠다.
밤빵 같은 뺨을 실룩이며 해실거리며 웃는 아이라니. 뱀일 때도 귀여웠는데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은지도 심장이 아플 정도로 귀여웠다.
“다행이야.”
나는 건강해 보이는 은지를 보며 잠시 눈시울을 삼켰다. 진화든 뭐든 무사하니까 됐다. 다행이다.
에녹의 품에 안겨 있던 은지가 내게로 한쪽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에녹이 얌전히 아이를 데리고 내게 다가왔다. 녀석이 찹쌀떡 같은 손으로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언니, 울지 마.”
“안 울어. 그리고 언니가 아니라 누나야. 내가 미안하다. 성별도 모르고 이름을 그냥 지었어.”
나는 은지를 보며 밀려오는 안도감에 눈물을 삼켰다. 옆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던 로즈메리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인간으로 진화한 마물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진화하는 방식이 조금 특이한 걸 봐선, 신수도 마물도 아닌 것 같은데.”
로즈메리의 말에 내 뺨을 만지작거리던 은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은지는 신수도 마물도 아니야!”
“그럼 뭔데?”
“메그 언니 동생이야!”
은지가 당당하게 외치고는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어찌나 귀여운지.
그래. 은지는 내 눈앞에서 태어난 아이다. 그러니까 자기 정체성에 관해선 자신도 정확히 모를 수밖에.
그런데 은지의 외침을 들은 로즈메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마거릿은 내 언니야.”
“아니야! 은지 언니야!”
“너는 인간도 아닌 게 어떻게 마거릿 동생이야?”
“아니야! 인간 아니어도 언니 동생 할 수 있어!”
“그럴 수 없어. 마거릿 동생은 나뿐이야!”
“아니야!”
나는 황당한 얼굴로 로즈메리와 은지의 유치한 말싸움을 쳐다봤다. 게다가 은지는 남자 아이인 것 같은데. 둘 다 그 점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로즈메리와 말다툼을 하는 은지를 가만히 쳐다보던 에녹이 불현듯 무언가 생각났다는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지금까지 은지가 마력석을 몇 개나 먹었나.”
“7개?”
“15개 중에서 7개를 먹었단 말이지. 저쪽은 아직 8개를 갖고 있고.”
에녹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렸다.
생일파티에서도 보았지만, 마력석의 수가 많아지니 그 효과도 배로 나타났다. 그러니 마력석을 누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지는 당연히 중요했다.
“파티에서 잡히지 않고 없어진 모란꽃 세력 관계자는 린네하온 대주교밖에 없었잖아요. 아마 그가 나머지 8개의 마력석을 가지고 간 게 아닐까 싶어요.”
파티에서 사라진 린네하온 주교와 마력석, 그리고 알레아 섬으로 오라며 사라진 제나스. 먼저 알레아 섬에 출발했던 로하데 후작.
모든 정보는 분명 한 곳을 가리킨다.
“로하데 후작이 알레아 섬에 갔다는 정보도 마음에 걸렸었는데, 정황을 보면 아마 린네하온 대주교가 그 마력석들을 로하데 후작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내 말에 에녹이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지와 말다툼을 하던 로즈메리가 우리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마력석을 많이 먹을수록 은지가 진화하는 거라면, 나머지 8개의 마력석도 은지가 다 먹어버리면 어떻게 돼? 은지는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 거야?”
“어……. 음……. 용?”
물론 아나콘다가 용이 될 수 있을 리가 없겠지만, 어차피 진짜 아나콘다도 아니고 마력을 가진 마물이었으니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내 대답에 로즈메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은지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뺨에 손을 얹고 호들갑을 떨었다.
“고서에서만 보던 용이라니. 너무 멋지잖아!”
은지가 영문을 모르고 두 눈만 깜빡이며 로즈메리의 호들갑을 구경했다. 나는 여전히 에녹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는 은지를 향해 물었다.
“다시 뱀으로 돌아갈 수는 있어? 완전히 사람이 된 거니?”
“돌아갈 수 이써! 은지 못생긴 돌 때문에 힘 생겨써! 근데 사람 모습 많이 하면, 은지 다시 힘없어.”
“그래? 그럼 얼른 뱀으로 돌아가자.”
내 말에 은지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졸린 모양인지 눈을 깜빡인다. 아휴 귀여워. 나는 은지의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은지한테 그 외에 다른 질문은 하지 못했다. 녀석이 그대로 잠이 들며 자연스럽게 뱀의 모습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꼬리를 말고 에녹의 품 안에서 곤히 잠든 모습은 정말 천사처럼 예쁘고 귀여웠다. 하얗게 생겨서는.
“은지 여기 두고 갈 거야?”
로즈메리가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나를 보며 물었다. 내가 종전 생각대로 은지를 성에 두고 갔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은지가 괜찮아졌으니 섬에도 데려가야지. 금방 다녀올게.”
나는 로즈메리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애 취급을 한다며 새초롬하게 나를 노려봤지만 손을 치우지는 않았다.
그런 우리 자매를 가만히 보던 에녹이 내게 말했다.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옷을 갈아입도록 하지.”
로즈메리는 눈치를 보다가 이니스를 보러 간다며 사라졌고 나는 얌전히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알레아 섬에서 입었던 바지와 크롭티, 항공점퍼로 말이다. 바네사가 깨끗하게 세탁을 해놓]은 듯했다.
‘기다려, 바네사.’
나는 크로스백을 멘 뒤에 조명탄과 탄알을 챙겨 넣고 드레스룸을 나왔다.
“준비됐어요, 가죠.”
은지를 데리고 나를 기다리던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비를 끝마친 아스달, 유안나를 만나고 우리는 워프게이트 앞에 섰다. 카이든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플로네 공작 성에 워프게이트를 만들어 준 덕분이다.
“섬 안으로 바로 이동하는 건 정확한 좌표를 몰라서 불가능하고요. 디에고 경이 보내주었던 남부 해안가의 좌표를 찍겠습니다.”
우리가 도착할 곳의 좌표를 설정하던 마법사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나와 에녹, 그리고 유안나와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정리하고 바로 갈게. 조심해.”
어머니와 이니스, 로즈메리가 우리에게 인사했다.
황제의 엄명이 내려졌기 때문에, 수사가 끝날 때까지는 생존자인 우리를 제외하고 파티에 참석했던 다른 일원들은 모두 공작 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여 우리는 수도에 있는 카이든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에게 지원을 받기로 했다. 범인들이 섬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디에고 형제가 막아내려면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리 중의 유일한 마법사였던 카이든이 지금은 없으니 말이다.
이후 해안가에 도착하면 황궁에서 온 지원군과도 합류하기로 했다.
나는 착잡한 얼굴로 어머니와 이니스, 로즈메리에게 애써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다녀올게요.”
얼른 루제프를 찾고 카이든을 되돌려 받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