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5)화 (215/234)

28. 생존보다 중요한 것

카이든은 깊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의 안에 자리하고 있던 음습하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 제나스에게 몸을 내어주고 자신은 내면 안으로 도망친 상태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그는 과거처럼 ‘동면’에 들어가기 직전 상태였다. 마법사들의 동면이란 곰과 뱀의 겨울잠과도 비슷했다.

소진된 마력을 스스로 보호하고 회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가사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했다.

‘마거릿, 보고 싶다.’

자신은 마거릿을 좋아하나?

그래. 좋아한다. 하지만 그게 사랑의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는 있지만, 에녹처럼 그녀에게 미쳐있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했다.

‘마거릿. 나는 내 인생이 로하데로 시작해서 로하데로 끝나게 둘 수 없어.’

‘맞아. 그것도 중요해. 하지만 카이든. 나는 네가 무사한 게 더 중요해.’

마거릿은 그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그가 누군가에게 걱정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 사실 걱정은 수없이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가 제나스의 그릇이었기 때문에 받았던 걱정이었다.

그는 탄생부터가 제나스를 위해 만들어진 아이였다. 로하데 가엔 형제가 많았으니 카이든 하나 즈음은 아쉽지도 않았겠지.

‘정 주지 마. 어차피 저건 그릇이야.’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제 의지가 없는 인형처럼 그렇게 컸다. 그는 그들이 뜻 모를 소리를 하던 이유를 알레아 섬에서 제나스를 만나고서야 알게 됐다.

그를 온전히 카이든이란 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가사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제나스가 무얼 하는지 그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다.

‘네 감정 같은 건 관심 없어. 나는 단지 너 때문에 상처받을 카이든과 그의 안위만이 걱정될 뿐이야.’

그런 말을 했었지. 마거릿이, 제나스에게.

제나스가 아닌 그를 걱정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마거릿은.

그런 너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는 그의 내면에서 단순히 사랑, 그 하나의 감정으로 치부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의 인생에 빛이자 구원자였다.

그래. 카이든은 이제 인정했다. 저도 에녹만큼이나 중증이다. 그는 마거릿을 사랑했다. 마거릿이 없는 세상에선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로하데 가문에 대한 복수만으로 살아가던 그에게 마거릿은 또 다른 삶의 이유가 되었다.

그렇기에 그는 마거릿을 독점하고 싶었다. 자신만의 마거릿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녹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건 필요 없다. 그에겐 그녀만 있으면 되는데.

그토록 소중한 그녀가 자신 곁에 있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대로 동면에 들어가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 * *

사건 다음 날, 에밀리는 무척 바빴다.

플로네 공작 성에서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하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마거릿의 생일 파티에 세계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7인 납치 사건의 배후가 들이닥친 것이다. 정확히는 에밀리처럼 파티에 잠입을 했던 것이지만!

‘이건 특종이야! 역사에 길이 남을!’

더 놀라운 점은 그 배후의 수뇌부가 바로 란그리드 제국의 황후와 교황이었다.

마법사 협회도 연루되어 있는 듯하나 마법사 협회의 수장인 로하데 후작이 빠져 있어서 그쪽과의 연관성은 조금 더 조사를 해봐야 한다고 들었다.

황제가 직접 제국군을 파견하여 플로네 공작 성을 봉쇄했고 철저하게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 조사에 앞장선 것이 빌터하임 공작이었다.

그래서 현재 플로네 공작 성은 수도에서 온 제국군들로 가득했다. 황제의 지시로 사건을 수사하고 수습하기 위해 내려온 기사들이었다.

파티에 초대됐던 사람들은 플로네 영지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 섬의 생존자들만이 황제의 허가 아래 알레아 섬으로 떠나기로 결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건의 배후 중 일부가 섬으로 도망쳤다는 정황이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사에서 제외되어 플로네 공작 성을 떠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에밀리는 그들이 떠나기 전에 서둘러 마거릿을 취재해야 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단연 마거릿 로즈 플로네였다.

교황을 무력화시킨 것은 물론, 수십 마리의 마물을 그녀 혼자 잡아 죽였다지. 당시 마물 진압에 투입됐던 기사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들은 이야기다.

‘그래서 반드시 플로네 영애를 취재하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의외로 플로네 공작 가문은 에밀리의 취재에 협조적이었으나, 문제는 마거릿을 취재하는 게 어려웠다는 점이다. 어디에 있는 건지 그녀를 보기도 어려웠으며, 보인다 싶으면 어김없이 플로네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방해했다.

그렇게 한참을 마거릿을 찾아 공작 성의 복도를 헤매던 중이었다.

플로네 공작을 만나고 나오는 건지, 공작의 방에서 어두운 얼굴로 나오는 그녀가 보였다. 근처에서 잠복을 하고 있던 의미가 있었다.

“플로네 영……!”

그녀가 막 마거릿을 향해 달려 나가려던 참에 누군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대번에 욕설을 뱉은 그녀가 고개를 들고 상대를 확인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새카만 머리카락. 그 아래 자리한 깊고 짙은 황금색 눈동자. 잘 빗은 조각상처럼 아름답지만 온기는 없는 얼굴의 남자가 섬뜩하게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거릿이 사라진 자리를 흘끗 본 그가 다시 무심하게 에밀리에게 시선을 던졌다.

“마거릿에게 가는 길인가 보군.”

에밀리는 남자가 누군지 알았다.

에녹 황태자.

황태자를 눈앞에서 이렇게 가까이 본 적이 없었다. 그 하늘 같은 신분차를 제외하고도 그는 함부로 말을 붙이기 어려운 위압감을 풍겼다.

“그게……. 취재를 하려고…….”

“그래, 취재. 해야지. 그게 자네의 일일 텐데.”

그가 한 발자국 더 에밀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계속 움직여봐. 하나, 이 다음 그대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 못 한다.”

수첩을 쥔 에밀리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에녹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등장했다.

“자자, 기자님이 해줄 일은 따로 있어. 우리 마거릿 괴롭히지 말게.”

벚꽃처럼 화려한 분홍색 머리카락에 한쪽 눈을 가린 안대. 능글맞게 웃음을 짓고 있지만, 에밀리를 훑는 푸른색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아스달 왕세자였다. 그는 태연한 얼굴로 에밀리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에밀리는 그제야 공작 성에 떠돌던 마거릿의 남자들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심지어 이들은 모두 과거 마거릿을 극렬히 기피하던 남자들이 아니던가.

‘세상에. 이것도 특종이야.’

그녀는 사라진 마거릿을 뒤쫓아야 한다는 생각은 잊은 지 오래였다.

“이런 기사 헤드라인도 괜찮을 것 같은데 들어보게. 흠. <지상 최고의 미남, 아스달 왕세자의 눈부신 활약상!> 어떤가? 이야, 그대가 해야 할 일 하나를 내가 대신 해 준 것 같은데? 이런 왕세자가 어디 있나! 아주 완벽해!”

그리고 헤스티아 왕국의 왕세자는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 * *

아스달은 에밀리를 보낸 뒤에 에녹을 돌아보며 물었다.

“주교님 소식은?”

실종된 루제프 주교와 마거릿의 하녀를 찾아 란그리드 제국의 수사팀이 파견됐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상황을 직접 보고 받던 에녹은 다소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흔적은 발견했다. 린네하온 대주교와 루제프, 그리고 하녀로 보이는 인상착의를 가진 이들을 보았다는 목격자 진술을 들었거든. 아마 함께 어딘가로 이동을 한 것 같다더군.”

“설마…….”

“알레아 섬으로 간 것 같다.”

에녹의 대답에 아스달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놈의 알레아, 알레아.

아스달은 거칠게 머리를 헤집으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다가 에녹을 쳐다봤다. 에녹은 덤덤한 얼굴로 조금 전, 마거릿이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처럼의 생일파티가 이렇게 지나가다니, 플로네 영애도 상심이 컸을 것 같군. 자네도 아쉽겠어.”

무감한 얼굴로 서 있던 에녹이 고개를 돌려 아스달 쪽을 쳐다보았다.

고요한 시선, 정적. 에녹을 구성하는 건 늘 그런 것뿐이었다. 도무지 동요가 없다.

아스달이 지나가는 말로 한 위로에 에녹이 처음으로 반응했다.

“아쉽다니?”

“설마……. 이번 영애의 생일파티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건가?”

“그럼 뭘 했어야 하지?”

에녹이 팔짱을 낀 채로 물었다.

“흠, 고백?”

아스달의 대꾸에 에녹이 잠시간 입을 다물었다. 짧은 침묵 후에 그가 대답했다.

“그 비슷한 말을 하기는 했다.”

아스달은 에녹의 말을 듣고 잠시 눈만 깜빡이다가 답답한 얼굴로 탄성을 내질렀다.

“맙소사. 고백 비슷한 말이라니, 그런 애매모호함이 어디 있어. 자네 플로네 영애를 몰라? 생존 외엔 무엇도 관심 없는 아주 독한 여자 아닌가. 그런 인간에겐 직설 화법이 최고란 말일세.”

연극적인 목소리로 외친 아스달은 제가 에녹에게 제법 일침을 가했다 생각하며 혼자 뿌듯해했다. 그러나 차분하게 마른세수를 한 에녹은 돌연 날카로워진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내가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같나. 참는 걸로 보이진 않고?”

짙은 어둠으로 일렁이는 눈빛이 일순 가라앉았다. 꾹꾹 눌러 담아 억지로 상자 안에 가둬둔 욕망 같은 것이 잠깐 삐져나온 듯했다.

아스달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주춤했다. 에녹은 아스달이 물러선 만큼 그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녀가 소중해서. 그녀가 없으면 견딜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인내하는 것뿐이다. 난 섣부르게 행동해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떨림은 너무도 간절했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거릿뿐이었으니까. 그걸 이제 안 것이 통탄스러울 정도로.”

아스달은 조금 당혹스러워져서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그, 그렇군. 자네 많이 참았네. 그런 감정을 어떻게 참고 있는 겐가. 역시 인내가 대단해.”

그는 뚝딱거리는 동작으로 에녹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뒤 제 방으로 돌아가려 뒤돌아섰다. 몇 걸음 옮기던 그가 잠깐 다시 에녹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기회는 다시 오는 것이 아니니, 너무 오래 참는 건 좋지 않아.”

“…….”

* * *

버네튼 신문사의 기자 에밀리는 착실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다. 플로네 공작 성에서 일어났던 일이 대서특필되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드디어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7인 납치 사건의 배후……. 그들은 존재했다.]

[역사서에 기록될 생일파티……. 플로네 영애의 생일파티에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주공격 타깃은 당연하게도 교황과 황후였다. 현장검거 된 모란꽃 세력 중 가장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쪽은 그럼 됐고.

문제는 사라진 카이든과 루제프, 바네사다. 이른 아침에 에녹에게 수색 상황을 전달받긴 했는데 모두 알레아 섬으로 향하는 것 같다고 한다.

‘마거릿. 나는 내 인생이 로하데로 시작해서 로하데로 끝나게 둘 수 없어.’

카이든이 무사하기를 바란다. 부디 이 시련을 잘 극복해주길 바란다.

나 역시 그의 인생이 로하데로 시작해서 로하데로 끝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어제 벌어진 난장판을 서둘러 정리한 뒤, 저녁에 바로 알레아 섬으로 떠나기로 했다.

나는 떠나기 전에 잠깐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는 안정이 필요해서 침실에만 계셨다.

병문안을 갔더니 다행히도 베인 상처들만 잘 회복하고 안정을 취하면 금방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당분간 플로네 공작 성에 관한 모든 업무처리는 어머니와 이니스가 맡기로 했단다.

‘대체 아버지는 정체가 뭐지.’

교황에 대적하는 검술을 지니고 있었다니. 숨은 고수가 여기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약을 먹고 곤히 잠든 얼굴만 보다가 나왔다.

그래도 무사하셔서 다행이다. 아니었다면…….

나는 끔찍한 생각을 떨쳐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우리에게 한 가지 문제가 더 있다면, 디에고 형제와는 연락이 닿질 않았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던 것이 섬을 찾았다는 얘기였는데.’

영상구를 내내 들고 움직일 수 없으니, 섬 쪽으로 진입할 때는 두고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둘러야 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저녁에 입고 나갈 활동성 좋은 옷을 고르다가 침대 위에 잠든 은지를 쳐다봤다.

녀석은 내 방 침대 위에 놓인 방석에 똬리를 틀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유안나의 말로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된다.

그냥 녀석은 여기 두고 가야 할까?

그때 은지를 열렬히 짝사랑하는 로즈메리가 병문안을 왔다. 뜻밖에도 로즈메리의 등 뒤에는 에녹이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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