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4)화 (214/234)

물론 아버지는 그렇게 마물을 유인해놓고 도망가려는 교황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멀리서 플로네 공작성을 지키며 마물을 막던 제국군과 마법사 몇몇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아버지, 성녀님! 마물은 제가 상대할 테니, 그쪽을 부탁드려요.”

내 말에 아버지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과거의 나라면, 이 상황에선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우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끝내 믿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안나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내게 윙크하고는 도망가는 교황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피융-! 펑!

나는 발목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유안나를 엄호하며 최대한 많은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사용하는 조명탄의 탄알은 제나스가 마력으로 개조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마력 그 자체를 탄알로 쓸 수는 없을까?

내게는 많은 마력과 마력을 방출시켜 다룰 수 있는 반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조명탄을 직접적으로 교황에게 쏘지 않은 이유는 그를 단번에 죽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은 죄는 전부 받고 죽게 해야지.

하지만 마력 그 자체로 탄알을 만들면 죽이지 않고 데미지만 입힐 수 있다. 마력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영역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황을 돌아봤다. 교황은 유안나와 아버지를 상대하며 고전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끝내는 마력석을 이용해 더 많은 마물을 불러 모았다. 결국 유안나와 아버지의 주의력이 잠시 흐트러진 사이, 꽁무니를 뺀다.

나는 조명탄의 탄창을 열고 탄알을 모두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낀 반지에 마력을 모았다.

도망치는 교황의 뒷모습을 향해 조명탄을 조준한 채로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조명탄 총구 안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반지에서 서서히 빛이 생겨나 반지 주변을 회전하더니 이내 조명탄 안으로 빛이 빨려 들어갔다.

수초 뒤 조명탄 안에 거대한 마력이 응축되었다는 것을 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도망치는 교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XX, 제발 맞아라.

피슈웅-

녹색 빛의 마력이 일직선을 그려 발사되더니, 이내 교황의 등을 가격한 뒤 거대한 빛 무리가 되어 터졌다.

퍼엉!

“크헉!”

멀리서 내지른 교황의 비명 소리가 내가 있는 곳까지 들려왔다. 풀풀 날리던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자 그 사이에 교황이 무릎 꿇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상을 입었는지 그가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성공했다.’

말도 안 돼. 이게 성공하다니! 역시 나는 기사단에 스카웃 되어야 할 인재가 틀림없었다. 아니, 기사단이 아니라 마탑이지.

내가 그렇게 김칫국을 마시는 사이, 아버지와 유안나가 곧장 교황에게로 달려갔고 교황은 아버지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머리를 처박혔다. 유안나가 교황의 손에서 마력석을 회수했다.

나는 바닥에 버렸던 탄알을 다시 줍고 있었는데 때마침, 푸르스름한 빛이 하늘 위로 쏘아 올라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하늘에 거대하고 투명한 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건 카이든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이 발동시켰던 마법과 같았다. 그들이 다시 결계를 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근처에 숨겨둔 은지를 다시 찾았다.

은지는 기력을 다한 것처럼 시름시름 앓았다. 아무래도 신성력 공격을 당한 것의 여파가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은지야. 괜찮아?”

나는 녀석의 상태를 살폈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어서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녀님, 도와주세요. 우리 은지가……!”

유안나가 황급히 달려와서 은지의 상태를 살폈다. 유안나의 뒤로 피를 잔뜩 흘린 아버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나는 이번엔 아버지에게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아버지의 몸에 눈에 띄는 부상을 치료한 유안나는 곧장 은지의 상처도 살폈다.

“마물이라 신성력에 면역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이건 시간이 해결해주는 방법 밖에 없네요.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 거라니 다행이지만,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못나서 은지가 다친 거다. 내가 부족한 주인이라서.

나는 시름시름 앓고 있는 은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마음이 아팠다.

“마거릿은 다친 곳 없어요? 팔은 왜 그래요?”

천을 어깨에 둘러매 팔을 고정시켜 놓은 내 모습을 뒤늦게 확인한 그녀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버지도 그제야 내 상태를 알아차린 얼굴로 요란을 떨었다.

“세상에! 이리와 봐요.”

유안나 덕분에 부러진 팔과 접질린 발목은 가뿐하게 치유됐다. 그녀가 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교황과 싸우며 그 많은 성력을 쏟아붓고서도 이렇게 손쉽게 남을 치료까지 하는 것을 보니, 정말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은지와 교황을 각각 짊어진 우리는 에녹이 분전하고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에녹은 그 많은 성기사들을 혼자 해치우더니, 이제는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그는 피범벅이 된 아버지와 발을 절뚝거리는 나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마거릿!”

“괜찮아요? 일단 상황 먼저 수습하고 얘기해요. 카이든을 찾아야죠.”

굳이 제나스에게 추적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이미 그가 어디로 갔을지 우리는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바로 알레아 섬.

“디에고 형제에게 편지를 보내는 게 좋겠어요. 알레아 섬에 절대 먼저 들어가지 말라고요.”

에녹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알레아 섬에 자동 폭발 장치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제나스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자칫하면 디에고 형제와 정찰대가 위험해요.”

에녹은 곧장 연회장으로 돌아가서 디에고 형제에게 영상구로 소식을 전했다.

* * *

아스달은 에녹, 마거릿과 계획한 대로 기사들을 전두지휘하여 모란꽃 세력 검거에 나섰다.

그는 모란꽃 세력이 마력석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마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반쪽짜리지만 마력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헤스티아 왕국에서 자신의 먼 조카를 찾아내 처치했을 때도 같은 힘을 사용했다.

하여 그는 높다란 창틀 위에 앉아 연회장을 훑으며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해서 모란꽃 세력을 대거 검거했으나, 문제가 있었다. 마력석을 사용했던 흔적은 발견되는데, 정작 그들에게 마력석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죄를 부인하면서 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는데, 바로 린네하온 대주교였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아스달과 함께 모란꽃 세력을 검거하던 루제프가 말했다.

아스달은 린네하온과 루제프의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가 매우 심각한 얼굴로 루제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속삭였다.

“주교님, 그렇다고 죽이거나 하면 안 돼.”

“제가 저하인 줄 아십니까?”

루제프가 대번에 불쾌하다는 얼굴로 빽,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스달이 천연덕스러운 동작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상처받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 말하면 섭섭하네. 나도 사람은 안 죽여.”

“저도 사람은 안 죽입니다. 성직자를 뭐로 보고……!”

“알겠네, 알겠어. 앙칼진 고양이 같아서는.”

“저하!”

“아무튼 얼른 찾아보고 오게. 여긴 내게 맡기고. 아직 페더슨 백작과 황후를 못 찾았거든.”

루제프는 짜증이 가득담긴 얼굴로 아스달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우선은 린네하온을 찾는 게 급했다.

* * *

린네하온은 황후와 페더슨 백작에게서 마력석을 빼앗고 다른 모란꽃 세력의 마력석까지 훔쳐 달아났다. 마거릿의 하녀 바네사를 인질로 삼아서.

지금이야 마력석을 도둑맞고 린네하온을 원망하겠지만, 결과만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괜찮을 것이다.

이 마력석을 모두 모아 알레아 섬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로하데 후작과 합류한 뒤에 제나스를 기다릴 것이다. 제나스에게 훔친 마력석을 모두 전달해야만 그의 목적이 달성된다.

린네하온이 바네사를 이용해 뒷문으로 빠져나가려고 할 때, 그의 앞을 가로막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제프였다.

“어딜 가려고.”

저 망할 자식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앞길에 방해만 된다.

* * *

로즈메리는 아스달과 대화를 나누던 루제프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또래 영애들이 두려움에 떨며 연회장 한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연회장 밖으로 나가는 것보단 이곳에서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페더슨 백작과 황후를 못 찾았다고.’

아스달이 한 말을 엿들은 로즈메리는 조금 전 제가 그 두 사람을 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분명 페더슨 백작과 황후로 추정되는 인물이 연회장의 혼란을 틈타 린네하온 대주교와 함께 주방 쪽으로 사라지는 걸 본 것 같다.

로즈메리는 황급히 주방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대로 페더슨 백작과 황후를 발견했다. 문제는 그들이 주방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로즈메리는 그들이 왜 이곳에 쓰러져 있는 것인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다가 함께 있었던 린네하온 대주교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 봤는데,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일단 페더슨 백작과 황후의 주머니를 뒤적여봤으나 마력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 대리석 바닥으로 긴 그림자가 졌다. 누군가가 로즈메리의 머리 위에 서 있었다.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곳엔 깨어난 황후가 로즈메리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퍽-!

“으윽.”

둔탁한 소음과 함께 황후의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 로즈메리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깜빡였다.

로즈메리의 앞에 그녀의 어머니, 바이올렛이 프라이팬을 든 채 서 있었다. 로즈메리를 공격하려던 황후가 바이올렛의 프라이팬을 맞고 기절한 듯 보였다.

바이올렛은 주방에서 가져온 프라이팬을 들고 뿌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저를 멍하니 보는 딸, 로즈메리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내가 이 여자를 얼마나 이렇게 치고 싶었는지 모를 거야.”

징글징글하게 플로네 가문에 빌붙다가 끝내, 에녹을 좋아한단 이유로 마거릿을 섬으로 보내버렸다고 하지 않던가. 이 망할 여자가.

바이올렛이 프라이팬을 들고 황후의 머리를 한 번 더 쳐버릴까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다.

“으음.”

시기적절하게 황후에 이어서 페더슨 백작이 눈을 뜨더니,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퍼억!

바이올렛이 휘두른 프라이팬에 머리를 얻어맞고 페더슨 백작 역시 기절했다.

바이올렛은 후련한 얼굴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세상에, 프라이팬을 무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니. 우리 어머니는 역시 대단해!’

로즈메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박수를 쳤다.

* * *

마탑의 마법사들과 미리 에녹이 준비시킨 란그리드 제국군이 남아 있는 마물 진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중 선두엔 노엘과 하이젠을 비롯한 낯익은 기사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는 그들에게 외부 진압을 맡긴 뒤, 잡은 교황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복귀했다.

연회장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는데 다행히도 모란꽃 세력으로 보이는 이들을 일부 진압한 모양이다. 개중엔 페더슨 백작과 황후도 있었는데, 린네하온 대주교는 보이지 않았다.

루제프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플로네 영애!”

아스달이 우리 상태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달려왔다.

“영애, 괜찮은 겐가. 오 맙소사. 공작 괜찮소? 반황 자네는? 성녀님도 힘들어 보이는군.”

아스달이 안절부절 못하고 우리 상태를 체크했고 이어서 어머니와 이니스, 로즈메리가 달려와 눈물을 흩뿌리며 아주 난리를 쳤다.

파티에 참석했던 모란꽃 세력은 린네하온 대주교를 제외하고 전부 검거했다. 거미줄에 걸린 모란꽃 문양이 몸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확인은 쉬웠다.

하나 안타깝게도 교황이 가진 것 외에 검거한 모란꽃 세력 중 마력석을 가진 이는 한 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전부 누군가가 가지고 도망쳤다.

“로드는 어디 있나?”

아스달의 물음에 나와 에녹, 유안나는 침묵했다. 유안나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카이든은 무사해야 할 텐데.’

에녹이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고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마주봤다. 에녹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나를 대신해서 유안나가 정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일행에게 전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이들이 모두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일행을 차례로 훑어보며 제나스와 있었던 일, 그리고 실험 일지에 대한 설명을 간략히 전하며 다짐하듯이 말을 꺼냈다.

“알레아 섬에 가야해요.”

우리는 결국 알레아 섬에 직접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없었음으로 구체적인 계획은 란그리드 남부 해역으로 향하며 세우기로 했다.

내가 이진주이자 마거릿으로서 처음 맞이하는 생일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루제프와 바네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알게 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