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3)화 (213/234)

제나스가 사라졌는데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우리 중에 없어 당장 추적할 수도 없었다.

X 같은 제나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교황의 손에 들린 마력석에서 빛이 나며 땅이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마물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든이 사라진 탓에 결계가 무너진 것 같았다.

이런 사태가 벌어질 것을 대비해 카이든의 마탑 소속 마법사들과 란그리드 제국군을 대기시켰다. 역시나 멀리서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결계 방향으로 몰려가는 게 보였다.

제나스만 아니었다면, 깔끔하게 모란꽃 세력을 잡아들이고 끝났을 텐데 골치 아픈 상황이 됐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성기사단 제복을 입은 기사 열댓 명이 뛰어나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교황을 포박하고 있던 에녹이 제게로 휘둘러진 검을 피한 사이, 틈을 놓치지 않고 교황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교황의 손에 들린 마력석에서는 계속해서 빛이 발현되고 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교황의 푸른 눈동자가 일순 붉은빛으로 반짝이더니, 눈빛이 흐리멍덩해진다. 마력석에게 정신을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제나스 님은 떠나셨고. 나도 목적을 이미 달성한 뒤라 더는 미련이 없습니다만.”

교황이 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이윽고 성기사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더니 뒤를 돌아 급히 사라졌다.

“망할 꼰대! 거기 서!”

교황의 뒤를 쫓아 유안나가 하늘을 향해 손을 올렸고 곧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쏟아져 나오며 교황을 공격했다.

교황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안나도 교황도 그대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멀리서 새하얀 빛이 번쩍이는 게 아무래도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교황을 이대로 놓칠 수 없다. 나는 어깨 위에 있는 은지에게 마력을 나눠줬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조명탄을 꺼내 탄알을 확인하고 장전하며 은지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나는 조명탄을 쥔 채로 에녹을 향해 말했다.

“에녹 뒤를 부탁해요. 성녀님을 도와 교황을 잡아 올게요.”

“조심해.”

에녹은 이제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가 상대하는 기사들이 대략 15명 즈음은 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에녹은 괜찮아야 할 텐데.

하나 생각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의 모습을 뒤로 하고 나는 은지와 함께 교황과 유안나의 뒤를 쫓았다. 그들을 쫓는 김에 모여드는 마물을 향해 조명탄을 발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크와아악!

은지는 꼭 마치 용처럼 포효하며 마물을 향해 불을 뿜었다. 불길이 땅을 가르고 수십 미터까지 질주해 나갔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화력이다. 꼭 마치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하여 진화를 한 것 같았다.

‘마력석 때문인가?’

마력석을 하나씩 먹을 때마다 은지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은지가 유달리 마력석을 좋아했고 먹을 때마다 마치 자양강장제를 먹은 것처럼 기운을 뽐내지 않았던가.

은지는 마물을 모조리 태워버리며 이동했고 우리는 곧 교황과 유안나를 따라잡았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야?

나는 조명탄을 장전하고 레버를 당겨 내렸다. 그러곤 교황의 뒤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교황의 주의를 흐트러트리기 위해서였다.

펑-!

등 뒤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폭발음에 교황이 놀라서 뒤를 돌아본 사이, 은지가 재빠르게 교황에게 다가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교황을 집어 삼키기 직전, 그가 놀라운 순발력으로 신성력을 발현시켰다.

‘젠장!’

화아악-!

눈이 번쩍거릴 정도로 새하얀 빛이 우리에게로 쏟아졌다. 그 빛을 맞는 순간 잠시 숨을 쉬기가 벅찰 정도로 몸을 옥죄는 고통이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은지 역시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악!

“은지야!”

은지가 괴로워하며 몸부림을 친 탓에 나는 은지의 몸에서 굴러떨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윽.

상당한 높이서 예고도 없이 굴러떨어진 통에 왼팔이 부러진 것 같다. 발목은 접질린 건지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일었다.

이런 와중에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을 다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다니. 아무튼 간에 조명탄을 쏠 수는 있어 보였다.

나는 재빨리 드레스 자락을 찢어 매듭을 만든 뒤, 어깨에 걸고 팔을 고정시켰다.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의 통증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화아악-!

그때, 다시 한 번 신성력이 발동했는지 새하얀 빛이 방출됐고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도 그건 유안나가 교황을 향해 공격할 때 나온 빛이었다.

“이제 그만 뒷방으로 물러나시지!”

유안나가 교황을 향해 신성력을 쏘아 붙이며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유안나의 카키색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광기가 들린 듯한 얼굴의 유안나는 제법 섬뜩했다.

교황은 마찬가지로 신성력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유안나는 백 년 만에 나타난 대성녀인 데다가 젊었다. 제아무리 교황이라도 그런 그녀를 상대하기엔 체력적으로도 힘들게 분명했다.

역시나 전투가 계속되자 그가 눈에 띄게 버거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내가 이 날만을 기다렸어! 당신을 내 손으로 깔아뭉갤 날만! 아주 꼴 보기 좋아!”

깔깔깔깔-

유안나의 마녀같은 웃음소리가 공기 중을 맴돌았다.

나는 황급히 은지를 찾았다. 그리고 줄어든 몸으로 수풀 사이에 머리를 숨기고 훌쩍이는 은지를 발견했다.

“은지야!”

나는 다급하게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신성력에 당한 공격이라서인지 외견으로 드러난 부상은 없어 보였다. 혹시 그럼 내상을 입은 건가? 은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괴로운 울음만 뱉고 있었다.

은지가 뭘 알겠어. 이건 내 잘못이다.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손이 덜덜 떨려왔다.

사고가 정지되어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은지는 그런 내 걱정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들고 내 손에 머리를 문댔다. 괜찮으니 걱정 말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녀석을 쓰다듬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조명탄을 장전했다. 하필 오랑우탄 마물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힘겹게 누워 있는 은지를 풀숲에 숨겼다.

교황을 상대하는 유안나에게 저것들이 방해가 되면 안 된다. 지금 그녀를 엄호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곧장 조명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펑-! 퍼엉!

마물을 죽이고 또 죽였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마물이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팔에 차차 감각이 없어졌다. 접질린 발목도 고통에 무뎌지고 있었다.

교황과 유안나도 멀리 가지 못한 채 연신 신성력을 방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로를 향해 공격을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마물들로 인해 주의력이 흩어진 것 같았다.

고군분투하며 여분의 탄알을 총에 채우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오랑우탄 마물이 있었다.

젠장, 데자뷰인가?

섬에서 오랑우탄 마물의 주먹에 맞고 갈비뼈에 금이 갔던 일이 떠올랐다.

놈이 나를 향해 커다란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이 슬로우모션처럼 시야에 느릿하게 펼쳐졌다. 왼팔이 부러진 데다가 발목을 접질린 탓에 저 주먹을 피해 빠르게 움직일 자신이 없다.

조명탄을 장전할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C발.

저걸 맞으면 즉사다. 이번엔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으로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젠장, 가까이 다가온 주먹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하다, 우리 망아지!”

그때 누군가가 나를 밀쳤다. 시야에 백금발 머리카락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풀스윙으로 날아오는 오랑우탄의 거대 주먹을 맞고 날아갔다.

바닥에 내쳐진 나는 하늘에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는 아버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아버지!”

멀리 수풀로 떨어지는 아버지를 향해 다리를 절며 다가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내가 지금 본 것을 믿을 수 없어서.

나는 조명탄을 장전하고 아버지를 날린 오랑우탄을 향해 조준했다.

피융-! 펑!

화려한 불꽃에 정확히 가격당한 오랑우탄이 불꽃 속에 모습을 감췄다. 정확히는 몸이 조각 났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아버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고 일어났다. 내게 벌어진 이 모든 사태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하나씩 차례로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버지가 날아간 수풀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머지않아 낙엽 위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

나는 상처로 가득한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그만 입가를 가렸다.

“우리 망아지.”

아버지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너를 두 번이나 잃을 수 없지.”

아버지가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한 채로 아련하게 웃음 지었다.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너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아비에게 의지도 좀 했으면 좋겠구나.”

뭘 알고 말씀하시는 걸까. 지금껏 내가 섬에서 겪었던 일들을 가족에게도 자세히 말한 적이 없었는데.

“내가 널 모르겠느냐. 네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돌아왔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내 표정을 본 아버지가 다정하게 어루더듬듯 내게 말했다.

“그래도 난 네 아버지다. 그건 변하지 않아.”

물론 내가 변했다고만 생각하는 거지, 오랜 시간 다른 차원에서 살다 왔다는 것까지는 모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말대로 나는 아버지 딸인 것은 변하지 않는데.

나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 사람을 불러올게요. 사람을…….”

“이 정도는 괜찮단다.”

아버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성한 곳 하나 없이 피범벅이었는데도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손등으로 얼굴에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더니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아버지! 위험해요! 다치셨잖아요.”

“아비를 믿어봐라.”

혹시 마물을 상대하려는 건가 싶어 나도 긴장해서 조명탄을 들었는데, 아버지는 곧장 도망가는 교황을 향해 뛰어갔다. 유안나가 여전히 교황을 상대하며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제게 달려오는 아버지를 향해 창처럼 날카롭게 변한 빛 덩어리를 쏘아붙였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검으로 그것을 막았다.

그러니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아버지는 검으로 신성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저런 대단한 검술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에녹 외에는 본 적이 없는데.

천생 문관에 우아한 아버지가 저리 검을 쓸 줄 아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루제프 같은 아버지에게 무력이라니.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라 놀랍다.

마찬가지로 교황도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데리고 온 호위는 모두 에녹에게 붙어 있으니 그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장기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교황의 주의를 흐려놓은 사이, 유안나가 공격을 재차 감행했다. 교황이 재차 양손을 뻗어 아버지와 유안나의 공격을 각각 막아냈다.

“이제 그만하시고 포기하시지요, 성하.”

아버지가 고요한 얼굴로 검을 휘두르며 가뿐히 교황의 신성력을 차단했다. 교황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갔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는 이내 이를 악물고는 외쳤다.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은가!”

이윽고 교황은 들고 있던 마력석을 하늘 위로 치켜 올렸다. 계속해서 빛을 내뿜던 마력석이 이전보다 더 강렬한 빛을 분출하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주변에 있던 마물들이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C발!

나는 다시 조명탄에 탄알을 채워 넣었다. 지금 마물을 상대할 사람은 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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