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2)화 (212/234)

뒷짐을 지고 선 교황이 온화한 얼굴로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십여 년 전, 했던 실험이 뭐였는지 기억합니까, 로드.”

카이든은 그 말을 곱씹었다.

십여 년 전 했던 실험.

구체적으로 어떤 실험이었는지는 카이든 본인조차도 기억을 하지 못했다. 실험 직후 너무 많은 마력을 소진하는 바람에 반 강제적으로 동면 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동면조차도 그의 의지는 아니었다. 로하데 후작의 짓이었지.

“우리 로드의 몸에 제나스 님의 영혼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제나스 님에게 전적으로 맞춰 몸을 변형시켰지요.”

껄껄. 그딴 말을 지껄이면서 교황은 웃었다.

교황의 말이 딱히 놀라울 것은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카이든은 교황이 이 말을 꺼낸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유심히 그를 노려봤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말을 하는 저의를 모르겠다.

그를 떠보면서 몸 안에 제나스를 봉인하고 있다는 확답을 받고자 하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땅이 울렸다. 멀리 결계 밖으로 마물들이 우글우글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예상대로 모란꽃 놈들의 수작질이 시작된 모양이다. 마거릿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카이든이 마거릿을 찾아 자리를 뜨려고 하자 베나트리에 교황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얘기 끝까지 들으십시오, 로드.”

수염을 매만지던 교황이 느긋한 얼굴로 그의 앞으로 걸어온다.

카이든은 마법진을 언제든 발동할 수 있는 준비를 하며 경계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발밑으로 갑자기 의문스런 마법수식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것도 아니고 교황이 만든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XX, 이게 뭐야……?”

“혹시 제나스님께서 로드의 몸에 갇혀 곤란해 하는 상황이 올 때를 위한 시동어가 있지요.”

“뭐? 시동어?”

벗어나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만히 카이든을 지켜보던 교황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 알레아를 위해 깨어나십시오-

사람의 목소리를 여러 겹 덧댄 듯이 이질적인 목소리가 온몸을 강타했다.

쿠웅--!

심장에 거센 충격이 가해졌다.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심장이 땅 끝까지 추락한다. 깊이, 계속해서 깊이.

크흑.

카이든은 기어코 피를 토해냈다.

‘로하데’라는 짙은 그림자가 그를 좀먹었다. 벗어나고자 그토록 애를 썼지만, 그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로하데’라는 이름의 그림자에서 평생을 허우적댄 것이 끝이었다.

심장에 이어 그의 귓불마저 못 견디도록 뜨겁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던 오른쪽 귀에서 그런 이상 현상이 벌어졌다.

‘젠장, 귀걸이.’

귀걸이를 뜯어내기 위해 손을 뻗을 수도 없었다.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섬에서 마거릿 덕분에 깨달은 훈련법으로 마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게 됐는데, 지금의 그는 마치 마력을 처음 배운 어린아이처럼 힘을 통제할 수 없었다.

고통을 버티지 못한 그는 끝내 심장에 가해지는 힘을 제어하고자 마력을 방출했다. 그를 구성하던 마력들이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며 공기 중으로 퍼졌고 그로 인해 주변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지잉-

방출된 마력이 그가 만든 마법 수식 결계와 충돌하며 거세게 진동했다. 플로네 공작 성을 보호하는 마법 결계는 그 거친 힘을 버티지 못하고 기어코 깨지고 말았다.

챙그랑-!

‘젠장, 안 돼!’

카이든은 그대로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점멸하는 시야 속으로 플로네 공작 성을 향해 돌진하는 마물들이 보였다.

‘안 돼. 마거릿을 지켜야 하는데…….’

마거릿을…….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그가 온전히 가사 상태에 빠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제나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에녹과 함께 빛을 쫓아간 곳에서 우리는 교황을 발견했다. 카이든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성녀님도 오셨군요. 하지만 다들 너무 늦었습니다.”

우리를 발견한 교황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는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서 그가 카이든의 행방을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 망할 꼰대가.”

유안나가 곧장 성력을 쓸 기미를 보여서 나는 그녀를 막았다.

막강한 성력을 가진 교황은 손쉽게 제압당할 위인이 아니다. 성녀인 유안나와 싸움을 한다면 성력 싸움이 되어서 필히 길어질 거다.

그러나 카이든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지금 내겐 싸움이 끝나길 기다릴 시간이 없다. 당장 카이든의 행방을 알아야 했다.

“카이든은, 카이든은 어디 있지?”

나는 조명탄을 꺼내 그를 향해 조준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에녹도 검을 빼어 들고 교황을 향해 겨누었다.

“마거릿이 묻지 않나, 로드는 어디 있지.”

에녹의 서슬 퍼런 음성과 함께 그가 쥐고 있던 검에서 전류가 흐르더니 검기가 생성됐다.

스파크가 튀기는 검은 상당히 위협적이었으나 교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 여는 게 좋을 텐데. 사지 멀쩡히 붙어 있고 싶다면.”

에녹이 고개를 까딱 기울이며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검기가 땅을 가르고 교황의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교황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흠. 요즘 젊은이들은 성격이 참 급합니다, 껄껄껄.”

“이봐요, 꼰대 할아범. X소리 하지 마시고 로드 행방이나 말하세요.”

유안나가 꼭 카이든처럼 말하며 교황을 추궁했다. 그러자 교황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다들 로드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정을 주면 안 되는 아이인 줄 모르셨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죠?”

“우리 로드는 어린 시절부터 제나스 님을 위해 길러진 몸이 아닙니까. 교황청에선 그의 마력을 제나스 님의 것과 융화되게 성질을 바꾸는 실험을 했었습니다. 섬에서 살아 돌아온 로드의 마력이 변한 것을 로하데 후작은 알아차렸지요.”

나는 그 말에 아연해지는 기분을 다잡았다. 로하데와 제나스만을 위해 길러진 카이든의 끔찍한 과거 얘기였다.

카이든에게 그런 끔찍한 짓들을 저질러 놓고서 그들이 카이든을 부르는 명칭은 항상 같았다.

‘우리’ 로드, ‘우리’ 후손님.

역겨움이 치민다.

“로드가 제나스 님을 모시고 있었다는 걸, 로하데 후작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획을 재개하기 위해 알레아 섬으로 향했지요. 그 말을 듣고 어찌나 안도가 되던지.”

로하데 후작이 혈서와 함께 사라진 이유가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제나스가 살아있다는 것을.

“언제까지 우리에게 제나스 님을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 했습……! 컥!”

대체 언제 다가갔는지도 모르겠다. 에녹은 교황의 목을 잡아 바닥에 내리찍으며 그를 제압했다. 에녹의 날카로운 검날이 교황의 목에 닿았다.

“그래서 로드는 어디 있냐고 물었을 텐데. 내가 말을 너무 어렵게 했나?”

에녹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마치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태인 것처럼.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러나 교황은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면서도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는 마치 이 게임에서 우위를 점한 이는 자신인 것처럼 굴었다.

“황태자는 노인공경이라는 걸 할 줄 모르는 모양이야.”

그때 수풀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나스!”

수풀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카이든이었으나, 나는 이제 한눈에 봐도 그가 제나스인지 카이든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교황은 여전히 에녹의 손에 붙잡혀 땅에 처박힌 채로 버둥거리고 있었지만 제나스는 딱히 그를 구제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카이든 어디 있어.”

나는 그를 향해 조명탄을 겨눈 채로 물었다. 제나스의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팔짱을 낀 채 선 그가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달이 나서 카이든을 찾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여전히 우리 후손님만 찾는군. 섭섭하게.”

그가 내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그의 손을 탁 쳐냈다.

그때 내 손에 끼워진 반지가 ‘지직-’하며 전기반응을 일으켰다. 제나스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손과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봤다.

“마거릿에게 허튼 수작 부리면 당장에 목이 날아갈 줄 알아.”

“전하의 말에 동감. 마거릿 건들면 나도 가만 안 있어.”

그러나 에녹과 유안나가 차례로 입을 열었기에 제나스의 시선은 그들에게로 옮겨갔다. 특히나 유안나의 손에서 신성력으로 보이는 새하얀 빛이 넘실대자 제나스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보이며 내게 말했다.

“우리 후손님은 가사 상태에 빠졌어. 일어나지 않는 건, 그냥 의지의 문제고.”

“의지의 문제? 그럼 카이든이 깨어나지 않는게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거야?”

내 물음에 제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에녹에게 제압당해 땅에 머리를 박고 있는 교황을 흘끗 가리키며 대답을 이어갔다.

“흠, 우리 후손님 몸을 시동어에 반응하도록 설계해두긴 했는데.”

“시동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제나스가 고민 어린 얼굴로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상황을 재보며 제게 유리한 쪽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처럼 보였다.

“너도 알겠지만, 내겐 마력이 얼마 없어. 그래서 시동어를 읊어줘도 우리 후손님 몸을 완전히 차지하기란 불가능해. 내가 다시 마력을 손에 쥐면 모를까.”

다시 마력을 손에 쥐다니. 굉장히 의미심장한 소리다.

그러나 그는 시동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줄 생각까진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카이든의 과거 실험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카이든이 깨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의지의 문제라니. 그가 깨어나길 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까. 그건 전혀 카이든 답지 않았다.

대체 왜?

“이대로 계속 깨어나지 못하면, 우리 후손님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동면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래 주면 난 너무 고마운데.”

제나스가 양 팔을 넓게 벌려 공기를 들이마시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곤 느긋하게 상황을 살피던 제나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간을 너무 끌었네. 나는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

“가긴 어딜 가!?”

“마거릿, 내가 말했잖아. 알레아 섬에 가야 한다고.”

“제나스 님. 우리 계획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시는 거라면 저도……!”

여전히 에녹에게 포박이 되어 있는 교황이 입을 열자 제나스가 마치 벌레를 보듯 그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것. ‘우리 계획’이 아니라 ‘내 계획’이지. 네 역할은 딱 거기까지야. 마력석 덕분에 지금껏 내가 널 살려둔 줄 알아.”

교황은 제나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가 버둥거리며 에녹의 몸에서 빠져나오고자 했지만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제나스가 마력석을 이용해 모란꽃 세력을 조종하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게다가 알레아 섬.

혹시, 알레아 섬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마력석이 그에게 새로운 힘이 되는 걸까?

‘너도 알겠지만, 내겐 마력이 얼마 없어. 그래서 시동어를 읊어줘도 우리 후손님 몸을 완전히 차지하기란 불가능해. 내가 다시 마력을 손에 쥐면 모를까.’

그렇다면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설명이 된다. 마력석을 찾아 마력을 회복하면 카이든의 몸을 차지할 수 있으니까.

‘젠장, 이게 다 그 망할 차원의 균열 때문에……!!’

차원의 균열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죽여야 할 적은 모란꽃 세력이 아니라 여전히 제나스였다.

제나스를 향한 살의가 들끓었다. 전부 뒤집어엎지 않으면 이 분노와 갈증이 해소될 것 같지 않았다.

차원의 균열을 메울 수 있는 방법만 찾을 수 있었더라면, 제나스도 모란꽃 놈들도 더는 이 따위 짓을 벌이지 못할 텐데……!

‘차원의 균열을 메울 수만 있다면……!’

그러다가 불현듯 나는 이전에 내가 세웠던 가설을 다시 떠올렸다.

혹시, 차원의 균열을 메울 수 있는 열쇠가 정말 나라면?

차원을 넘나들며 오염된 내 영혼이 한국으로 넘어가야만 차원의 균열을 온전히 메울 수 있는 거라면?

그래야 모두를, 그리고 카이든을 살릴 수 있다면?

만약 정말 그런 거라면, 그래서 제나스가 나를 놓지 않는 거라면…….

나는 기꺼이 나를 희생하고 이 세계를 버릴 것이다.

‘이대로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결단코.’

그때 유안나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양 손을 하늘 위로 뻗자 그녀의 손안에서 새하얀 빛이 공전하며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사납게 흩날리고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그녀가 광기 들린 눈으로 제나스를 노려보았다.

“꼰대랑 너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가.”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나스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빛기둥이 내리쳤다. 땅이 깊게 파일 정도로 강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제나스는 그런 유안나를 비웃듯이 가뿐히 비켜 그 공격을 피하더니, 순식간에 내게 다가왔다.

“기다릴게, 섬에서.”

귓가에 닿은 나직한 말은 곧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제나스가 그대로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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