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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10)화 (210/234)

* * *

나는 시간을 체크하며 수상쩍은 움직임은 없는지 주변을 살폈다.

어머니는 단독으로 황후를 상대하는 중이었고 연회장의 수많은 손님들은 아버지와 이니스가 챙기고 있었다. 나를 찾는 귀족 영애들은 로즈메리가 아우르며 내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주었고 그럼에도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능숙한 에녹과 아스달이 상대했다.

그러던 중 난 문득 카이든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카이든은 어딜 간 거지?

그러고 보니 연회장 안엔 교황도 보이질 않았다.

“꼰대 어디 갔는지 보셨어요? 망할 린네하온 때문에 놓쳤네요.”

유안나도 나와 마찬가지로 교황을 찾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이든과 함께 사라진 교황이라니……. 조금 불안한데.

주변을 살피던 유안나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나를 돌아보며 소곤거렸다.

“아, 마거릿. 제 선물은 파티가 끝나고 드릴게요.”

그녀가 나를 향해 천연덕스럽게 윙크를 하며 웃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내게로 고개를 기울이곤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실험에 대한 증거를 많이 모았거든요. 로하데 가문과 교황청에서 주고받은 편지도 입수했어요.”

“정말요?”

“네. 꼰대 방 지하실에서 찾아왔어요.”

꼰대 방 지하라면 교황의 방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렇게 위험한 짓을…….”

“위험하긴 했지만, 저는 능력이 있거든요. 훔치는 건 자신 있어요.”

유안나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훔치는 것에 자신 있다니, 성녀와는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그게 그녀다웠다.

“그런데 실험 일지를 공수해왔는데, 거기에 차원의 균열과 차원 너머 생명체에 관한 얘기가 있더라고요. 메그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군요.”

차원의 균열과 차원 너머 생명체에 관한 이야기라니. 그 말을 듣자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송연해졌다.

하지만 너무 공개적인 장소라서 그 얘기를 지금 언급하긴 조심스럽다. 나는 우선 파티가 끝난 뒤에 이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연회장을 활보하며 사용인들을 살피는 바네사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바네사는 빈 디저트 테이블에 디저트를 채울 것을 지시하고 새 포도주를 공수해오는 등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바네사의 시선이 린네하온에게 닿았다. 린네하온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신호를 본 바네사가 어디론가 급히 사라졌다.

나는 린네하온과 바네사의 수상쩍은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바네사는 급히 주방으로 달려왔다. 린네하온의 신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방에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교황청의 사제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바네사가 미리 열어둔 주방 뒷문을 통해 잠입해 있었다. 바네사를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린네하온 대주교님이 신호를 보내셨습니다.”

바네사의 말에 두 사제가 테이블 위로 손바닥만 한 틴케이스를 꺼내 올렸다. 바네사가 틴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붉은 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섞어.”

사제가 그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바네사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연회장으로 나갈 포도주에 가루를 섞었다.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다시 신호하면, 그때 생존자들에게 포도주를 전달해. 실수가 생기면 과거에 네년이 했던 짓을 플로네 영애에게 발설할 거다. 그럼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겠지.”

바네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제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다른 사람이 올 새라 황급히 주방의 뒷문을 이용해 모습을 감췄다.

“바네사!”

그때 주방 안으로 로즈메리의 전담 하녀 미아가 얼굴을 내밀었다.

“마거릿 아가씨께서 너 찾는다.”

“지금 가.”

바네사의 말에 주방으로 들어온 미아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포도주 두 병을 가리켰다.

“하녀장님께서 연회장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시던……. 어? 코르크 마개 다 미리 따놨네, 이거 맞지?”

포도주의 경우 더 풍부한 맛과 향을 위해 보통 코르크 마개를 따고 30분 정도 공기와 접촉하도록 두곤 한다. 미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포도주가 그런 용도로 놔둔 거라고 생각했다.

바네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바네사의 대답을 들은 미아가 아무 의심도 없이 마개를 딴 포도주를 챙겼다. 바네사는 슬쩍 주방 뒷문 쪽을 쳐다봤다.

역시나 사라진 것처럼 나가던 두 사제가 자리에 몸을 숨기고 그녀를 지켜보는 모습이 보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실수하면 안 된다. 바네사는 양 손에 포도주를 든 미아를 불렀다.

“그거 곧장 마거릿 아가씨께 가져가.”

바네사의 말에, 주방을 나가려던 미아가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다소 묘한 얼굴로 바네사를 돌아봤다. 바네사가 미아에게 가까이 다가가 포도주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아가씨가 그 포도주를 찾으셨어.”

바네사가 단호하게 말하자 미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미아는 주방을 나오며 조용히 손을 펼쳤다. 손 안엔 조금 전 바네사가 전달해준 쪽지가 있었다.

* * *

플로네 공작부인, 바이올렛은 마거릿의 하녀 바네사가 주방 쪽으로 사라지자, 로즈메리의 하녀 미아가 그 뒤를 따라 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러다가 제 둘째 딸 마거릿과 시선이 마주쳤다. 마거릿도 두 하녀를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이올렛과 눈이 마주친 마거릿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시작됐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부인?”

그때 앞에 서 있던 황후가 바이올렛을 재차 불렀다. 바이올렛은 황후를 돌아보며 능숙하고 태연하게 사과했다.

“아, 네. 죄송해요, 황후 폐하.”

바이올렛을 보며 황후가 다소 지친 얼굴로 부채를 펄럭였다.

“피곤하네요. 저는 아무래도 이곳에 오래는 머물지 못할 것 같습니다. 황궁을 장시간 비우는 것도 어렵고요. 너무 서운해 마세요, 부인.”

황후가 온화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바이올렛을 향해 말했다.

‘피곤하기는. 일이 끝나기 전에 도망을 가려는 계획이겠지.’

바이올렛은 속마음을 숨기며 슬픈 얼굴로 황후의 손을 잡았다.

“그럼요. 이해합니다. 지금 마음이 무척 심란하실 때죠.”

로드반 폐태자를 언급하는 그녀의 말에 황후가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빼냈다.

바이올렛은 그런 황후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전에는 어떻게든 그녀와 그녀의 딸들을 제 아들과 엮어보고자 안달이 나 있더니. 이제는 끈 떨어진 풍선을 바라보듯 바이올렛을 무심히 훑는다.

아무래도 오늘 플로네 가문을 공격하면, 더는 제게 플로네 가문이 필요치 않아지니 이렇게 태도를 바꾼 것이리라.

바이올렛은 황후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어깨에 걸친 케이프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케이프를 조금 뒤로 젖히니 목걸이가 드러났다. 울퉁불퉁하고 거무죽죽하게 색이 죽은 못난 돌이 제대로 세공도 되지 않은 채로 목걸이가 되어 황후의 목에 걸려 있었다.

“목걸이가 굉장히 특이하네요. 선물 받으신 건가요?”

마력석의 크기가 제각각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황후의 것은 다른 이들의 것보단 작아 보였다.

황후가 바이올렛의 말에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선물 받은 겁니다. 제 인생을 바꿔준 물건이에요.”

이렇게 대놓고 목걸이로 만들어 파티에 오다니. 바이올렛은 황후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따라 웃었다.

“인생을 바꿔줄 목걸이라니. 누가 선물해주신 건지 무척 궁금하군요.”

“세계 최고의 마법사였답니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마법사라 말씀드리긴 곤란해요.”

황후가 대수롭지 않게 바이올렛의 질문에 대답했다. 바이올렛이 그녀에게 그것과 관련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캐물으려고 할 때였다.

근처에 서 있던 황후의 아버지이자, 로드반 폐태자의 외조부 패더슨 백작이 다가와 황후의 귀에 무언가 속삭였다.

바이올렛은 황후의 입가에 미소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 * *

나는 바네사와 미아가 손에 포도주를 들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며 에녹을 찾았다.

“에녹.”

에녹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다정한 얼굴로 나를 향해 귀를 기울인다. 그와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어쩐지 조금 민망해져서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시작된 것 같아요.”

내 속삭임에 에녹의 시선 또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바네사와 미아에게 꽂혔다.

우리 말고도 두 하녀의 움직임을 유심하게 쫓는 이들이 있었다. 황후와 패더슨 백작, 그리고 린네하온 대주교와 마법사 협회 사람들이었다.

“카이든은 어디 갔는지 알아요? 아까부터 보이지 않아요.”

“꼰대도 계속 보이질 않네요.”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 온 유안나가 내게 말했다. 그때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자. 모두 주목해주세요.”

황후였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우리 플로네 영애를 위해서 축하 건배를 제안할까 합니다. 모두 잔을 채워주세요.”

황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네사와 미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바네사와 미아를 유심히 지켜보던 황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음을 짓는다.

나는 바네사를 돌아봤다. 바네사는 동요 없는 얼굴로 덤덤하게 내 잔과 에녹, 그리고 유안나의 잔에 차례로 포도주를 따랐다. 멀리서 미아가 루제프와 아스달의 잔에도 포도주를 채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조용히 황후를 따라 포도주를 채운 잔을 들었다. 주변에서 나와 내가 든 잔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모란꽃 일원들이 분명했다.

“마거릿 로즈 플로네의 생일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황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이 건배를 외치며 일제히 잔을 치켜 든 뒤에 모두 포도주를 마셨다.

황후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녀를 따라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포도주를 마셨다. 내가 포도주를 완전히 들이키는 것을 본 황후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아까는 보지 못했던 목걸이가 황후의 목에 걸려 있는 걸 확인했다.

‘저거 설마……?’

그리고 그때,

쿠쿠쿵-

플로네 공작 성 밖으로 둔중하고 거대한 울림 같은 것이 들려왔다.

음악이 끊겼다.

사람들이 놀라서 술렁이며 연회장의 테라스 쪽으로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마력석을 이용해 마물을 불러들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마력석을 찾아 그들을 빠르게 검거해야 했다. 이건 시간 싸움이다.

그때 느긋한 얼굴로 황후가 내게 다가왔다.

“포도주가 참 향이 좋더군요.”

나는 빈 잔을 바네사에게 건네주고 황후를 돌아봤다. 그녀의 목에 걸린 마력석에서는 아직 빛이 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영애. 생일선물은 마음에 드셨나요?”

“네?”

“그 포도주는 제 선물이었어요. 이름이 뭐더라. 텐타티오넴 포도주?”

그렇게 말하며 스산하게 웃는 황후의 얼굴이 소름끼치도록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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