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9)화 (209/234)

이니스가 고갯짓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엔 사람들 사이에 그림자처럼 녹아 있는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자가 서 있었다.

버네튼 신문사의 기자, 에밀리였다. 에밀리의 집중분석 칼럼에 그녀의 초상화가 기재되어 있어서 기억한다.

이니스가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초대했어. 은밀하게.”

그 말에 그제야 퍼즐이 끼워 맞춰진 것 같았다. 신문에 기재 된 잠입 내용이 어쩐지 자세하다 싶었다.

“나와 이 사건들에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잘 됐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이니스를 마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에밀리는 오늘 있을 일을 착실하게 기록하고 소문을 퍼트려줄 인물로 아주 제격이었다.

“그럼 오늘 힘내보자.”

이니스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녀는 용건을 끝낸 뒤에 미련 없이 제 볼일을 보러 사라졌다.

은지가 드레스 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자 시도를 했지만 내가 오늘의 파티 주인공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지나치게 많이 쏠려 있었다. 결국 녀석은 성가시단 듯 다시 드레스 주머니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은지가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꼭 투덜거리며 숨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저번부터 사춘기 딸 같다고 하긴 했지만, 정말 사춘기인가?

뒤이어 황후와 교황이 동시에 연회장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회색 머리카락이 긴 수염, 새하얀 수단에 붉은 어깨 망토. 그리고 금색으로 이뤄진 영대. 누가 봐도 베나트리에 교황으로 보이는 사람이 먼저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를 향해 예를 갖춰 인사했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소문대로 무척 아름다우시군요. 탄일을 축하드립니다, 영애.”

교황이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내게 마주 인사했다. 표정만 봐서는 정말로 세상 자애로운 성직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섬뜩하고 무서웠다. 웃는 얼굴 끝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흐르고 있을 생각을 하면 말이다.

루제프와 말다툼을 하고 있던 카이든은 교황을 보자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그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진다. 교황을 향한 그의 시선엔 극렬한 혐오가 묻어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교황청에서 실험을 당했고 그 실험의 책임자가 교황이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슬쩍 걸음을 움직여 카이든의 앞을 가로막아 시야를 차단했다. 교황이 그런 내 행동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이 잠시 내 등 뒤에 있던 카이든에게 닿았다가 멀어졌다.

나는 교황이 유안나에게로 관심을 옮기는 것을 보고 카이든을 돌아봤다. 내가 그의 시야를 가렸던 의도를 알아차린 카이든은 복잡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넌 정말…….”

그가 할 말이 많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과거의 잔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만 있기엔 그가 내게 너무 소중했다.

무언가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가 없었다. 뒤이어 황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뒤이어 등장한 황후는 곧장 내게 다가왔다가 내 옆에 선 에녹을 발견하고 잠시 주춤했다.

“생일 축하해요, 영애.”

에녹의 눈치를 보며 떨떠름하게 내게 인사한 황후는 곧 어머니에게 붙들렸다. 어머니는 나와 눈이 슬쩍 마주치자 윙크를 했다. 아마도 황후는 어머니께서 전담마크하며 마력석을 체크할 것 같아 안심이 됐다.

교황은 유안나가 상대를 하려는 모양이다.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이날만을 고대한 사람처럼 회심의 미소를 지은 채로 교황에게 다가갔다.

“엉덩이 무거우신 분이 여기까지 오시다니, 놀랍네요. 이렇게 먼 길 오시다가 골로 갈 나이 아니십니까. 조심하셔야죠.”

그리고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교황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했다. 뼈가 잔뜩 실린 말이었다. 교황을 바라보는 유안나의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교황은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유안나의 말과 행동을 손녀딸의 재롱 즈음으로 여기는 듯했다.

“감히 건방지게 교황 성하께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성녀님께선 교육이 더 필요해 보이시는군요.”

그러나 유안나의 행동을 나무란 이는 다른데서 나타났다. 나는 루제프와 비슷한 디자인의 사제복을 입은 남자를 쳐다봤다.

“린네하온.”

루제프가 그 이름을 짓이겨 씹듯이 뱉었다. 아무래도 대주교인 모양이다.

“어머, 성하를 생각하는 제 마음도 몰라주시다니. 린네하온 대주교님께서는 교황 성하의 건강도 헤아려본 적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유안나가 한쪽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고 가련하게 눈물을 찍어 보인다.

그녀의 화법이 섬에서는 조금 얄미웠는데, 같은 편이 되니 이렇게 하는 말마다 속 시원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교황과 이 대주교는 유안나와 루제프에게 맡겨야할 것 같은데.

유안나와 차원의 균열 얘기는 우선 문제 해결을 모두 한 뒤에 나누는 게 좋겠다. 카이든과의 대화도. 그때 다시 한 번 해봐야겠다.

나는 에녹과 카이든을 슬쩍 돌아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력석을 회수할 준비를 해야겠다.

* * *

린네하온은 루제프를 상대하며 미간을 찌푸리다가 슬쩍 주변을 훑었다.

마거릿의 전담 하녀인 바네사가 바쁘게 파티 내부를 오가며 손님들에게 포도주와 다양한 음료, 디저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준비는 확실히 했겠지.”

교황이 그를 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린네하온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플로네 가문의 하녀 하나를 매수하고 ‘물건’을 건네 두었으니 신호하면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이곳으로 마물을 불러 모은 다음에 혼란을 틈타 생존자들을 제거할 예정이었다.

플로네 가문의 하녀를 매수한 이유는 텐타티오넴 꽃가루를 이용해 과거처럼 생존자들을 가사상태로 만들어 손쉽게 그들을 처리하기 위함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 일’도 한꺼번에 처리할 예정이고 말이다.

베나트리에 교황은 온화한 얼굴로 허허 웃음을 지었다. 린네하온은 언제봐도 그의 표정 관리는 놀랍다고 생각했다.

‘저 정도는 되어야 교황을 할 수 있는 건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다가 그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속닥입니까? 성녀인 저를 제외하고 할 만한 업무 지시가 있습니까?”

유안나가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린네하온은 버럭 인상을 구겼다.

“당연히 많습니다. 성녀님의 역할과 제 역할은 다르지 않습니까.”

“네 역할은 나와 비슷할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알아도 되겠군.”

루제프가 바로 린네하온의 말을 반박했다. 교황은 자애롭게 웃는 얼굴로 한발 물러나 린네하온에게 속삭였다.

“이쪽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나는 이만 ‘그 일’을 시행하러 가봐야겠군.”

유안나와 루제프는 린네하온 선에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렇게 대답한 린네하온은 짜증스럽게 입술을 짓이기며 루제프를 노려봤다.

이런 성가신 것들……!

* * *

카이든은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결계가 잘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모란꽃 놈들이 마력석을 꺼내 마력을 사용해봤자 결계 안에 있는 플로네 공작 성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력석을 발동시키는 순간 로드반의 것처럼 마력석이 빛을 낼 것이니 그 틈에 그들을 검거하면 그만이었다. 연회장은 그런 쥐새끼들을 몰아놓고 잡기에도 제격 아니겠는가.

연회장 근처를 배회하며 결계를 확인하고 있던 차에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왔다.

“로드께선 여기 계셨군.”

카이든은 경계 어린 태도로 등을 돌렸다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미간을 좁혔다.

베나트리에 교황이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으십니까.”

“흠. 로드에게 예의를 기대하면 안 될 일이긴 하지만, 섭섭하군. 우리가 보통 사이는 아니지 않나.”

“지금 그런 X 같은 소리를 하려고 나를 찾은 건 아닐 테고. 우리가 그딴 한가한 인사를 할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뒤지고 싶은 거 아니면 꺼지십시오. 마거릿을 봐서 폭력은 자제하는 중이니.”

카이든의 욕설에 교황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역겹게.

드문드문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끔찍한 실험 속에는 늘 교황의 얼굴이 있었다. 영혼이 죽은 것 같은 눈을 하고 그를 무심히 바라보던 눈동자는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아주 잘 자랐군.”

턱을 쓰다듬으며 마치 가축을 품평하는 듯한 시선으로 카이든을 훑던 교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나스 님은 잘 계신가.”

“XX, 뭐?”

카이든은 눈앞에 선 베나트리에 교황을 찬찬히 살폈다.

‘제나스는 잘 있냐’고 한 건가. 뭘 알고 물어보는 걸까.

조심스레 가늠해보며 교황의 표정을 꼼꼼하게 살폈지만 구렁이 백 마리를 품고 있기라도 한 건지 그의 속내는 못내 파악하기 어려웠다.

[저 녀석은 잘 못 자란 것 같은데. 베나트리에가 벌써 저렇게 늙었단 말이야? 얼마 전에 봤을 때만 해도 땅꼬마였던 것 같은데. 인간은 참 빨리 늙어.]

카이든의 속에서 제나스가 중얼거렸다. 대체 그 ‘얼마 전’이 얼마나 얼마 전이란 말인가. 게다가 저도 인간이면서 인간은 참 빨리 늙는다는 소릴 하다니. 하긴 제나스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다.

카이든은 속으로 제나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게 무슨 말인지 넌 아냐?’

[무슨 말이긴. 내가 우리 후손님 몸에 봉인되어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은데?]

제나스가 남 이야기를 하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카이든은 욕설을 뱉었다. 하여간 필요할 때 도움이 안 되는 자식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그가 신경질적으로 반문했지만, 베나트리에 교황은 그저 수염을 만지며 의미 모를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다는 말이,

“로하데 후작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로드께서 제나스 님을 모시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였다.

제나스의 말이 맞았다.

베나트리에 교황은 카이든이 제나스를 몸속에 봉인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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