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208)화 (208/234)

* * *

베나트리에 교황과 황후는 아직 연회장에 도착하기 전이다. 물론 그들이 파티의 주인공보다 늦는다고 해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린네하온 대주교는 다른 이들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연회장 내부의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젠장, 작전을 실행해야 하는데.’

마력석을 가진 이는 총 10명이 남았다. 그중 하나는 린네하온에게도 있었다. 주머니 안에 손을 넣자 울퉁불퉁한 마력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 별스러운 마력석을 쥐고 있으면, 머릿속에서 무엇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요동친다.

-뭐든 다 할 수 있어.

-이 마력석만 있으면.

이것만 쥐고 있으면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리고 절대로 마력석을 빼앗기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다.

까득.

린네하온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유안나와 루제프를 응시했다.

빅토르 대주교가 실종됐다. 그것도 란그리드 제국 생존자 귀환파티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난 직후에 말이다. 다른 사제들과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빅토르만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 게다가 빅토르 대주교는 마력석을 소지하고 있던 이였다.

교황청에서도 마력석을 가진 대주교 둘이 실종됐다. 헤스티아 왕국에 있던 애버딘과는 연락이 완전히 두절됐다고 들었다.

생존자들이 마력석을 찾아다니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꺼번에 관련된 일원들이 사라질 리가 없지.

‘하지만, 그래 봐야 마력석을 파괴할 수는 없을 텐데.’

천년 동안 부서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온 마력석이었다. 마력석을 파괴할 방법은 마력석의 개발을 지시했던 제나스만이 알 것이다. 로하데 가문에서 마력석을 개발했던 마법사들은 모두 오래 전에 죽었으니까.

‘아니지. 마력석을 파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마력석이 파괴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러다가 린네하온은 잠시 의문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은 해보질 않았지? 한번 즈음 해볼 법 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석을 쥐고 있다가 린네하온은 잠시 멍한 얼굴로 허공을 주시했다. 머릿속에 부옇게 안개가 낀 듯 어지러워졌다. 조금 시간이 흐르자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곧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린네하온은 다시 유안나와 루제프, 그리고 멀리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헤스티아 왕세자와 사람들을 몰아내며 화를 내고 있는 마탑주를 주시했다.

그때, 린네하온과 눈이 마주친 루제프가 입을 뻐끔거렸다. 린네하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가 하는 말을 알아보기 위해 입모양을 유심히 지켜봤다.

‘뭘 쳐다봐.’

린네하온은 짜증스럽게 입매를 비틀었다. 저 재수 없는 자식은 수도원 시절에서부터 그와 상성이 맞질 않았다.

까탈스럽고 더러운 성격을 가진 주제에 신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사제.

정식으로 세례를 받기 전까진 신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던 린네하온과 달리, 루제프는 늘 뛰어난 실력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차기 교황감으로까지 거론될 정도였다.

그래서 린네하온은 알레아 실험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베나트리에 교황에게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 바로 루제프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며.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다.

‘그런데 저 자식은 왜 꽃을…….’

루제프는 품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게 유안나의 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듯했으나, 린네하온이 보기엔 아니었다.

루제프는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 세상에. 역시 외모만큼은 란그리드 제국 제일이라고 불릴 만도 하네요.”

옆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린네하온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마거릿 로즈 플로네가 들어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만큼 아름다운 외모긴 했지만 그의 관심은 마거릿이 아니다.

교황과 황후가 도착하면 작전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그는 때를 기다리며 숨죽였다.

* * *

연회장을 둘러보다가 시야에 바네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바쁘게 연회장을 돌아다니다가도 흘끗흘끗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꼭 마치 찾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거릿, 혹시 로드와 무슨 일 있었나.”

귓가에 에녹의 목소리가 닿는다. 나를 연회장 안으로 에스코트해 준 에녹은 나를 대신해, 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온 신경은 내게로 쏠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잠시 곤란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아니, 사실 곤란할 것도 없지. 카이든이 직접적으로 내게 거리를 두겠다고 말한 건 아니다. 단지 이제부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지. 그 뒤로 묘하게 나를 피하고 있었고.

잠깐 연회장을 둘러봤지만 카이든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내가 답을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고 있자 에녹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린 듯한 단정함으로 무장한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에녹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저도 사실 모르겠어요. 제나스 때문에 카이든이 저를 피하는 것 같아요. 제나스가 자꾸만 밤에 저를 찾아오거든요.”

“……뭐?”

에녹이 포도주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가 멈칫하고는 나를 쳐다봤다. 그의 날카로운 눈썹이 매섭게 일그러진다.

그러고 보니 카이든에게는 말했지만 에녹에게는 제나스가 밤마다 나를 찾는 일에 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내게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잠시 난처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연회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를 예의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얘기할걸.’

“마거릿, 그런 말을 왜 내게는 하지 않았지?”

“그게…….”

“마거릿!”

때마침 유안나가 다가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메그~!”

에녹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내 한숨을 뱉으며 물러났다. 어깨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놀라서 꼬물꼬물 기어 내려와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유안나가 나를 끌어안은 채로 어깨에 볼을 마구 비비며 고양이처럼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더욱 커져 갔다.

“어쩜, 마거릿은 더 예뻐진 것 같네요. 역시 내 친구는 뭘 해도 빛나.”

그녀는 신이 난 얼굴로 나를 요리조리 살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때 내 앞으로 불쑥 꽃다발이 드리워졌다.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꽃다발을 쳐다보자니 멋쩍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꽃다발을 내민 이는 다름 아닌 루제프였다.

“선물입니다.”

“아니, 웬 꽃다발이에요?”

“안 예쁩니까?”

내 물음에 루제프가 조금 실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원하던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무 예뻐요! 고마워요.”

“꽃을 받아보시는 게 처음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필 처음 받아보신 꽃이 그런 것이었으니……. 영애께 꼭 제대로 된 꽃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알레아 섬에서 루제프가 내게 텐타티오넴 꽃을 선물해준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루제프도 꽃 선물은 처음 해본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도 나도 꽃 선물을 처음 해보고 처음 받아보는데, 하필 그게 텐타티오넴이었다니.

“마거릿, 꽃 선물 받아본 적 없어요?”

내 옆에 꼭 붙어서 팔짱을 끼고 있던 유안나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에녹도 나를 쳐다봤다. 뭐 이런 게 궁금한가 싶어서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족들끼리 꽃을 주고받거나 하지는 않았으며,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망나니로 통하지 않던가. 꽃 선물을 받아봤을 리가 없었다. 과거의 마거릿은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를 보는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갑자기 내 손에 들린 꽃다발을 누군가가 휙 들어 올렸다. 놀라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니, 눈부신 은발이 눈에 들어온다.

“카이든?”

나와 거리를 둘 것처럼 피하던 카이든이 눈앞에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급히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고는 내 옆에 여유로운 얼굴로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에녹을 가리켰다.

“마거릿, 황태자를 파트너로 선택했다며.”

“어……?”

카이든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아 보였다. 하지만 입술을 두어 번 달싹이다가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루제프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그 꽃은 영애의 것입니다. 돌려주십시오.”

“이건 마거릿한테 안 어울려.”

카이든의 단호한 대꾸에 나는 조금 상처를 받았다.

“그렇지. 내가 꽃하고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지.”

조금 주눅이 들어서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카이든이 당황해서 나를 봤다.

“어? 마거릿, 그런 말이 아니라…….”

“하여간 더러운 마법사들은 미적 감각도 없어서는. 당신 같은 조악한 심미안을 가진 인간이 영애의 마음을 헤아릴 수나 있겠습니까? 꽃 내놓고 떨어지십시오.”

“야, 따까리. 내 말은 네가 뭔데 마거릿한테 꽃 선물을 하냐는 거야. 심지어 마거릿은 꽃 선물을 받아본 적이 없다며.”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루제프의 반박에 카이든이 나를 쳐다봤다.

“마거릿. 꽃 선물은 내가 해줄게. 너한테 잘 어울리는 건 내가 더 잘 알아.”

나는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나한테 거리 두기 하기로 한 것 아니었니?

“야, 너 이제 나한테 좋아한단 말은 안 하겠다며.”

나는 말을 잇다가 주변 눈치를 살피곤 입을 다물었다. 방금 내 말, 혹시 누가 듣진 않았겠지?

유안나와 루제프에 카이든까지 다가오자 다들 슬금슬금 우리 주변에서 멀어진 상태다. 이 시끌벅적한 파티에서 우리 대화가 멀리까지 들리진 않았을 것 같긴 했다.

유안나와 루제프는 다소 묘한 얼굴로 나와 카이든을 번갈아 쳐다봤다. 에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으나 심기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젠 널 좋아한다고 말 못 하겠어.’

카이든도 제가 얼마 전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나를 보며 울상을 짓다가 변명했다.

“꽃 선물을 하는 거랑 좋아하는 건 상관없잖아.”

젠장.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로 그가 욕설을 뱉으며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로드는 아직도 이상한 헛소리를 자주 하는군.”

그때 등장한 아스달이 카이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저번엔 뭐랬더라. 영애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영애가 보고 싶고, 웃는 게 기분 좋고, 영애가 오직 자신만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라고 했던가? 하여간 로드도 중증이야.”

그 말을 듣고 유안나가 진절머리를 치며 카이든에게서 멀어졌다. 카이든은 그게 뭐가 어떻냐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이랑 지금 이 말은 다르죠. 사정이 있습니다. 모르면 조용히 하십쇼.”

에녹에게도 그러더니 카이든은 아스달에게도 가차 없었다.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더니 이렇게 바로 눈이 뒤집혀 달려올 줄은 몰랐지만, 나는 카이든을 이해했다. 아니, 사실 진정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나스를 품고 있는 그의 심정은 내가 다 헤아릴 수도 없이 고통스러울 텐데 말이다.

“이게 어떻게 달라, 영애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영애에게 처음은 자신이고 싶은가? 로드,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파렴치한 인간이로군?”

아스달의 반박에 카이든도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스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보며 말했다.

“영애, 꽃 선물은 내가 해주겠네.”

“내가 해줄 테니, 자네는 신경 꺼.”

에녹이 끼어들어 내게 다가오는 아스달의 걸음을 막았다.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꽃은 필요 없어요. 주교님, 꽃 선물 고마워요.”

나는 카이든의 손에서 꽃다발을 빼앗아 들었고 루제프의 얼굴이 그제야 환하게 밝아졌다.

그때 이니스가 내게 다가왔다. 이니스는 당황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어디 내놔도 부끄러울 것 같은 우리 애들이 싸우는 것을 보다가 내게 말을 걸었다.

“마거릿. 봤니? 버네튼 신문사의 기자가 하나 잠입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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