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생일 파티 당일,
나는 새벽부터 분주했다. 파티 준비로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제 있었던 카이든과의 복잡 미묘한 대화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바네사와 함께 최대한 서둘러 준비를 했는데도 벌써 오후가 되었다.
“아, 맞다. 파티 준비는 잘 되어 가? 주방 뒷문은 열어뒀다고 했지?”
내 영문 모를 물음에도 바네사는 내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 한 번에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네. 지시하신 대로 진행 중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마무리 되고 조금 여유가 생겼을 때 즈음 바네사가 신문을 들고 왔다.
“오늘자 신문 가져다 달라고 하셨죠?”
나는 그녀에게서 신문을 받아들고는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오늘 화제가 된 소식들을 읽어 내렸다.
[알레아 섬 수색 진척 상황은?! 아직도 베일에 싸인 섬. 섬은 정말로 실존하는가……!]
나는 흘끗 헤드라인을 훑고 아래 내용을 찬찬히 살폈다.
알레아 섬 수색은 아직 진전이 없는 모양이다. 워프 게이트 좌표가 찍혔다는 란그리드 남부 해역이 버뮤다 삼각지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거센 파도가 이는 장소였던 것이다. 디에고 형제가 아직 그 근처로는 접근도 하지 못했단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모란꽃 놈들은 좋아하겠네. 그나마 다행인 건, 지금 세간의 시선이 모두 란그리드 남부 해안가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도 함부로 알레아 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장을 펼쳤다.
[에녹 황태자와 아스달 왕세자가 7인 납치 사건의 배후로 지목한 각국의 지도자는 누구……? 에밀리의 집중분석!]
전에 에녹과 아스달이 ‘이번 전쟁을 지지한 사람이 납치 사건의 배후일 확률이 높다’라는 말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래서 전쟁을 선두 한 지도자들이 누구인지 분석을 한 것 같다.
에밀리라는 기자는 납치 배후 용의자로 지목한 이들의 신상을 공개했는데, 황후와 교황청, 로하데 후작 등 제법 그럴듯하게 후보를 좁혀 놨다.
……이거 안 잡혀가나? 황족 및 귀족 모독죄가 성립될 여지가 있는데.
하지만 버네튼 신문사는 란그리드 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영향력이 대단한 언론기관이었고 황제가 에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니, 황후와 로하데 후작도 섣불리 압박을 가하지는 못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나중에 후환이 두려울 것 같기는 하다. 아마 지금 즈음이면 버네튼 신문사가 황후와 교황청 사람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었을지도. 역시 기자들은 겁이 없어.
[장안의 화제인 마거릿 로즈 플로네의 생일파티! 참석자 명단의 일부를 긴급 입수……!]
나는 이어지는 기사를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가십 엄청 좋아하네. 이런 것도 기사화하는 거야?’
갑자기 버네튼 신문사의 신뢰도가 수직 하락했다. 신문에선 내 생일파티에 에녹 황태자는 물론 아스달 왕세자와 마탑주, 얼굴 보기 어렵다는 성녀도 참석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면서 파티에서 있을 스캔들에 대한 기대감을 표했다. 정말 할 일 없나 보네. 거기다가 신문에 공개적으로 파티에 잠입하겠다는 포부까지 밝혔다.
더불어 내 생일 파티에 어떻게 잠입할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었다. 뭐야, 이런 정보는 어디서 난 거지?
그때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
똑똑.
“아가씨, 황태자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문을 열어주겠니.”
내 대답에 살롱의 문이 열리고 황태자 제복을 입은 에녹이 들어왔다.
한 치 틈도 보이지 않는 딱딱한 동작과 서늘한 눈빛이 잠시 살롱 안을 훑고서 내게 닿았다. 그가 잠시 놀란 듯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부끄러워서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오늘의 난 화려한 장식을 올려 머리카락을 높게 올렸다. 다만 어깨선이 과하게 내려온 탓에 환히 드러난 맨살이 좀 시렸다.
소시지처럼 둥글게 부푼 매머루크 소매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고 드레스 전반적으로는 내 눈 색에 맞춘 파란 원단과 새하얀 레이스를 섞었다. 황실 귀환파티는 정말 급하게 준비했던지라 이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안 어울리나?
한참 동안 말이 없기에 조금 민망했는데, 에녹이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아름답군.”
에녹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게 아름답다 말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섬에서는 아름답다는 말 같은 게 나올 수가 없긴 했지.’
그때 목에 리본을 매단 은지가 내게로 꼬물꼬물 기어왔다.
“세상에, 귀여워라.”
나는 은지를 주워 어깨에 올렸다. 은지는 내 칭찬을 알아들었는지 내 목에 자신의 뺨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마거릿.”
에녹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나를 보는 에녹의 금안은 짐승이 본능을 억누르기라도 하듯 날것의 느낌을 풍겼다.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듯이 강렬하고 사나운 시선에 나는 당황했다. 에녹이 풍기는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혀 온다.
그러자 근처에 서 있던 바네사가 눈치를 보더니 황급히 살롱을 나갔다. 젠장, 가지 마!
“마거릿, 그대는 항상 날 자극하는군.”
“네, 네?”
내가 뭘 했다고? 억울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가 천천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 그대의 파트너가 되고 싶은데. 그래 줄 수 있나.”
이번엔 카이든도 에녹도 내게 먼저 파티의 파트너가 되겠다고 제안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냥 혼자 참석할까 했는데.
나는 잠시 내게 내밀어진 손을 보다가 카이든을 떠올렸다. 마음이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가만히 나를 기다리던 에녹이 이내 손을 거뒀다. 그제야 아차 싶었는데, 갑자기 그가 내 손을 먼저 잡았다.
“싫으면 말해. 놓아줄 테니.”
꼭 무례한 짐승이 야만스러운 감정을 억누르고 다정한 신사처럼 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싫으면 말하라고? 싫지 않았다. 잠깐 스쳐가고 마는 일시적인 감정도 아니었다.
섬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마음이, 공든 탑처럼 눈에 띄게 높아지고 나서야 그 자리에 이런 감정이 있었노라. 알게 된 것만 같았다.
새삼스레 알아차린 이 당황스러운 감정을 피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에녹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간질거린다. 나를 바라보는 에녹의 입가에 포만감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때까지는 몰랐다. 에녹과 함께 파티장에 들어선 모습을 보고 카이든이 거리를 두겠다는 말을 간단히 철회하며 나한테 달려올 줄은.
* * *
나는 파티장으로 향하면서 그간 황실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우선 로드반 폐태자의 처형이 결정됐다고 한다. 날짜는 대략 한 달 뒤였다. 그 탓에 황후가 황제의 집무실 앞에서 선처해달라며 울며불며 몇 날 며칠을 지새웠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대주교의 말로는 마력석을 가진 ‘모두’가 이 파티에 참석할 거라고 했었잖아요. 그런 상황이면 황후는 참석 안 할까요? 황후 폐하께서 마력석을 가진 건 확실할 것 같은데.”
“황후라면 참석할지도 모르겠군. 생존자들을 전부 없애기 위해 모인다 하지 않았나. 내가 없으면 폐하께서 형님을 복권할 것이라 여길 분이다. 그분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에녹은 무감각한 얼굴로 덤덤히 대답했지만, 어쩐지 그 말을 듣는 내가 착잡했다.
“만약 황후가 친히 플로네 영지까지 온다고 한다면, 어머니께서 직접 그녀를 상대하실 거예요.”
“그렇군.”
에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과 루제프 주교님은 연회장으로 바로 오신다고 했어요.”
“디에고 경을 빼곤 다 모이겠군.”
“그러게요.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겠어요.”
섬에서 지지고 볶을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모두에게 정이 들 줄은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다시 섬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단 한 톨도 없지만.
“이번 파티에서 모란꽃 세력을 검거하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어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앞을 쳐다봤다. 연회장으로 향하는 긴 복도가 어쩐지 더 길게만 느껴졌다.
“제나스가 사라지지 않으면 다 끝난 게 아니잖아요.”
“이번에 모란꽃 세력을 전부 잡으면 그도 사라지겠지.”
에녹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 다소 회의적이었다.
제나스는 분명 꾸미는 것이 있다. 이건 확실해 보였다. 어쩌면 카이든이 내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도 제나스를 감당하기 점차 버거워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혹시 제나스가 언급한 알레아 섬에 있을 마력석이 그가 가진 비장의 수일까?
“카이든이 걱정돼요.”
순간 에녹이 걸음을 멈췄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이해한다.”
“네?”
“그러니 괜찮아. 그 인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섬에서 진작 그대를 포기했을 테니까.”
“잠깐만요, 에녹.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알아듣게 설명해 봐요.”
“그대가 나 대신 로드를 선택한다고 해도 그대 옆에만 있게 해준다면 나는 괜찮…….”
“아니, 잠깐. 잠깐.”
그게 제국의 황태자가 할 소리야? 그 말은 꼭 내 세컨이어도 좋으니 옆에 있게 해달란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싫어!
나는 에녹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이 길로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어깨에 얌전히 고개를 괴고 있던 은지가 무슨 일이냐는 듯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정말로 저는 카이든이 걱정 돼서……. 그게……. 플로네 영지로 내려오기 전에 제나스가 저를 찾아왔었는데, 제가 에녹에게서 편지 보냈었잖아요. 그가 의미심장한 얘기를…….”
“아가씨, 여기 계셨군요.”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시간이 되어도 내가 보이질 않자 집사가 직접 나를 찾으러 왔기 때문이다.
“이따가 다시 얘기하지.”
에녹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시간을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집사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 * *
생각보다도 더 많은 인원이 파티에 참석했다. 초대장을 보냈던 가문에서는 빠짐없이 전부 참석을 한 듯싶었다.
버네튼 신문사의 에밀리는 외알 안경을 고쳐 쓰고는 구석진 자리에 서서 가만히 연회장 내부를 관찰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쏠린 곳이 있었는데, 그 끝에는 연한 카키브라운의 단발머리를 한, 아름다운 성녀가 서 있었다. 교황청 내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말할 정도로 고위 인사였다.
‘아무렴, 백 년 만에 나타난 특별한 성력을 가진 성녀인데.’
에밀리는 조용히 그녀의 옆에 선 남자를 쳐다봤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아름다운 물빛 머리카락에 꽃처럼 청초한 외모의 남자가 싸늘한 얼굴로 서서 좌중을 훑고 있었다.
루제프 카인 디페르데 대주교였다.
그는 교황청에서도 아주 유명했다. 열두 대주교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진 대주교였으며, 그 힘을 가장 뛰어나게 활용할 줄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성질머리가 아주 괴팍하고 까탈스럽다고 들었는데, 성녀의 옆에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잠시 성질머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겠지.’
시종일관 짜증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매섭게 훑는 걸 보아하니 후자가 맞는 듯 보였다.
그리고 나타나서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휘어잡은 이는 다름 아닌 란그리드 제국의 마탑주였다.
전 대륙을 통틀어 단 4명뿐인 마탑주.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칭송받으며,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화자 되는 인물이었다.
“세상에, 무슨 마탑주가 저렇게 섹시해요?”
“어머, 헤리엇 영애는 지난 귀환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셨나 보군요.”
“맞아요. 저희는 이미 그때 뵈었었죠. 변함없이 황홀한 외모네요.”
근처에 있던 영애들이 마탑주를 보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보였다.
“일주일 걸려서 파티에 참석하기를 잘했어요. 세상에 이런 거물들의 얼굴을 한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이야. 헤스티아 왕세자도 참석하신댔죠? 황태자 전하께서도 직접 오셨다고 들었고요.”
“황후 폐하께서도 참석하신다고 하셨으니, 말 다 했죠. 교황 성하께서도 직접 오신다고 하시던데요? 성하께서는 지난번 귀환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으셨는데, 대단하죠. 이건 거의 황실 파티와 다를 게 없어요.”
에밀리는 그 말을 듣고 수첩을 꺼내 조용히 메모했다.
그래. 이건 황실 파티와 다를 게 없이 호화롭고 대단했다. 플로네 가문의 영향력뿐만 아니라 지금 세간에서 회자되는 마거릿 로즈 플로네 영애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때 마침, 오늘 생일의 주인공이 연회장 내부로 입장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